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은 일본 프로야구의 정상급 불펜 투수로 활약했다. 이종범이 공격의 선봉에 서고, 한두 점 이긴 경기를 이상훈과 선동열이 마무리하는 승리공식을 따라 주니치 드래곤즈는 1999년 정규시즌 1위에 올랐다. 1999년 11월 3일 당시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 주니치 드래곤즈의 전 투수 이상훈의 모습.
연합뉴스
그의 도전을 응원하던 팬들도 고개를 저었다. 그만 만족하고 트윈스로 돌아오기를, 꼭 도전을 계속하고 싶다면 차라리 일본에서 한두 시즌 더 머물며 보다 확실한 능력을 입증한 뒤 다시 시도하는 편이 좋겠다는 것이 그를 사랑하는 이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상훈은 그 모든 만류와 조언을 뿌리친 채 끝내 태평양을 건넜고, 고생을 사서 하기 시작했다.
물론 성과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를 지켜봐 오던 보스턴 레드삭스의 유니폼을 입는 데 성공했고, 마이너리그에서의 검증을 거치는 귀찮은 과정이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2000년에는 한국 프로야구 출신 중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9경기의 적은 기회를 끝으로 방출됐고, 다시 한번 오클랜드로의 입단과 방출을 경험했다. 그 사이 그는 연습 파트너가 없어 공원 철망에 공을 던지는 외로운 도전을 이어가기도 했다.
끝내 메이저리그로 복귀하는 데 실패한 그는 2002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마무리투수로서 헌신적으로 활약하며 친정 팀 엘지 트윈스를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 문턱까지 이끌기도 했다. 그것이 결말이라면, 해외 무대 도전을 마치고 복귀해 제2의 전성기를 보낸 선수의 흔하다면 흔한 이야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는 아주 특별한 결말이 남아 있었다.
트윈스의 전성기와 암흑기를 동시에 상징하는 선수
2003년과 2004년, 트윈스는 극심한 혼돈에 빠져들었다. 사실 그것은 몇 해 전부터 시작된 표류의 결과였고, 그 무렵은 엉뚱한 곳에 이른 뒤에야 길을 잃었음을 자각한 시점이었다. 그때의 트윈스에서는 1990년대 중반을 정점으로 조금씩 내리막길을 걸어온 팀의 성적을 놓고 명확한 진단과 처방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걱정과 근심만이 팽배해 있었다.
물론 돌아보면 문제는 명확했다. 십여 년 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들이 조금씩 노쇠해지고 있었고 신진의 가세는 그 공백을 충분히 메우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경쟁 구단들은 평준화의 족쇄가 풀려버린 틈을 타서 물불 가리지 않고 전력을 증강하고 있었다. 우세한 전력을 쏟아부어 전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신바람 야구'라고 한다면, 그 전제조건은 충분한 전력의 구축이어야 했다. 하지만 IMF 경제위기의 시대에 좌초한 해태와 쌍방울의 전략자산들을 헐값에 주워 담아 몸을 불린 양대 재벌 삼성과 현대가 있었고, 그들을 물러서게 할 만큼의 바람을 일으킬 힘이 그때의 엘지에게는 없었다.
2002년 처절한 한국시리즈 혈투의 신화는 그런 상황에서 임시변통으로 이루어낸 절반의 성공이었고, 그렇게나마 버텨낸 사이에 뭔가 방향을 결정하고 자원을 투입해야 했던 마지막 기회였다. 삼성과 현대에 버금갈 만큼이라도 투자를 감행해 맞불을 놓을 것인지, 신인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일에 좀 더 힘을 쏟을 장기적 계획을 세울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노장들의 힘을 짜내 중위권을 지키며 가을 단기전에 힘을 모을 것인지.
하지만 공허한 슬로건을 내걸고 감독을 바꿔대며 뭔가 변화를 도모하는 기분을 내는, 나름 유구한 전통이 있는 방식으로 문제를 일단 덮어두는 길을 택한 엘지는 생각보다도 더 이른 시점에 이곳저곳에 뚫려대는 구멍을 마주하게 된다. 그 와중에 벌어진 사달들 중 한 가지가 '노쇠한 베테랑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섣부른 시도였고, 그 결과 유지현이 은퇴하고 김재현, 그리고 이상훈이 팀을 떠나는 일이 벌어진다. 물론 그 대안으로 FA라는 새 제도를 통해 몇몇 외부의 스타플레이어들이 영입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모두 대실패하고 팀의 문화마저 무너뜨렸다. 그렇게 '들어오는 선수는 망하고, 나가는 선수는 흥한다'는 그 팀의 속 터지는 전통이 확립되는 계기가 된다.
어쨌거나 그 와중에 2004년 신생팀 SK 와이번스로 이적한 이상훈은 한동안 그 팀의 마무리로 활약했고, 때로는 친정팀 엘지 타자들을 상대로 연속 삼진을 잡아내고 더 요란하게 포효하며 엘지 팬들의 가슴을 착잡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5년 사이에 한국과 일본과 미국, 다시 한국의 이팀 저팀을 오가며 몸과 마음이 닳아버린, 30대 중반에 이른 이상훈의 페이스가 급격히 꺾여버리고 말았다.
은퇴선언, 돈은 포기한다
개막 한 달이 조금 넘어 2군으로 보내진 그는, 얼마 뒤 은퇴를 선언했다. 아마 다시 반등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더 이상 도전을 계속할 수 없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리고 무모한 도전을 이어가는 동안 내내 주목하고 응원해 준 트윈스의 팬들 앞에서, 면목 없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방법을 찾은 끝에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다. 은퇴 결심을 밝히며 했던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을 향해 공을 던질 수 없다'는 그의 말에 그 팀의 많은 팬들이 눈시울을 적셨지만, 아마도 그의 진심은 '트윈스 팬들에게 더 이상 초라해진 모습을 보일 수 없다'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런 결심 속에서 그에게 매겨져 있던 높은 몸값은 오히려 무거운 족쇄였을 것이고, 그는 '남은 연봉은 포기하겠다'는 선언으로 그것을 풀어버렸다. 그 해 그의 연봉은 6억이었기에, 3억 안팎의 돈을 내던지는 한마디였다. 그저 마운드에 올라 잘 되든 못 되든, 2군으로 보내지면 또 그곳에서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며 그 해를 채우기만 해도 되는 일이었다. 그런다고 그를 비난할 사람도 없었고, 애초에 그 같은 거물급 노장의 연봉이란 그렇게 될 가능성까지 감안해서 약속된 돈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련 없이 다 털고 일어섰고, 유니폼을 벗은 뒤 야구장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걸어갔다.
그 뒤 그는 록그룹의 리드보컬 겸 기타리스트로, 미용실 원장으로 또 다른 삶을 살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본능에 이끌린 듯 얼마 뒤에는 야구장으로 돌아왔다. 독립구단의 코치를 거쳐 잠시 프로팀 선수들을 지도했고, 또 방송 해설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비슷한 경로를 걸어가는 다른 야구인들과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은, 그가 언젠가 감독이 되기 위한 포석을 깔고 있다거나, 혹은 다른 어떤 방식으로든 야구로 돈을 벌려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야구를 했고, 야구를 보고 이야기하며, 혹 그것을 즐기는지는 모르지만 야구와 함께 걷고 부대끼며 살아낸다.

▲음악의 세계에서도 그가 추구하는 것은 '최고'가 아니다. 그저 기타를, 록을, 음악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그저 뒤에서 연주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로커' 대신 '배커 backer'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상훈
낭만, 이상훈
손해 보지 않는 삶의 방식을 효율적이라고 말한다. 어떤 방식의 끝에 손해가 있다는 걸 모르고 사는 삶은 어리석다고 한다. 하지만 손해 볼 줄 알면서도 그 방식으로 계속 살아가는 삶이 있고, 그중에서도 특별한 어떤 경우를 우리는 '낭만'이라고 부른다. 이익이라는 뭉뚱그려진 방향 이전에 애초에 길을 나서게 했던 목표 지점을 위해, 그리고 애초에 자신이 어떤 것을 하려는 사람이었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 보통의 다른 사람들은 차마 택하지 못하는 길을 끈질기게 지켜가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말이다.
이상훈은 엘지 트윈스를 거쳐 간 최고의 선수가 아니다. 그보다 더 큰 기여를 했거나, 더 오랜 세월 동안 팀에 자신을 바친 선수들이 많지는 않더라도 굳이 따지고 비교해 보면 꽤 있다. 그래서 그가 달았던 등번호 47번은 영구결번이 아니며, 언젠가 이상훈이 엘지의 감독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없다.
하지만 엘지 팬들이 '이 팀을 사랑하는 이유'에서 이상훈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느 영구결번 선수 못지않다. 그가 효율적인 선수는 아니었지만, 낭만적인 선수였기 때문이다. 더 높은 실적과 더 많은 연봉, 더 많은 팀의 우승을 그는 이룰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선수였다.
하지만 그런 어리석어 보이는 방식을 통해 그는 처음 야구공을 쥐던 시절 자신이 꿈꾸던 선수의 모습을 지켰고, 줄무늬 유니폼이 상징해야 할 당당함을 지켰다. 혹은, 최소한 지키려고는 했다. 많은 우승의 기억은 더 많은 꼴찌의 기억으로 퇴색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상훈이 기록과 연봉을 포기해 가며 직진했던 길의 기억은, 앞으로 그 팀의 기록이 어떻게 되고 선수들의 몸값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그를 지켜보았던 이들의 가슴 속에 남게 됐다.
모두가 돈벌이에 정신이 팔려있다.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내고, 또 그곳에서 벌어질 일들을 계획하고 걱정하고 그로부터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해 기뻐하고 좌절한다. 그러나 애초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품었던 꿈을 향해 걸어보기 위해, 그리고 자신과 가족의 먹고 자고 깨어 마주치며 보내는 시간들을 지키고 가꾸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렇게 나른하게 물러서 있기엔 너무 빠르게 달리는 세상의 속도에 겁을 집어먹고 엉거주춤 끼어 달리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낭만을 일깨우는 한 스타플레이어의 의미는 작지 않다. 이젠 잊을 만도 하다 싶은데도, 생각보다 그가 잘 잊히지 않는 이유다.
▲이상훈이 아마추어 야구선수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사단법인의 이름은 '낭만 47'이다.
이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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