26.07.20 16:28최종 업데이트 26.07.20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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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한국시리즈에서 안타를 기록한 홍성흔이 포효하고 있다. 결승타든 쐐기타든, 추격타든 아니면 동료와 팬들을 위로하는 마지막 이닝의 큰 의미 없는 단타든, 그는 늘 야구 인생에서 처음 맛본 손맛인 듯 격렬히 포호했다.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 안타를 기록한 홍성흔이 포효하고 있다. 결승타든 쐐기타든, 추격타든 아니면 동료와 팬들을 위로하는 마지막 이닝의 큰 의미 없는 단타든, 그는 늘 야구 인생에서 처음 맛본 손맛인 듯 격렬히 포호했다.유성호

1998년 방콕에서, 야구가 처음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치러졌다. 그리고 병역 문제를 합법적으로, 그것도 국민적 응원 속에서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만들어졌다. 메이저리그에서 정상급 선발투수로 자리잡고 있던 박찬호를 비롯해 아직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프로야구 최고의 선수들이 총출동했고, 아마추어 몫으로 뽑힌 대학생들 중에는 김병현, 박한이, 그리고 홍성흔이 있었다.

'아시아판 드림팀'을 구성한 한국 야구대표팀은 대만과 일본을 말 그대로 '어린애 팔 비틀 듯'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2년의 시간을 번 홍성흔은 이듬해인 1999년에 곧바로 두산 베어스에 입단했다. 그 시절의 베어스는 한국프로야구 1군 포수의 절반을 길러내는 팀이었다. 그때도 국가대표 주전 포수 진갑용이 버티고 있었고, 이도형과 김태형이라는, 공격과 수비에 각각 특기를 가진 수준급 베테랑들이 후보 자리에서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부터 베어스의 주전 포수는 홍성흔으로 바뀌었고, 얼마 뒤 진갑용은 삼성으로, 이도형은 한화로, 김태형은 지도자의 길로 각자 흩어져야 했다.


신인 홍성흔은 선배들의 빈 자리가 별로 드러나지 않게 베어스의 홈플레이트를 지켰고, 더불어 16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신인왕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는 야구실력으로만 설명되는 선수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더그아웃의 공기 자체를 바꿔놓는 힘이 있었다. 투지가 좋고, 에너지가 넘쳤으며, 무엇보다도 늘 웃었다. 그것도 크게 소리 내어.

그는 짧은 안타 하나를 치고도 마치 인생에 처음 안타를 쳐본 아이처럼 뛰었고, 동료의 그저 평범한 타점 하나에도 마치 한국시리즈 결승타가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더그아웃을 달구었다. 또 홈런을 칠 때면, 아마 매일 연습이라도 하지 않나 싶은 작위적인 동작으로 배트를 던지며 자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기쁨을 표현하는 방식의 요란함에 비해 보복구를 얻어맞는 일은 비교적 적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풍기는 천진난만함에 상대도 정색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잘 잡고 잘 치고, 잘 웃고 잘 웃기는 선수

2012년 5월 2일 6회초 무사 롯데 홍성흔이 역전 솔로홈런을 치고 환호하고 있다.
2012년 5월 2일 6회초 무사 롯데 홍성흔이 역전 솔로홈런을 치고 환호하고 있다.연합뉴스

하지만 여전히 이기는 것 외의 팬서비스에 둔감하던 2000년대 초반, 자유분방한 감정표현이 선수의 미덕은 아니었다. 더구나 야구장 밖에서 자꾸 눈에 띄는 선수는 당연한 걱정 외에도 억울한 편견과 오해에 엮이곤 했다. 하지만 외박하지 않고 유흥에 돈 쓰지 않는 홍성흔은 늘 특이한 예외였다. '잘 노는' 걸로 유명하면서도 사생활의 추문에 얽히지 않은 거의 유일한 선수가 그였다.

물론 그의 야구 인생이 늘 순탄했던 것도 아니다. 2003년에 당한 무릎 부상 이후 포수로서의 경쟁력을 잃기 시작했고, 결국 주전 자리를 내주더니, 포지션 변경을 둘러싼 갈등 끝에 트레이드를 요구하며 한동안 팀을 이탈하는 일도 있었다. 선수생명의 위기였다. 하지만 나름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뒤, 홍성흔은 방망이 하나를 쥐고 지명타자로 다시 걸어 나왔다. 잃은 자리를 두고 주저앉는 대신 남은 재능으로 자신의 값어치를 처음부터 다시 증명하기로 한 것이다.

2009년, 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얻어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은 뒤 그의 야구는 또 한 번 활짝 피었다. 2009년과 2010년 2년 연속 타격 2위에 오르며 롯데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사직구장은 그의 포효에 더 강렬한 '떼창'으로 반응했다. 그곳은 애초에 열정이 끓어 넘치는 곳이었고, 오래전부터 홍성흔 같은 선수를 기다려온 곳 같았다. 그와 함께 정수근, 가르시아 같은 개성 강한 동료들이 어우러지며 더그아웃은 늘 들썩였고, 부산 팬들은 그 흥을 몇 배로 부풀려 다시 그라운드로 돌려보냈다. 홍성흔의 열정이 팬들의 진동을 입어 메아리치며 다시 서로를 자극하는, 요란한 순환이었다.

비시즌에도 그는 예능 프로그램을 누비며 입담과 춤으로 사람들을 웃겼다. 야구를 잘하는 선수는 많았지만, 야구의 즐거움을 야구장 담장 밖으로까지 끌고 나온 선수는 드물었다. 그는 야구를 보지 않던 이들에게도 얼굴이 알려진 몇 안 되는 선수였고, 그렇게 야구라는 스포츠가 가진 친근함을 넓혀갔다.

잠실의 떠버리, 사직의 구원자

홍성흔은 배트플립, 일명 '빠던'으로 유명하다. 멋져서가 아니라 요란해서. 그의 빠던은 종종 한 템포 느렸고 어딘가 어색했다. 본능적으로 던졌다기보다, 자신도 순간 당황하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준비해온 퍼포먼스를 시연하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더욱 요란한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홍성흔은 배트플립, 일명 '빠던'으로 유명하다. 멋져서가 아니라 요란해서. 그의 빠던은 종종 한 템포 느렸고 어딘가 어색했다. 본능적으로 던졌다기보다, 자신도 순간 당황하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준비해온 퍼포먼스를 시연하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더욱 요란한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연합뉴스

하지만 4년 뒤 두 번째 FA 자격을 얻었을 때, 롯데는 그를 끝내 붙잡지 않았다. 팬과의 소통은 말할 것도 없었고 함께 한 4년 내내 실력과 가치를 증명했지만, 롯데는 좀 더 높은 가성비를 추구하는 팀이었다. 그런 롯데의 계산 속에서 30대 후반에 들어선 그의 나이는, 좀 더 값을 깎아야만 하는 커다란 흠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4년 전 그를 보냈던 두산이 달려들었다. 그가 남긴 빈자리의 허전함을 4년 내내 경험하고 곱씹은 결과였다. 마침 그 무렵 팀을 재정비하던 두산은 공격력에 큰 보탬이 되면서도 곧바로 적응기 없이 선수단의 중심이 될 수 있는 홍성흔의 특이한 가치를 높이 샀다. 한동안 조용했던 더그아웃과 관중석에 다시 불을 붙일 능력도 물론 필요했다. 홍성흔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한, 4년 31억 원의 넉넉한 계약이었다.

돌아온 홍성흔은 전성기의 화력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팀이 기대한 역할을 해냈다. 연평균 두 자릿수 홈런과 3할 안팎의 타율을 남겼고, 무엇보다 클럽하우스와 더그아웃에서 팀을 하나로 묶었다. 팀의 역사를 꿰뚫어온 전설적 선수로서, 하지만 고루한 권위와 거리가 먼 천진난만한 열정의 홍성흔이었기에 '화수분'에서 쏟아져 나오던 젊은 선수들은 조금도 구겨지지 않고 각자의 능력과 창의성을 그라운드에 그대로 펼쳐놓을 수 있었다.

야구의 본질은 즐거움이다

홍성흔은 그라운드에서도, 더그아웃에서도, 연습장에서도, 그 밖에서도 늘 웃었다.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즐겁다는 말이, 어쩌면 그런 사람을 보며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홍성흔은 그라운드에서도, 더그아웃에서도, 연습장에서도, 그 밖에서도 늘 웃었다.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즐겁다는 말이, 어쩌면 그런 사람을 보며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두산 베어스

승부, 대결, 환희, 좌절, 환호, 눈물. 야구장의 시간은 종종 그런 단어들로 묘사되며, 그라운드를 주목하는 이들 역시 그런 뜨거운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선수들은 물론 그라운드 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걸고 몸과 마음을 갈아 넣으며, 관중들도 그런 선수들과 교감하면서 자신들이 미처 그렇게 살아내지 못하는 치열함을 상상한다.

하지만 야구란 애초에 게임이고, 게임의 본질은 즐거움이다. 때로 잘 만들어진 게임은 우리를 고통스러울 정도로 치열하게 승리에 몰입하게 하지만, 그 승리 자체가 뭔가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게임 속 승리의 가치는 몰입하게 만드는 장치라는 점에 있고, 몰입하는 과정이 주는 즐거움이야말로 진짜 목적이 된다. 그래서 즐거움이란 치열함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홍성흔은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 선수였다. 벼락같이 나타나 주전이 되고 신인왕이 되면서도, 하지만 포수 자리를 잃고 팀을 떠나면서도, 새로운 팀에서 새로운 동료와 팬들을 만나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시작했던 듯 진하게 어우러지면서도, 그리고 다시 첫 팀으로 돌아와 조금 서먹해진 재회를 하면서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 웃음은 현실을 모르는 낙관이 아니라 현실을 견디는 방식이었고, 그 좋고 나쁜 현실들을 다 끌어안고 바라보며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보는 통찰이었다.

그래서 그의 야구 인생은 두산에서 꽃을 피우고 롯데에서 만발했으며, 다시 두산에서 향기를 남겼다. 그 두 팀의 팬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야구와 삶을 즐길 줄 아는 이들이었지만, 홍성흔과 함께 좀 더 흥겨울 수 있었다. 두산 팬들은 선수들의 개성과 흥을 기꺼이 품어주었고, 롯데 팬들은 그와 함께 춤추며 야구장에서 삶의 축제를 벌였다. 홍성흔은 그 두 곳에서 가장 홍성흔다울 수 있었다.

홍성흔은 뛰어난 선수였다. 두 개의 우승 반지와 두 개의 아시안게임 금메달, 한 개의 올림픽 동메달을 가졌으며 6개의 골든글러브, 신인왕, 두 번의 미스터올스타, 통산 208개의 홈런과 3할의 타율을 기록했다. 그 기록들은 물론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먼 훗날의 팬들에게까지 전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호흡했던 팬들은 그의 웃음과 그의 기쁨을 먼저 기억한다. 기록은 존경받지만 즐거움은 사랑받는다.

그와 함께 웃자. 어차피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고, 어차피 재미있으려고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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