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7.18 14:36최종 업데이트 26.07.1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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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 7월의 프랑스 파리는 지금처럼 무덥지는 않았지만 다소 불안정한 날씨를 보였다. 당시의 주프랑스미국공사이자 1801~1809년의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1743~1826)이 현지 날씨를 기록한 내용을 디지털화한 '제퍼슨: 날씨 및 기후 기록' 사이트에 따르면, 그해 7월의 파리는 더우면서도 구름이 많고 비가 자주 왔다. 혁명의 절정인 14일에는 16도에서 22도 사이의 온도를 보이는 가운데 흐리고 비가 왔다.

프랑스대혁명은 현대 세계에서 빛의 역할을 한다. 어두운 봉건 왕정을 떠나보내고 대중의 존엄과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는 민주주의를 불러들이는 빛의 이미지를 띤다. 그러나 이 빛은 초기에는 불안정했다. 구름이 끼고 비가 자주 내리는 반혁명·반동의 역사가 뒤를 이었기 때문이다.


바스티유감옥이 습격되고 왕정이 폐지된 뒤인 1793년에는 왕당파와 가톨릭의 반란이 있었고, 이듬해에는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나 혁명 이념이 후퇴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1799년에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키더니 1804년에는 스스로 황관을 머리에 썼다.

프랑스혁명만큼은 아니지만, 한국의 4월혁명도 맑았다 흐렸다 하는 불안전한 기상 상태를 보였다. 이승만이 하야성명(1960.4.26.)을 발표한 뒤 허정 과도정부는 '선 총선, 후 개헌' 아닌 '선 개헌, 후 총선'을 관철시킴으로써 자유당 의원들이 개헌을 해놓고 물러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6월 15일 개헌 때는 3·15부정선거에 대한 처벌 조항이 헌법에 들어가지 못했다.

8월 23일 출범한 장면 내각도 시대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반공법 및 데모규제법을 통해 정권을 수호하는 데에 더 치중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도 시위가 많았다. 당시의 대표적 학생운동가였던 이기택(1938~2016) 전 민주당 총재는 <우행, 내 길을 걷다>에서 "9개월 밖에 안 되는 제2공화국 기간 동안 거리시위가 2천 건에 연인원 1백만 명에 이르렀"다고 회고했다.

이런 혼란상이 이어지다가 1961년에 5·16 쿠데타가 벌어졌다. 이승만이 순차적으로 걸었던 독재의 길을 이때부터는 박정희가 단계적으로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가 극도의 혼란기였음을 보여주는 것 중 하나는 가치관이 아무렇지도 않게 전도되는 현상이었다. 이 시절을 살았던 김영욱(1923~2005)의 경험은 가치관이 순식간에 뒤집히곤 했던 당시의 현실을 보여준다.

좌익으로 몰아 국민보도연맹에 편입

설창고개에서 학살된 김정태
설창고개에서 학살된 김정태김광호

지금의 경남 김해시 진영읍 출신인 김영욱의 아버지는 1900년생인 독립운동가 김정태다.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3권 김정태 편은 1919년 3·1운동 당시의 진영장터 시위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3월 31일 오후 1시 그는 장터 근방의 흙다리에다 10척이나 되는 장대에 매어 단 대형 태극기를 세워두고, 시장에 모인 2천여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와 격문을 나누어주고, 그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고 서술한다. 이로 인해 그는 징역 1년 6월형을 받았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당했듯이, 이승만 정권은 이들을 좌익으로 몰아 국민보도연맹에 편입시킨 뒤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그 상당수를 학살했다. 김정태도 그런 피해자 중 하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3권은 "그는 전쟁 직후 부산 CIC(방첩대)에 잡혀갔다가 아들 김영욱이 빼내왔는데, 다시 진영읍 비상시국대책위원회에 의해 연행되었다"고 기술한다. 김정태가 피해를 입은 데는 인간관계도 작용했다. 손자 김광호의 진술에 근거한 위 보고서의 설명이다.

"전쟁 전 학생 성추행 사건으로 학교에서 파면당한 강○○ 교사(사건 당시 진영읍 부읍장)가 운수업을 하는 조부 김정태에게 이사를 도와달라고 하였으나 '그런 일로 파면된 사람의 이삿짐은 내 차로 운반 못한다'며 거절한 일이 있는데, 이 일로 감정을 가지고 있던 강○○ 부읍장이 비상시국대책위원회의 권위를 빌어 조부를 보도연맹원으로 몰아 연행·살해하였다고 한다."

억울하게 잃은 아버지를 김영욱은 그 유골도 수습하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그것은 김영욱과 가족을 더욱 위태롭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가 유골을 찾아낸 것은 10년 뒤인 4·19혁명 이후다. 동병상련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피학살자유족회에 참여해 희생자 발굴에 나선 결과였다.

손자 김광호의 진술에 따르면, 1960년에 김영욱이 주도한 유골 수습의 결과로 총 272구가 발견됐다. 그런데 당시의 기술로는 유골의 신원을 확인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딱 1구만은 그것이 가능했다고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운영하는 <현대한국구술자료관> 홈페이지에 실린 구술 동영상에서 김광호는 이렇게 진술했다.

"전부 뼈만 남았는데, 이 뼈가 누구 뼈인지 알 수가 있나. (중략) 272개를 딱 찾았는데, 그중에서 유일하게 한 사람만 신분이 확인됐어요. 그게 제 조부님이에요. 왜 확인이 됐느냐. 272구의 시신 중에서 금이빨을 가진 분이 딱 우리 조부님 한 분입니다."

대규모 인력과 자금을 동원해 발굴 작업을 주도한 사람은 김영욱이다. 김정태가 유일하게 금니를 하고 있었던 것은 김영욱이 그런 부담을 떠안을 수 있었던 배경을 알려준다. 이 같은 김영욱의 헌신은 이승만 정권 때 같았으면 '불의'한 일이다. 그랬던 것이 4·19혁명과 함께 가치관이 회복되면서 의로운 일로 재평가됐다. 이는 김영욱이 국가권력을 스스럼없이 대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빨갱이가 아닌 학살 희생자로

5.16군사쿠데타 후 옥중의 김영욱
5.16군사쿠데타 후 옥중의 김영욱김광호

1960년 5월 23일 자 <부산일보> '사감(私感)으로 일대 학살'은 김정태 등에 대한 학살이 "이승만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발악적 학살"인 동시에 강백수 진영읍 부읍장의 사적 감정에도 기인하는 학살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김영욱은) 사망자 수가 모두 밝혀지는 대로 진정서를 작성, 국회·계엄사무소 등 관계 요로에 제출하고 살인행위에 관계했던 자들을 상대로 법의 심판을 요구할 것이라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행보는 김영욱이 1960년 6월 5일 국회 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 출석해 아버지의 일을 증언하는 단계로 이어졌다. 국회가 김정태를 빨갱이가 아닌 학살 희생자로, 김영욱을 빨갱이 가족이 아닌 피해자 유족으로 대하게 된 결과다. 이승만 집권기의 피학살자와 유족들에 대한 국가권력의 평가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다. 프랑스대혁명 때보다 훨씬 빨리 4·19혁명에 대한 반동 혹은 반혁명이 일어났다. 1961년 5·16 쿠데타는 김영욱의 처지를 아버지와 다를 바 없이 만들어놨다. 2018년 12월 11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김광호 인터뷰에 따르면, 김영욱은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빨갱이를 장례 지냈기 때문에 너도 빨갱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수사관들은 김일성을 만났다고 진술해 주면 그냥 풀어주겠다며, 짬뽕까지 사주면서 거짓 진술을 유도했다. 그러나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수사관들은 김영욱을 거꾸로 매단 채 고춧가루·식초와 각종 오물을 섞은 짬뽕 국물을 그의 얼굴에 들이부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학살 피해자들의 유골을 수습한 일로 인해 서른아홉 살 때 징역 7년 형을 받은 김영욱은 석방 뒤에도 고초를 당했다. 어디선가 어선이 납북되거나 북쪽에서 총알이라도 날아오면 그는 어디론가 끌려갔다가 아무 데나 버려졌다. 4·19혁명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던 피해자와 유족들이 5·16과 함께 반국가세력으로 재규정되는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대한민국의 가치 판단이 공식적으로 뒤바뀐 것은 5·16로부터 50년이 흐른 2011년이다. 그해 8월 7일 대법원은 고 김영욱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음을 밝혔다. 대법원은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김씨의 피학살자유족회 활동이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 북한을 찬양·고무하고 동조한 행위라고 보기 어렵다"는 원심판결을 지지했다.

피학살자유족회의 목적이 북한을 찬양·고무하는 게 아니었다는 점은 굳이 입증할 필요도 없는 상식이다. 그처럼 당연한 상식이 5·16 쿠데타 이후에는 통하지 않았다. 4·19를 계기로 바로 세워지는 듯했던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5·16에 의해 또다시 어지러워졌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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