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군사쿠데타 후 옥중의 김영욱
김광호
1960년 5월 23일 자 <부산일보> '사감(私感)으로 일대 학살'은 김정태 등에 대한 학살이 "이승만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발악적 학살"인 동시에 강백수 진영읍 부읍장의 사적 감정에도 기인하는 학살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김영욱은) 사망자 수가 모두 밝혀지는 대로 진정서를 작성, 국회·계엄사무소 등 관계 요로에 제출하고 살인행위에 관계했던 자들을 상대로 법의 심판을 요구할 것이라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행보는 김영욱이 1960년 6월 5일 국회 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 출석해 아버지의 일을 증언하는 단계로 이어졌다. 국회가 김정태를 빨갱이가 아닌 학살 희생자로, 김영욱을 빨갱이 가족이 아닌 피해자 유족으로 대하게 된 결과다. 이승만 집권기의 피학살자와 유족들에 대한 국가권력의 평가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다. 프랑스대혁명 때보다 훨씬 빨리 4·19혁명에 대한 반동 혹은 반혁명이 일어났다. 1961년 5·16 쿠데타는 김영욱의 처지를 아버지와 다를 바 없이 만들어놨다. 2018년 12월 11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김광호 인터뷰에 따르면, 김영욱은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빨갱이를 장례 지냈기 때문에 너도 빨갱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수사관들은 김일성을 만났다고 진술해 주면 그냥 풀어주겠다며, 짬뽕까지 사주면서 거짓 진술을 유도했다. 그러나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수사관들은 김영욱을 거꾸로 매단 채 고춧가루·식초와 각종 오물을 섞은 짬뽕 국물을 그의 얼굴에 들이부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학살 피해자들의 유골을 수습한 일로 인해 서른아홉 살 때 징역 7년 형을 받은 김영욱은 석방 뒤에도 고초를 당했다. 어디선가 어선이 납북되거나 북쪽에서 총알이라도 날아오면 그는 어디론가 끌려갔다가 아무 데나 버려졌다. 4·19혁명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던 피해자와 유족들이 5·16과 함께 반국가세력으로 재규정되는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대한민국의 가치 판단이 공식적으로 뒤바뀐 것은 5·16로부터 50년이 흐른 2011년이다. 그해 8월 7일 대법원은 고 김영욱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음을 밝혔다. 대법원은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김씨의 피학살자유족회 활동이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 북한을 찬양·고무하고 동조한 행위라고 보기 어렵다"는 원심판결을 지지했다.
피학살자유족회의 목적이 북한을 찬양·고무하는 게 아니었다는 점은 굳이 입증할 필요도 없는 상식이다. 그처럼 당연한 상식이 5·16 쿠데타 이후에는 통하지 않았다. 4·19를 계기로 바로 세워지는 듯했던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5·16에 의해 또다시 어지러워졌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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