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1소위원회에 검찰의 보완수사권 폐지를 골자로 한 형사소송법 개정안 관련 법안심사자료가 놓여 있다.
연합뉴스
검찰 보완수사권은 불허하되 보완수사 요구권은 허용할 수도 있는 방향으로 지금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어떻게든 보완수사권을 살리려는 시도 역시 만만치 않다.
요즘 들어 주요 형사사건이 터질 때마다 경찰 수사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며 '이래서 검찰 수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자주 나온다. 광주 여자고등학생 피살 사건과 관련해서는 '장윤기 측과 경찰의 유착', '경찰의 부실 수사 의혹' 등을 강조하며 보완수사권 필요성을 역설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경찰 수사를 보충하고 시정하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당연하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을 추동하는 근본 요인은 신뢰의 문제에 더 가깝다. 경찰 수사의 보완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검찰 수사를 선뜻 신뢰하지 못하는 사회적 정서가 지금 상황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동안의 검찰 수사가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데만 집중됐다면,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검찰의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 박찬길 검사다. 한국 검찰이 박찬길처럼 수사권을 행사했고 박찬길처럼 진실을 추구했다면, 검찰로부터 수사권을 박탈한 뒤 보완수사권마저 차단하려는 지금의 상황이 생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박찬길은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평안남도 남포특급시를 마주 보는 지금의 황해남도 은율군에서 태어났다. 출생한 시점은 1910년 4월이다.
<역사학연구> 2024년 제95집에 실린 임송자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의 논문 '순천지역 여순사건의 재조명과 박찬길 사건'에 따르면, 박찬길은 스물다섯 살 때인 1935년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주오대학 법학부에 들어갔다. 이곳에서는 3년 뒤 졸업했다.
이 논문은 그가 "조만식의 제자였으며 기독교도"였다고 알려준다. 일본 유학 경비도 장로교총회에서 후원했다. 그는 민족주의 성향의 기독교도였다.
그가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것은 1945년 해방 이후이고, 검사로 임용된 것은 그해 11월이다. "공주지방법원 특별검찰부 사법시보, 서울지검 검사시보를 거쳐 1947년 11월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 차석검사로 부임했다"고 논문은 말한다.
"검사로서 강직하게 일 처리"
이북 출신인 그가 남한에서 법조인 생활을 시작한 것은 '공산당'이 싫어서였다. 소련군 진주 직후에 그는 월남을 선택했다. <신학과 사회> 2023년 제37권 제3호에 실린 신학자 정병진(여수솔샘교회 목사)의 논문 '여순사건 당시 박찬길 검사 총살 사건의 진실'은 "박찬길도 더 이상 북녘에서 살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부인과 삼남매를 이끌고 내려왔다"고 말한다.
앞으로는 바뀌겠지만, 종래의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점퍼를 걸친 형사가 정장 차림의 젊은 검사 앞에서 저자세를 취하는 장면이 많이 묘사됐다. 박찬길이 검사였을 때는 분위기가 달랐다. 옷차림의 차이는 차치하고, 경찰과 검찰의 역학관계는 지금과 명확히 달랐다. 이 시기의 경찰은 검찰보다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
일본군이 물러난 직후에 이 땅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기구는 경찰이었다. 일본군이 나간 자리에 미군이 들어섰지만, 미군은 당장에 한국을 지배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한국 군대 역시 아직은 준비 중이었다. 이 간극을 메운 것이 경찰이다. 미군정도 한국 경찰에 손을 내밀었고 친일세력도 그 위에 손을 얹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검찰이 경찰 앞에서 목에 힘을 주기가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박찬길 검사는 경찰 앞에서 할 말을 다 했다. 경찰 수사가 잘못됐다면 이를 과감히 뒤엎었다. 위 임송자 논문은 "박찬길은 검사로서 강직하게 일을 처리해 나갔으며, 이 때문에 경찰과의 마찰이 심했다"라며 그가 경찰 조서도 뒤엎곤 했다고 기술한다.
"그는 사소한 상해 사건부터 큰 사건에 이르기까지 경찰 조서 내용이 의심스러우면, 자신이 조사한 것을 토대로 처리하였다. 피의자에 대한 조서 내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경우 담당 경찰을 구속하기도 했다."
경찰 수사에 대한 과감한 보완·수정은 극우와 정권이 결합된 당시의 폭력적 상황하에서는 그의 신상을 위협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소신을 유지하면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는 데 주력했다. 이와 관련해 회자되는 것이 '나무꾼 오살' 사건이다. 위 정병진 논문은 이 사건을 이렇게 요약한다.
"순천의 어느 경찰관이 산으로 도망치는 좌익 인사를 추격하다 총을 쏴 나무꾼을 오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다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 나무꾼에게 한 발을 더 쏘아 죽이고 말았다."
경찰은 이 사건을 '빨갱이를 죽인 사건'으로 정리했다. 박찬길은 이 결론에 맞섰다. 그는 사망자의 신원을 부각시키며 가해 경찰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강직한 수사의 모범을 보인 박찬길

▲숭실전문학교 졸업 앨범 속 박찬길. 현재 그의 유일한 사진이다.
유족 제공
이것이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인지는 당시의 정치상황이 잘 웅변한다. 여순항쟁(여순사건, 1948.10.19~27) 이전에 있었던 이 사건은 제주 4·3항쟁-5·10 단독 선거-7·24 이승만 취임이라는 흐름을 타고 극우세력이 막강해질 때에 발생했다. 경찰이 친일세력 및 극우세력과 합세해 '빨갱이 토벌'이란 미명 하에 항일진보세력을 마구 죽이던 때의 일이다.
이런 시기에 박찬길은 경찰의 오류를 과감히 지적하며 무분별한 용공조작에 제동을 걸었다. 거기다가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이로 인해 그는 큰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경찰에만 맞서는 게 아니라 지배세력 전체에 맞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공산당이 싫어서 남하한 그를 '빨갱이 개' 검사라며 '적구 검사'로 몰아세웠다. 그런 뒤 여순항쟁의 혼란을 틈타 경찰토벌대를 파견해 그를 체포하고 살해했다. 좌파에 협조하고 인민재판장 노릇을 했다는 거짓 혐의도 덧씌웠다. 이승만은 이 사건을 불문에 부치라고 지시했고, 처벌받은 사람 하나 없이 사건은 무마됐다.
박찬길은 경찰 수사권을 견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군정과 친일세력의 불순한 공안정국에도 맞섰다. 이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항했다. 그러다가 38세 나이로 생을 마쳤다.
그렇지만 그는 죽은 뒤에도 동료들의 응원을 받지 못했다. 박찬길의 죽음 앞에서 검찰이 침묵한 일은 사회 부조리에 대한 견제 장치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금태섭·김선수·김의겸·이정렬·최강욱의 대담집인 <권력과 검찰>은 박찬길 죽음 이후의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검찰이 그 형성 초기부터 진상규명을 어떻게 해왔는지를 보여주는 단적 사건이라고 봐요. 하다 못해 동료 검사가 무고하게 총살을 당했는데도 그 누명을 벗기지도 못했고 가해자를 처벌하지도 못했잖아요. 검찰 스스로 정의의 편에서 불의한 상황에 맞서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는데 스스로 차버린 셈이죠. 검찰이 그렇게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동안, 이승만 독재정권은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공안 사건을 우후죽순 만들어내며 나날이 승승장구했고요. 잔인한 역사의 시작입니다."
강직한 수사의 모범을 보인 박찬길은 검찰의 사표가 되고도 남을 만하다. 이런 인물이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도 모자라 동료 검사들의 외면까지 받은 것은 검찰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체의 "잔인한 역사의 시작"이었다. 이는 한국 검찰이 국민적 신뢰를 잃는 한 가지 원인이 됐다. 검찰이 박찬길 같은 검사를 어른으로 떠받들고 '검사들이 박찬길처럼 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대중적 믿음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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