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쓰며 다시 꺼내 든 책들<20대 남자>(천관율·정한울)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오찬호)는 오늘의 청년들이 왜 스스로를 약자라 믿게 되었는지를, <천관율의 줌아웃>과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오찬호)는 그 믿음 너머에서 여전히 싸워야 할 것들을 이야기한다. <90년생이 온다>(임홍택)는 그 세대가 어떤 얼굴로 교실 밖 사회에 서 있는지를 비춘다.
오성훈
우리 학교 도서관의 <공산당 선언> 사건도 마찬가지다.(관련기사:
우리 학교 도서관에 '공산당 선언'이 있는 이유,
https://omn.kr/2ih0t) 한 학생이 절차를 무시하고 책을 가져가 학교를 공격하는 증거로 삼았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유령 민원이 조직적으로 쏟아졌다. 이른바 좌표 찍기였다. 사회학자 오찬호는 <납작한 말들>(2025)에서 이를 복잡한 맥락이 거세된 '납작한 말들'이 소통을 망가뜨리는 현상이라 진단한다. 복잡한 논의를 생략한 채 즉각적인 응징에 열광하는 태도는 사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삶의 결을 납작하게 찌그러트리는 폭력에 가깝다.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지워진 채, 오로지 불온한 이념이라는 단편적인 프레임만 작동했다.
'불편한 공존'을 견디는 힘을 가르치는 것
10대들의 혐오 일상화, 해법은 무엇인가?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이 싸움에서 늘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 학교에서도 사회와 역사를 가르치던 두 원로 교사가 결국 명예퇴직을 선택한 일이 있었다. 여러 사정이 얽혀 있었겠지만, 학생과 학부모의 집요한 편향성 시비도 적잖은 무게로 작용했으리라 짐작한다. 그 학생들에게 교사의 수업은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피해 의식을 자극하는 정치적 세뇌로 읽혔을 것이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보다 편향이라는 낙인을 찍어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 그것이 그들에게는 승리이자 공정이었다. 교육적 권위가 흔들리는 자리에서 학생의 편협한 세계관은 더욱 고착화되었다.
그러나 나는 도서관에서 <공산당 선언>을 치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기사를 쓰고 교육적 원칙을 고수하자 민원은 잦아들었고, 책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은밀한 공격도 공개적인 대화와 원칙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는 것을, 이 경험이 증명했다. 이것이 우리가 '불편한 공존'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혐오를 이기는 해법은 더 강한 금지가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인 동시에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민주적 시민성을 기르는 데 있다. 학교는 입시와 기술을 가르치는 곳에 머물러선 안 된다. 나와 다른 생각을 담은 책이 도서관 한구석에 꽂혀 있는, 그 낯설고 불편한 공존을 배우는 곳이어야 한다. 배재고 학생들이 광주일고를 찾아 고개 숙이고 5·18 민주묘지를 참배했던 그 더딘 걸음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속한 단죄가 아니라 서로의 눈을 마주하는 시간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이다'식 고발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사회적 맥락을 읽어내는 인문학적 사유의 힘이다. 로봇을 다루는 기술을 배우는 우리 아이들이, 입력된 값에 따라 정답만 출력하는 로봇 같은 인간이 아니라, 복잡한 맥락을 질문할 줄 아는 뜨거운 인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금지가 아닌 질문이, 혐오가 아닌 토론이 교실을 채울 때, 아이들은 '차가운 공정'의 감옥에서 벗어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우리 학교 서가에 꽂힌 수많은 질문들을 믿는다. 그곳에서 시작될 어려운 대화를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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