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7.18 11:57최종 업데이트 26.07.18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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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1512년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1512년퍼블릭 도메인

고대부터 인간의 영혼은 신비스러운 영역이었다. 가장 뛰어나다고 여겨지는 고등 동물을 비롯해 세상의 어떤 존재도 인간의 정신에 비견될 만한 능력이 없다고 보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영혼의 정체를 규명하는 일이 인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탐구 과제로 자리 잡았다. 당연히 하나의 흐름으로 모일 리는 만무했다.

무엇보다도 영혼이 우리 눈으로 늘 확인할 수 있고, 손쉽게 만져지는 육체와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가 주요한 논란이었다.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지성사를 지배한 관점은 단연 육체에서 독립한 실체로서의 영혼이었다. 주류의 지위를 차지한 철학은 물론이고, 대다수 사람의 일상에 밀착한 종교의 뿌리에도 스스로 존재하며 활동하는 영혼이라는 발상이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빛나는 천재성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예술가 미켈란젤로(1475~1564)의 <아담의 창조>는 영혼이 외부의 힘에 따라 육체에 주어지고 머물게 되었다는 견해를 반영한다. 미술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이 그림을 접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하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는 순간을 담았다는 점도 웬만큼 알고 있다.


로마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을 장식한 미켈란젤로 작품 가운데 한 부분이다. 성당의 천장은 신에 의한 '천지창조'의 과정, 정면 벽에는 예수를 중심으로 한 '최후의 심판'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위 그림은 천지창조 그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아담의 창조 장면이다.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다음 내용을 재현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라고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무심코 보면 창세기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 듯하지만, 사실은 상상력을 가미하여 변형한 그림이다. 예술가로서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많은 화가가 곧이곧대로 신이 아담에게 바짝 다가서서 얼굴을 맞대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는 모습으로 그렸다. 이렇게 하면 내용에는 충실할 수 있어도, 신과 인간 사이의 신비로운 순간보다는 인간 사이의 흔한 장면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미켈란젤로는 신이 하늘을 날아서 다가오는 설정을 통해, 신을 땅에 속박되어 살아가는 인간과 구분함으로써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를 위해 얼굴을 맞대는 상황이 아니라 한 손을 뻗어 아담의 손가락에 닿으려는 구도로 변형했다.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한 극적인 묘사가 그림 전체에 긴장감을 확 불어넣는 효과도 살려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육체와 정신의 구분이라는, 꽤 다루기 어려운 깊은 내용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화가들은 신의 숨결 이전의 아담을 인형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상태로 그리곤 했다. 신의 작용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는 신이 넣어준 숨결로 기본적인 생명 활동 자체가 비롯되었다고 보는 시각을 반영한다.

하지만 위의 창세기 내용에 나타나듯이 이미 지구에는 여러 짐승이 있었다. 짐승들은 신체의 작용으로 이미 생존에 필요한 활동을 하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아담도 마찬가지다. 아직 숨결이 전달되기 전임에도 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손을 뻗어 움직이고 있다. 신체 활동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신의 숨결이 단순히 동물과 같이 신체를 이용한 생존 활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신이 능동적이라면 아담의 모습은 다분히 수동적이다. 힘차게 손을 쭉 뻗은 신과 달리, 아담은 아직 충분한 생기가 없는 듯 손가락이 아래로 향하고 팔꿈치도 무릎에 대고 있다. 시선도 무언가 뚜렷한 지향을 갖지 못하고 멍한 느낌을 준다.

이는 신이 아담에게 준 숨결이 단순한 생명 현상이 아니라, 정신을 불어넣어 영혼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을 만드는 의미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영혼을 통해 비로소 인간이 능동적 존재가 된다. 미켈란젤로는 이전의 화가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구도와 상황 설정, 그리고 미묘하게 다른 표현을 통해 인간이 신의 축복으로 영혼을 지닌 존재로 세상에 창조되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독립적 영혼에서 만들어진 종교의 기반

육체의 기능 외부에서 신이 인간에게 영혼을 심어주었다는 발상은 기독교 교리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로마에서 기독교가 출발하던 당시에 교리를 정립한 교부신학의 대표자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제시한 다음 내용은 인간을 인간이 되게 하는 결정적 기준으로서 영혼을 강조한다. 이는 기독교 신학은 물론이고 서양 철학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영혼은 진리 자체 안에서 기쁨을 얻을 때 비로소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 주여, 나는 내 기억 밖에서는 당신을 찾지 못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알게 된 후부터는 내가 당신에 대하여 찾아낸 것은 모두 기억 속에 간직했습니다. (...) 내가 진리를 찾았을 때 진리이신 나의 하나님을 찾았고 그 후에는 결코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에 의하면 영혼이 있기에 인간만 진리에 도달할 능력이 있다.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이유도 영혼 활동에 있다. 무엇보다도 신을 찾고, 신과 연결하는 통로도 영혼을 통해 주어진다. 인간의 영혼 이외에는 신에게 다가설 방법이 없다. 영혼을 이용해 진리에 도달하는 과정만이 진리 자체인 신을 찾는 길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찾았을 때 진리인 신을 찾았다는 말은 기독교와 기존 유대교가 어떻게 다른 교리 위에 서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기존 이스라엘의 유대교는 율법 준수가 곧 신에게 가는 길이라고 믿었다. 인간 지성의 역할 없이 '오직 믿음'만을 요구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율법을 넘어, 여호와와 예수의 말을 매개로 한 진리 탐구로 신에게 다가선다. 신은 진리 자체이기 때문에, 진리 탐구는 신을 찾는 유일하고 가장 빠른 길이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1541년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1541년퍼블릭 도메인

나아가 신에 의한 구원 역시 영혼을 통해 이루어진다. 미켈란젤로의 벽화 <최후의 심판>은 영혼의 구원을 묘사하고 있다. 세상의 마지막 날에 예수가 재림하여 멸할 자와 구원할 자를 심판한다는 교리를 담고 있다. 그림의 중심을 팔을 들어 심판을 내리는 예수가 차지하고 있다. 위로부터 차례로 구원을 받고 부활하는 사람들, 구원을 위해 승천하는 사람들, 아래로는 지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모두 영혼이 처하게 되는 서로 다른 운명이다. 예수 주변에는 성인들을 비롯하여 구원의 선택을 받은 영혼들이 모여 있다. 예수 바로 오른편에서 베드로가 구원의 약속인 천국 열쇠를 건네는 중이다. 아래로는 영혼을 지하 세계로 실어 나르는 노인 뱃사공 카론이 노를 거칠게 휘두르는 모습이 보인다. 이렇듯 신은 인간의 육체와 소통하지 않고, 영혼을 고리로 인간과 연결된다. 영혼이 인간의 실체라는 발상이 있어야만 성립하는 교리다.

정신·육체의 관계와 관련하여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베드로 아래에 있는 성인 바르톨로메오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 사후에 선교 활동을 하다가 산 채로 전신의 살가죽이 벗겨지는 처형을 당했다. 그림에서 이 성인의 영혼은 자신의 벗겨진 피부를 들고 있다. 육체가 처참하게 벗겨지고 잘렸어도, 영혼은 가장 고귀한 상태에 이를 만큼 별개의 실체임을 보여준다.

기독교만의 특색은 아니다. 세계 대다수 종교에서 나타나는 발상이다. 인도와 동아시아의 종교에서 흔히 보이는 윤회설도 마찬가지다.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다음 세상에서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영혼을 매개로 종교의 정당성을 유포하고 현세 인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같다. '독립적 영혼'이라는 생각이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힘을 얻은 이유이기도 하다.

철학적 관념론의 뿌리가 되다

고대 그리스의 주류 철학도 영혼의 독립성을 가장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서양 철학사 전체에 걸쳐 가장 깊게 영향을 준 플라톤도 인간의 본질을 영혼에서 찾았다. 소크라테스 대화편 <알키비아데스 1>에서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사람은 적어도 셋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영혼, 육체, 그리고 이 둘이 합쳐진 전체 말일세. (…) 사람은 육체도, 육체와 영혼이 결합도 아니네. 내 생각에는 아무것도 아니거나, 무엇이기는 하다면 영혼 말고 다른 게 결코 아니라는 결론이 남는군."

그가 보기에 영혼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다. 신체가 인간의 핵심이 아닌 것은 물론이거니와 영혼과 신체의 결합조차 인간을 설명할 수 없다. 오직 순수하고 독립적인 영혼만이 인간을 규정한다. 육체는 영혼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육체가 스스로 기능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영혼에 의한 것인데,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영혼의 덕으로 인간은 현세의 삶을 넘어서는 존재가 된다. 육체 혹은 육체와 섞인 것은 사멸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영혼은 육체에서 독립해 있기에 사멸하지 않는다. 이른바 영혼 불멸론을 펼친다. 그러므로 육체와 여기에서 비롯된 감각을 멀리하고 오직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에서 철학의 과제를 찾아야 한다.

영혼의 독립과 불멸이라는 신비주의적 관점은 기독교 교리를 정립한 신학자들에게 가장 훌륭한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나아가서는 근대 철학에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유럽 근대 합리론을 대표하는 철학자 데카르트도 <방법서설>에서 인간의 본질이 영혼이라고 한다. "나의 본질 내지 본성은 오직 생각하는 것이요, 또 존재하기 위하여 아무 장소도 필요 없고, 어떠한 물질적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임을 알았다."

현대인의 사고방식 안에도 인간의 고귀함을 영혼에 두고, 육체에 근거를 둔 욕망을 열등함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기독교나 불교의 종교적인 교의나 철학자의 권고에만 머무는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널리 퍼진 도덕률에도 의외로 육체의 욕구를 경계하는 내용이 꽤 많다. 물질주의 문명이 최고조에 이른 자본주의 사회임에도, 여전히 인간 존재의 의미를 영혼에서 구하는 사고방식이 상당한 힘을 발휘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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