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7.15 11:57최종 업데이트 26.07.15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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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고 야구부 학생들이 광주일고 학생들을 향해 "스타벅스 가야지" "탱크데이"라고 외친 사실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10대 학생들이 극우세력·일베발 '혐오'에 물들어가고 있다는 점이 새삼 확인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전현직 교사 시민기자들이 필자로 참여하는 <10대 극우화, 해법은 없나> 기획을 통해 '10대 극우화 문제'의 핵심을 짚어내고, 우리 사회와 학교의 변화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편집자말]

혐오에 물든 학생들은 낙인 찍고 굴복시키는 것을 '공정'이라 믿고 있었다 (인공지능 제작 이미지)챗GPT

시작은 스타벅스의 '탱크데이' 마케팅이었다. 하필 5월 18일에 '탱크' 텀블러 할인 행사를 연 것을 두고, 계엄군 탱크가 진입했던 5·18 민주화운동을 조롱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논란은 6·3 지방선거 국면과 맞물려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진보 진영은 불매운동으로, 보수 진영은 자유 침해 프레임으로 맞섰다. 기업의 저자세 사과로 논란은 일단락되었지만, 불씨는 교실로 옮겨붙었다.

얼마 뒤 청룡기 야구대회에서 배재고 학생들이 광주일고 학생들에게 '탱크데이', '스타벅스 가야지'라는 조롱을 내뱉었다. 어른들의 진영 싸움 속을 떠돌던 혐오의 언어가 아이들의 입을 통해 그대로 흘러나온 것이다. 이 날카로운 언어들은 단순히 철없는 일탈이 아니다. 혐오가 온라인 커뮤니티를 넘어 10대의 일상 언어로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서글픈 징후다.


혐오는 아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난 6·3 지방선거에서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나선 후보들이 '퀴어 동성애 교육 OUT'(관련기사: 6.3 지방선거 '퀴어 동성애 교육 OUT'? 34년 차 교장이 묻습니다, https://omn.kr/2iex6)과 같은 혐오 조장 문구를 내걸었을 때, 우리 사회가 이미 혐오를 정치적 도구로 소비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직업계고 교장(서울로봇고 교장)으로서 나는 학교 현장에서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더 정교하고 차가운 형태의 공격성을 목격한다. 겉보기에는 무관해 보이는 배재고의 조롱과 우리 학교 안의 크고 작은 갈등 사이에는 공통된 문법이 있다. 역사적 맥락과 인간적 서사를 걷어내고, 오직 눈앞의 '규칙'과 '공정'만을 절대적인 잣대로 들이대는 태도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름의 검열과 '납작한 언어'

어느 날, 학생 하나가 내 SNS 사진에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라는 댓글을 달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 퇴임 무렵, 1만 보를 걸었다는 기록을 남기려 올린 평범한 사진이었다. 뜬금없는 적개심의 이유는 무엇일까?

천관율·정한울이 <20대 남자>(2019)에서 제시한 '남성 마이너리티 정체성' 개념은 이 당혹스러운 풍경을 설명한다. 내가 보기엔 최근 들어 비슷한 피해의식은 또래 여성들에게도 존재하지만, 유독 남성 쪽에서 더 날카롭고 정치화된 언어로 표출된다.

현재 1020 남성들은 자신들을 기득권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역차별받는 약자로 믿는다. 그들에게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정치인이 아니라, 자신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규정하거나 불공정한 정책을 펼친 적대적 권력의 상징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정치적 중립은 사실상 자신의 가치관에 반하는 모든 것에 대한 거부의 언어다.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직업계고 졸업자 대상 9급 기술직 공무원 채용제도 등도 비판의 끝은 늘 대통령을 향했다. 이들은 사안의 맥락을 살피지 않는다. 오직 눈앞의 엄격한 규칙 적용에 집착하며, 그것을 정직과 솔직으로 포장한다.

기사를 쓰며 다시 꺼내 든 책들<20대 남자>(천관율·정한울)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오찬호)는 오늘의 청년들이 왜 스스로를 약자라 믿게 되었는지를, <천관율의 줌아웃>과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오찬호)는 그 믿음 너머에서 여전히 싸워야 할 것들을 이야기한다. <90년생이 온다>(임홍택)는 그 세대가 어떤 얼굴로 교실 밖 사회에 서 있는지를 비춘다.오성훈

우리 학교 도서관의 <공산당 선언> 사건도 마찬가지다.(관련기사: 우리 학교 도서관에 '공산당 선언'이 있는 이유, https://omn.kr/2ih0t) 한 학생이 절차를 무시하고 책을 가져가 학교를 공격하는 증거로 삼았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유령 민원이 조직적으로 쏟아졌다. 이른바 좌표 찍기였다. 사회학자 오찬호는 <납작한 말들>(2025)에서 이를 복잡한 맥락이 거세된 '납작한 말들'이 소통을 망가뜨리는 현상이라 진단한다. 복잡한 논의를 생략한 채 즉각적인 응징에 열광하는 태도는 사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삶의 결을 납작하게 찌그러트리는 폭력에 가깝다.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지워진 채, 오로지 불온한 이념이라는 단편적인 프레임만 작동했다.

'불편한 공존'을 견디는 힘을 가르치는 것

10대들의 혐오 일상화, 해법은 무엇인가?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이 싸움에서 늘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 학교에서도 사회와 역사를 가르치던 두 원로 교사가 결국 명예퇴직을 선택한 일이 있었다. 여러 사정이 얽혀 있었겠지만, 학생과 학부모의 집요한 편향성 시비도 적잖은 무게로 작용했으리라 짐작한다. 그 학생들에게 교사의 수업은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피해 의식을 자극하는 정치적 세뇌로 읽혔을 것이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보다 편향이라는 낙인을 찍어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 그것이 그들에게는 승리이자 공정이었다. 교육적 권위가 흔들리는 자리에서 학생의 편협한 세계관은 더욱 고착화되었다.

그러나 나는 도서관에서 <공산당 선언>을 치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기사를 쓰고 교육적 원칙을 고수하자 민원은 잦아들었고, 책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은밀한 공격도 공개적인 대화와 원칙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는 것을, 이 경험이 증명했다. 이것이 우리가 '불편한 공존'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혐오를 이기는 해법은 더 강한 금지가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인 동시에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민주적 시민성을 기르는 데 있다. 학교는 입시와 기술을 가르치는 곳에 머물러선 안 된다. 나와 다른 생각을 담은 책이 도서관 한구석에 꽂혀 있는, 그 낯설고 불편한 공존을 배우는 곳이어야 한다. 배재고 학생들이 광주일고를 찾아 고개 숙이고 5·18 민주묘지를 참배했던 그 더딘 걸음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속한 단죄가 아니라 서로의 눈을 마주하는 시간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이다'식 고발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사회적 맥락을 읽어내는 인문학적 사유의 힘이다. 로봇을 다루는 기술을 배우는 우리 아이들이, 입력된 값에 따라 정답만 출력하는 로봇 같은 인간이 아니라, 복잡한 맥락을 질문할 줄 아는 뜨거운 인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금지가 아닌 질문이, 혐오가 아닌 토론이 교실을 채울 때, 아이들은 '차가운 공정'의 감옥에서 벗어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우리 학교 서가에 꽂힌 수많은 질문들을 믿는다. 그곳에서 시작될 어려운 대화를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사 채택 후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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