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7.17 17:37최종 업데이트 26.07.17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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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여름이 깊어 접시꽃 활짝 피어 돌담을 넘어다본다.김재근

습식 사우나에 들어선 듯한 날이 이어진다. 어떤 그리움처럼 더위도 해마다 조금씩 커가는 듯하다. 장마가 물러가고 햇살이 뜨거워질 무렵이면 아련한 기억 하나 떠오른다.

사람은 시간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기억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게 여름은 더위를 거슬러 그리움을 찾아가는 계절이기도 하다. 접시꽃 활짝 웃으며 돌담 넘어 보고 백일홍 꽃망울 터트리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여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어느새 고향 집 마당을 서성인다.


그 시절 여름 밥상에는 나름의 급이 있었다. 꽁보리밥 찬물 말아 풋고추 된장 찍어 먹는 소박한 일상이 있었고, 하얀 쌀밥 찻물 말아 구운 굴비 올린 호사도 있었다. 쌀밥은 제삿날이나 되어야 맛볼 수 있어, 겨울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원망도 했더랬다. 내가 오래 품고 살아온 여름의 맛은 그 둘 사이 어디 쯤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여름

장떡매콤하고 짭조름한 맛이 먼저 오고, 풋고추 향이 천천히 번진다.김재근

여름이 깊어지면 어머니는 장떡을 만드셨다. 풋고추 송송 썰어 넣고 밀가루 체에 곱게 내려, 절반은 조선간장으로 절반은 고추장으로 간을 맞춰 되직하게 반죽하여 너른 그릇에 얇게 펼쳤다. 검은깨 하얀깨 거짓말처럼 뿌렸다. 가마솥에 채반 걸쳐 중탕으로 앉히면 정지는 장작 타는 내음과 뜨거운 김으로 천천히 차올랐다. 문지방 넘어온 바람이 장떡 냄새를 실어 나르고, 처마 끝에서는 제비가 낮게 날았다. 익은 장떡은 뒤꼍 그늘에 식혀 강정처럼 모양 좋게 썰어 정지 설강에 올려두었다.

화려한 음식은 아니었다. 첫맛은 짭조름했고, 뒤이어 오는 고추의 매운맛은 오래 남았다. 씹을수록 밀가루의 쫄깃함과 장맛의 깊이가 어우러졌다. 장떡 하나만 있어도 밥 한 그릇은 금세 비워졌다. 가장 맛있던 짝은 국수였다. 두레박으로 막 길어 올린 샘물에 사카린을 숟가락 등으로 눌러 깨 넣고 삶은 국수를 말았다. 국수 후루룩 들이켜며 장떡 한입 베어 물면 더위도 허기도 함께 사라지는 듯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여름이었다. 그보다 맛있는 여름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지금도 눈 감으면 또렷하게 떠오르는 장면 하나, 툇마루에 앉아 찬물에 밥 말아 드시던 어머니 모습이다. 밥 한 숟갈, 장떡 한 입. 마당 가죽나무에서 매미가 목청껏 울고, 장독대 위로 뜨거운 햇살이 흘러내린다. 대숲으로 바람이 이파리 흔들며 지난다. 식구들을 위해 뜨거운 날을 더 뜨겁게 보내셨던 어머니의 여름이,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계절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어머니는 하늘나라 시민이 되셨고, 꽁보리밥에 풋고추는 흰 쌀밥에 굴비보다 귀한 음식이 되었다. 하지만 입맛이 달아나는 여름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장떡을 만들어 보기도 한다. 반죽도 비슷하고, 조선간장도 고추장도 풋고추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절의 맛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음식은 흉내 낼 수 있어도 그 음식을 둘러싸고 있던 시간은 돌이킬 수 없나 보다. 혀는 맛을 기억하고, 마음은 추억을 간직하고, 오직 그 뿐.

바게트두어 달에 한 번 오래된 단골 빵집에서 가져와 냉동고에 보관한다.김재근

언제부턴가 바게트를 좋아하게 되었다. 입안에서 두 계절이 만나는 맛 때문이었을 것이다. 겉은 가을 낙엽처럼 바삭하고 속은 봄 구름처럼 촉촉한 느낌. 가마솥에서 막 긁어낸 누룽지 닮은 입천장이 벗겨질 정도로 투박한 겉과 솜사탕처럼 푹신하게 감싸는 보드라운 속, 그리고 촘촘한 기공에 숨은 은은한 발효 향,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밀가루와 물과 소금과 이스트, 네 가지 기본적인 재료로만 만들어, 밀의 향과 발효의 깊이가 오롯이 드러난다. 이것 외에 다른 재료가 들어가면 바게트가 아니라고, 출생지인 프랑스에서는 법으로 정했다지. 화려한 재료가 없어도 깊은 맛을 내는 점이 어쩌면 장떡과 닮았는지도.

주말 아침은 대개 바게트와 함께한다. 두어 달에 한 번 단골 빵집에서 가져와 냉동해 두었던 걸 느긋하게 해동한다. 오븐에 살짝 구워내면 갓 구운 빵의 풍미가 마술처럼 되살아난다. 소박이용 오이처럼 잘라, 세로로 갈라서 겉이 안으로 들어가게 감싼다. 상처 없이(?) 온전히 즐기기 위한 나만의 비법이랄까.

대개는 발사믹 식초와 바질 페스토를 알맞게 섞은 올리브 기름에 적셔 먹는다. 버터를 바르기도 한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도 버터 바른 빵과 커피로 아침을 먹으며 자신만의 모더니즘을 만들어 갔다니 꽤 운치 있는 조합이다. 살구잼을 더하면 맛이 사치스럽게 변한다. 마요네즈에 마늘을 넣으면 풍미가 한층 깊어진다. 올리브 기름 가볍게 바르고 가는 소금 성기게 내리는 첫눈처럼 아주 살짝 뿌리기도 한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불현듯 떠오른 생각, 바게트에 장떡의 기억을 입혀 보면 어떨까. 올리브 기름에 다진 마늘과 청양고추 잘게 썰어 넣고 참깨 곱게 빻아 뿌렸다. 고추장으로 색을 입히고 조선간장으로 향을 더한 뒤 마요네즈로 농도를 맞추었다. 바게트에 얇게 펴 발라 한입, 순간 낯선 음식에서 오래 전 여름이 불쑥 걸어 나온 듯했다.

한 조각의 빵이 그해 여름으로 데려다 놓았다. 매미 울음으로 가득했던 고향의 여름으로. 식구들의 여름을 지켜 주시던 어머니 곁으로. 음식을 먹는다는 게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것만이 아니라, 시간을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는 것처럼.

메리골드와 옹기고향 마을가는 길에서.김재근

올해도 여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고향 마을 아침, 창문을 여니 밤새 식은 공기 방 안으로 넘어온다. 대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맑은 목청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바게트에 장떡의 기억을 담은 스프레드를 바른다. 오늘의 여름과 오래된 여름이 한 식탁에 마주 앉는다.

어쩌면, 내가 그리워했던 것은 장떡이 아니라, 그 장떡을 만들어 주던 어머니의 손길이었고, 그 손길이 지켜 주었던 그 시절의 여름이었을지도. 바게트 한 조각을 베어 문다. 끝내 돌아갈 수 없는 그 여름을 천천히 오래 씹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화순매일신문에도 실립니다. 개인 블로그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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