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3일, 일본 도쿄 황궁 동쪽 광장에서 열린 나루히토 일왕의 66세 생일 축하 행사 중 나루히토 일왕(왼쪽)과 마사코 왕비가 축하 인사를 보내는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 일본에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성골남진(聖骨男盡)에 대비하기 위한 국가적 준비 작업이 전개되고 있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은 신라 선덕여왕의 즉위 배경을 언급하면서 "성골 남자가 없어져서 여왕이 옹립된 것"이라고 기술한다. 일본인들이 걱정하는 것은 왕위계승권자가 없어지는 상황이다.
일본 헌법 제2조는 "황위는 세습되는 것이며, 국회의 의결을 거친 황실전범이 정하는 바에 따라 이를 계승한다"고 규정한다. 황실전범 제1조는 "황위는 황통에 속하는 남계(男系)의 남자가 이를 계승한다"고 선언한다.
어머니 쪽이 아닌 아버지 쪽으로 일왕의 피를 물려받은 남자에게 왕위계승권이 있다고 황실전범은 선을 긋는다. 공주의 몸에서 태어난 남자는 왕실이 볼 때 여계 남자이므로 위 규정에 따라 왕위계승에서 배제된다.
위 전범 제2조는 왕위계승권자의 신분을 제1호에서 제7호까지 열거한다. 이에 따르면, 일왕의 장남(제1호), 장손(2호), 장남의 또 다른 자손(3), 일왕의 차남 및 그 자손(4), 일왕의 기타 자손(5), 일왕의 형제 및 그 자손(6), 일왕의 백부·숙부 및 그 자손(7)의 순서로 계승권을 갖는다.
아들 없는 나루히토 일왕 후계자는 3명
이 기준에 의거해 현재의 나루히토 일왕을 이을 수 있는 후계자는 세 명이다. 나루히토는 아들 없이 아이코 공주만 뒀기 때문에 그 셋은 모두 나루히토의 직계가족 밖에 있다.
1순위는 나루히토의 동생인 후미히토(1965년 생)이고, 2순위는 후미히토의 아들인 히사히토(2006년 생)이고, 3순위는 나루히토의 숙부인 마사히토(1935년 생)다. 후계자가 아직은 셋이지만, 청년 후계자는 20세인 히사히토뿐이다.
아이코와 더불어, 후미히토의 딸인 가코까지 감안하면 청년 후계자는 셋이다. 이렇게 보면 후계자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남계 남성만 인정하는 황실전범하에서는 청년 후계자가 하나뿐이므로 성골남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게 됐다.
지난 4월 14일 자 <마이니치신문>의 기사 제목인 '여성 천황 찬성 61%, 반대 9%'에도 나타나듯이, 일본 국민들은 여성 일왕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정치권은 다르다. 정치권은 대체로 현재의 계승원칙을 유지하는 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만약의 상황이 생길 것 같으면 촌수가 먼 남자 왕족을 입양해 계승 문제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정치권의 입장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황실전범 개정안이 지난달 30일 임시각의를 통과했고, 이달 10일 중의원을 통과했다. 참의원에는 같은 날에 법안이 접수됐다. 참의원의 결론이 어떻게 나오든, 지금의 일본 정치권은 여성 군주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성골남진 상황이 임박하면 방계 남자의 입양을 통해 이 문제를 처리할 생각을 갖고 있다.
여성군주는 안 된다는 황실전범 개정안
과거의 일본 역사에서는 여성 군주들이 적지 않았다. 추고(推古)로 표기되는 스이코를 시작으로 총 여덟 명이 등장했다. 스이코는 그레고리력으로 593년 1월에 즉위했고, 마지막 여성 군주인 고사쿠라마치(後桜町)는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1762년에 등극했다.
여성 군주는 총 여덟이었지만, 여성 군주의 즉위는 열 차례 있었다. 7세기의 고교쿠와 8세기의 고켄은 각각 2회 즉위했다. 여성이 군주가 된 사례가 10차례나 됐던 점을 감안하면, 남계 남자의 왕위계승을 고수하는 일본 정치권의 태도는 일본 역사의 흐름에서 벗어난 것이다.
일본이 지금처럼 여성 군주를 배제하게 된 것은 메이지 시기(1868~1912)인 1889년이다. 일본 국회도서관이 발행하는 <레퍼런스> 2018년 제808호에 실린 야마다 도시유키 국회도서관 전문조사원의 논문 '구황실전범에 있어서 남계 남자에 의한 황위계승제와 영세황족제의 확립'에 따르면, 여성 군주를 배제하는 입법 작업을 명령한 것은 1887년 당시의 총리대신인 이토 히로부미다.
이 논문은 이토의 명령에 따른 황실전범 제정 작업이 완성된 것이 1889년이었다면서 "그 과정에서 작성된 어느 안(案)에도 여성 및 여계 계승은 규정되지 않았으며 여성·여계 계승에 관한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해서 일본에서는 남계 남자에게만 기회를 주는 왕위계승원칙이 확립됐다.
당시의 일본 사회를 주도한 것은 메이지유신(1868)을 일으킨 하급 무사 출신들이다. 이들이 갖고 있는 남성 중심의 '이에(家) 관념'이 왕실의 왕위계승에도 영향을 줬다. 이들이 생각하는 가족 혹은 가정 관념이 여성을 왕위에서 배제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와세다대학에서 발행되는 <비교법학> 1971년 제6권 제2호에 실린 나카무라 기치사부로(1913~1994) 전 와세다대학 교수의 논문 '일본의 근대화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와 관련된 천황제와 이에(家) 제도'는 1889년의 황실전범 제정이 "무가법(武家法)에 기초"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일왕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적 통합을 '혈연에 의한 결속'을 통해 달성하기 위한 일이 황실전범 제정이었다고 설명한다. 남계 남자 중심의 가족질서를 왕위계승원칙에 반영하고 이를 토대로 일본의 국가적 통합을 이루고자 황실전범을 제정했다는 설명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일본 왕실에서는 여계 남성 후계자나 여성 후계자의 존재가 부정됐다. 무사계급의 관점에서 국민통합을 이루고자 했던 이 조치가 성골남진을 우려하는 지금의 상황을 낳게 됐던 것이다.
일본 왕실이 진짜 걱정해야 할 것
그런데 일본 왕실은 성골남진 운운할 것도 없이 1945년 패망과 함께 중대 기로에 처했다. 세계적인 대전을 일으키고 대학살을 지휘한 전범 왕실이 패전 뒤에도 기존 지위를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아시아 동맹들과 손잡고 북한 및 소련·중국에 맞서 냉전 구도를 유지해야 하는 미국의 이해관계가 아니었다면 패망과 함께 일본 왕실은 역사 속의 존재가 됐을 수도 있다.
실제로, 미국 정부가 1946년 1월 7일 확정한 SWNCC(국무·육군·해군 조정위원회) 228 문서 '일본 정부제도의 개혁'은 일왕제도를 폐지하거나 보다 민주적인 방향으로 개혁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일본 왕실이 끊어질 뻔한 상황이 조성됐던 것이다.
패망 이전의 군국주의를 계승하는 일본 극우세력의 입장에서는 체제의 안정성을 유지하고 자신들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왕실을 남겨두는 게 유리했다. 이처럼 지금의 일본 왕실이 유지되는 근본 동력은 미국과 극우세력의 이해관계다. 일본 왕실의 존속은 아시아 냉전의 산물이다. 성골남자의 존재 유무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향후 미국이 극동에서 발을 떼고 일본 극우세력이 힘을 잃게 되면 일본 왕실의 존립기반은 지금보다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성골남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상황이다. 일본 왕실이 더욱 걱정해야 할 것은 후계자 숫자보다는 미국의 세계정책과 자국 극우의 동향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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