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분투재단에서 이주노동자들과 연대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서선영 교수는 이주노동자들의 체류안정화 정책 등 사회적 성원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분투재단
정부의 단속과 처벌 중심의 정책은 미등록 이주민을 '불법 체류자'로 호명한다. 이들은 '불법'이라는 낙인 속에서 마치 범죄를 저질렀거나 저지를 수 있는, 그래서 숨어지내는 사람들처럼 인식된다. 그러나 '불법'이라 불리는 법적, 행정적 상태에서 상상하게 되는 모습과 이들의 실제 모습, 즉 실재하는 삶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있다. 이민정책은 이러한 지위(status)와 실재(reality), 법과 존재, 제도와 삶의 간극을 확인하고 성찰하며 줄여나가야 한다.
최근 발간된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민 10인에 대한 생애사 연구 보고서('장기체류 미등록 이주민의 삶과 정의로운 이주정책', 2026)에 이들의 삶의 궤적과 모습이 세밀하게 나타나 있다. 보고서는 이주의 시작, 미등록으로 인해 지속된 체류, 지역에 뿌리내린 삶의 여정 속에서 체류 자격으로 인해 당한 노동착취와 폭력적인 단속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뿐 아니라 이들이 오랜 기간 지역의 구성원으로 이미 '정주'하고 있는 상태를 강조한다.
1999년에 입국해 올해로 27년째 한국에 거주 중인 꼬빌은 가구 공장의 칠 파트 팀장으로 노동 현장에서 인정받는 숙련공이다. 27년간 살아온 공단 지역을 '우리 동네, 우리 마을'이라 부르며 동네 슈퍼 주인, 공장 사장, 한국인 친구들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1991년에 입국한 라주는 35년 동안 한국 땅을 떠난 적이 없다. 그는 한국에서 대통령이 여덟 번 바뀐 것을 경험했다.
마음씨 따뜻한 라주는 대구 지하철 화재 때 같은 국적의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성금을 모아 보냈고, 최근에는 혼자 사는 80대 한국인 집주인이 수술을 받자, 한 달 넘게 집주인의 식사를 챙기고 병원을 함께 다니며 돌보았다.
1996년에 한국에 온 빅은 한 공장에서만 29년 근무한 성실한 노동자였다. 공장 옆 컨테이너 숙소에서 살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공장을 지키며 '만능 노동자'로 일했다.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 빅은 종교 공동체의 맏형으로 아픈 사람과 어려운 자국민들을 돌보는 삶을 살아왔다. 이들은 이렇게 오랜 기간 산업현장을 지켜온 숙련공이자 기술자이고, 지역사회의 이웃이며, 소수자들의 연대를 실천하는 시민으로 존재한다.
제도와 삶의 간극 줄이려면
꼬빌, 라주, 빅과 같은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민들은 한국 사회에 강한 소속감을 갖고 있다. 체류자격과 무관하게 수십 년의 삶을 통해 자신들이 거주해온 지역과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된 상태다. 단지 한국의 법과 제도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최근 이민정책의 방향은 이주민의 사회통합을 강조하고 있는데, 오랜 세월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며 살아온 이들이야말로 이 사회에 가장 잘 통합된 사람들이 아닌가?
'미등록'이라는 법적·행정적 상태와 이들의 '뿌리내린' 삶의 간극을 메우는 사회정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즉, 한국 사회에서 오랜 기간 노동하고, 인간관계를 맺으며, 공동체를 위해 기여한 이들에 대한 '체류권', 나아가 '사회적 성원권'(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받고 그에 따른 권리를 누리는 지위, membership)의 법적 인정이야말로 이민정책이 나아갈 방향이다. 이를 위해 위 보고서는 다음 두 가지 정책을 제안한다.
첫째, 미등록 이주민의 체류권은 상설 체류안정화 제도를 통해 보장되어야 한다. 일정 정도 요건을 갖춘 신청자에게 갱신 및 전환이 가능한 체류자격을 부여하는 공공정책으로 스페인의 '아라이고(arraigo, 스페인어로 '뿌리내림'이라는 뜻)' 제도가 하나의 사례다. 이 제도는 가족, 사회적 관계, 고용 등 스페인 사회에 자신의 삶이 '뿌리내렸음'을 입증하면 체류자격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애초에 3년을 최소 거주 기간으로 설정했으나 지난해 법령 개정으로 기간이 2년으로 단축되었다. 올해 스페인은 100만 명에 달하는 미등록 이주민의 정규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주민의 사회적 성원권 인정해야
둘째, 중앙정부의 체류안정화 정책을 통해 체류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경우에도, 지방정부 차원에서 미등록 이주민을 포용하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페인의 파드론(Padron, 실제 거주 사실만으로 등록되는 지방자치단체의 주민등록제도)은 미등록 이주민을 주민으로 등록하여 지자체가 제공하는 공공 사회서비스 이용은 물론, 지역 소재 은행이나 도서관 이용을 포함한 일상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걸림돌이 없게 하는 제도이다.
같은 맥락에서 캐나다의 '묻지도 말고 답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DADT)' 정책은 시와 위탁 기관 직원들이 개인의 이민 신분을 질문하는 것을 금지하고(Don't Ask), 나아가 수집된 정보를 이민 당국 등 외부 기관에 유출하지 않도록 차단하여(Don't Tell) 미등록 이주민이 공적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해외 사례들은 체류자격과 무관하게 지역 공동체 차원에서 이주민의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하여 권리를 보장하는 방안이며, 이주민과의 적극적 공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제도다.
한국 사회가 이민정책의 전향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지금, 정부는 미등록 이주민을 단속과 추방의 대상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 특히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민의 삶의 터전은 이곳, 한국 사회다. 오랜 세월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이들에게 체류권, 그리고 사회적 성원권은 마땅한 권리다. 미등록 이주민을 줄여야 할 숫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로 보는 것, 그것이 이민정책 전환의 진정한 출발점이다.
* 이 글은 이주노동연구모임 마르코(MARCO)가 우분투 재단의 지원을 받아 펴낸 보고서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민의 삶과 정의로운 이주정책(서선영, 김사강, 김철효, 이태정, 정영섭, 한준성, 2026)]을 바탕으로 작성됨.
▲서선영 충북대학교 교수
본인
필자 소개 : 서선영은 이주학(migration studies) 전공자로, 현재 충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주, 노동, 계급, 정체성, 도시 공간에 관심을 두고, 네팔에서 한국으로의 노동이주를 오랫동안 연구했으며, 최근에는 예멘 난민 문제를 다뤘습니다. 학교 밖에서는 '이주노동연구모임 마르코'에서 동료 연구자·활동가들과 함께 즐겁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