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7.11 15:24최종 업데이트 26.07.1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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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킬번 <가난한 친척> 1877년퍼블릭 도메인

가족 내에서 낯선 시선이 오가는 모습을 접할 기회가 적지 않다. 가족의 일상을 즐겨 그린 영국 화가 조지 킬번(1839~1924)의 <가난한 친척>에서 풍기는 분위기도 그렇다. 가운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사람이 방문한 친척이다. 왼편으로는 이 집의 부인과 남편이 있다. 부인은 의자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에 손을 괸 채 말을 듣는다.

하지만 여인의 시선에는 거북함과 의심이 가득하다. 탁자에 두 팔을 짚고 있는 남편도 이 사람이 빨리 나갔으면 하는 눈치다. 어떤 상황인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나이나 관계로 봐서는 부모의 형제, 즉 나이 든 삼촌으로 보인다. 어려운 부탁을 하러 찾아온 길이다. 집안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길 바라며 방문한 듯하다. 어떻게 핑계를 대어서 거절할까를 고심하는 남편과 부인의 표정이 역력하다.

가족 내에서 왜 경계의 시선을 보내는가?

우리 현실에서도 드물지 않게 접하는 불편함이다. 그런데 불편함의 대상이 대체로 가난하거나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는 친척이기 마련이다. 분명 가까운 친척임에도 갑자기 찾아오면 반가운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왜 왔는지 의문을 품고, 어떤 부탁일지 경계한다. 마음이 날카로운 송곳처럼 서 있는 상태에서 만난다.


단지 친척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광경이 아니다. 매일 집이라는 공간 내에서 마주치며 살았던 직계 가족 관계 내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같은 부모를 둔 자식들이 독립하여 분가한 상황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상대적으로 사정이 어려운 형제자매가 찾아오면 무언가 부탁하러 왔다는 혐의를 두고 거절할 핑곗거리부터 찾는다.

심지어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의 대명사로 불리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경계심과 불편함이 나타난다. 부모가 기대하는 역할을 자식이 제대로 못 하거나, 바라는 성장 궤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갈 때 부모는 불만이 생기고 자식에게는 불신이 자라난다. 하다못해 자식의 사랑 감정을 둘러싸고도 경계와 불편함이 생긴다.

조지 킬번의 또 다른 작품 <용서>처럼 사랑이라는 순수한 감정조차 부모와 자식 사이에 더없이 뾰족한 충돌의 계기가 된다. 가족 내에서 상당한 기간에 걸쳐 벌어진, 깊이 팬 감정의 골이 캔버스 안에 고스란히 담긴 느낌이다.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다리에 매달리며 용서를 구하는 중이다. 식탁 저편으로는 어머니와 자매로 보이는 여인이 어쩔 줄 몰라하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중이다.

주변을 보면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간다. 먼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여인의 뒤로 작은 보따리가 눈에 들어온다. 집에서 한동안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럴듯한 가방이 아니라 대충 옷가지를 싸 들고 온 보자기다. 복장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버지의 복장이나 집의 규모를 보면 귀족 집안이다. 그런데 용서를 비는 여인의 복장은 이에 비교해 초라한 편이다. 화려한 장식이란 찾아볼 수 없고 상당히 낡은 느낌이다.

조지 킬번 <용서> 1888년퍼블릭 도메인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결혼을 하고 결국 집을 떠났던 딸로 보인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 감정 하나를 따랐으니 집에서 쫓겨났으리라. 하지만 처음의 생각과 다르게 연인이었던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제적으로 파산했던 듯하다. 게다가 여인이 두른 검은색 스카프를 고려할 때 남자가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다. 겪어보지 못한 가난을 견디다 결국 부모를 찾아와 다시 받아달라고 용서를 구하는 중일 것이다.

자식의 '사랑'과 같은 감정을 부모가 거부해 집안 가득 불편함이 감도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 그림처럼 부모가 자식과 가족으로서의 연을 끊겠다고 협박하기도 한다. 조건 없는 사랑이나 마음의 안식처와는 전혀 다른, 가족의 또 다른 얼굴이다. 특히 상속을 둘러싸고 불만이 생기면 극심한 이해관계의 충돌이 이어진다. 부부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경제적인 상황이나 성격 차이 등을 놓고 분란이 일어난다.

그런데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가족을 절대적 가치로 여긴다. 세상의 갈등을 피하고 마음의 위안을 가져다줄 유일한 탈출구로 삼는다. 의미 있는 삶, 행복한 삶이라는 말을 가정과 거의 동의어로 연결한다. 조지 킬번의 그림은 다른 생각을 자극한다. 우리에게 꽤 잘 알려진 사상가 에리히 프롬이 <건전한 사회>에서 주장한 사랑과 소외 관계는 곱씹어 생각할 만하다.

"이른바 '사랑'이란 소외라는 우상숭배 현상의 일종이다. 이러한 형태의 복종적인 관계에서 사랑과 힘과 생각 모두를 쏟는다. (…) 온갖 풍요함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투사하고, 자기 것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자기로부터 소외된다. (…) 자기가 하고 싶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지만 실은 자아와 분리된, 배후의 힘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프롬에 의하면 사랑이 우상숭배가 되는 경우가 많다. 사랑을 절대화하면서 자기 소외에 빠지기 때문이다. 사랑을 절대적인 대상으로 만들어놓고 관심을 집중하면서 독립적인 인격으로서의 자아를 잃는다. 절대화된 가족 가치에 다른 모든 가치를 종속시킨다. 풍요로운 사고와 선택이 사라지고 협소한 행위로 제한된다는 점에서 자기 소외에 빠진다.

현대 가족은 현대 사회체제의 산물

우리는 흔히 현재의 가족 형태와 관계가 인류가 처음 이 세상에 등장한 이래 지금까지 거의 똑같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 본성에 따라 나타난 결과이므로 그만큼 가족 절대화의 강력한 근거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을 일종의 우상숭배로 비판하는 경향도 있다. 독일 사상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주장한 내용이 그러하다.

그에 따르면 인류 역사 전체에서 시대에 따라 가족 관계의 성격과 가족에 대한 관념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신화시대에 가족 내에서 아내는 꽤 자유로운 편이었다. 하지만 청동기로 접어든 영웅시대에 남성의 지배력이 대폭 강화되었다. 여자의 방은 위층 또는 뒤채처럼 외딴 데 있었다. 가정 내에서 여자 노예와 경쟁해야 하는 굴욕적인 처지로 전락했다.

결혼은 대부분 아버지가 정해준 상대와의 결합 방식이었다.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일부일처제 가족 형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본부인'이라는 말이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될 만큼 일 대 일의 관계가 아닌 경우가 흔했다. 아예 법적·제도적으로 여러 명의 아내를 둘 수 있게 한 나라도 있고, 사실상의 일부다처제가 유지된 지역도 있었다.

반대로 문명시대 이전의 원시공동체에서는 제도화되지는 않았어도, 한 여자를 중심으로 한 모계 형식의 가족 형태가 많았다. 엥겔스는 우리가 현재 상식처럼 알고 있는 가족 형태로서의 일부일처제는 근대에 들어 자리 잡았다고 한다. 남편을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제는 유지하되 가정의 구성 과정을 비롯해 몇몇 변화가 나타났다.

"근대 부르주아적 결혼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가톨릭 각국에서는 종전대로 부모가 아들에게 적당한 여자를 구해준다. (...) 프로테스탄트 각국에서는 아들이 자기 계급 중에서 아내를 선택할 자유를 다소라도 지닌다. 연애가 어느 정도 결혼의 기초가 될 수 있으며, 또 체면상 프로테스탄트 경향의 위선 정신에도 맞는다. (...) 결혼은 당사자의 계급적 위치로 규정되기에 언제나 타산적이다."

일부일처 형식을 갖춘 가부장제 확립에는 상속의 필요성이 크게 작용했다. "혈통이 확실해야 할 필요성은 아이들이 후에 직계 상속인으로서 아버지의 재산을 소유해야 했기 때문이다." 상속의 자격을 아버지의 혈통이 확실한 아이로 한정할 필요에 따라 법적으로 일부일처제를 확립했다. 즉 일부일처제는 많은 재화가 한 사람의 수중에, 그것도 남자의 수중에 집중되고, 이를 직계 자식에게만 상속하려는 욕망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조지 킬번 <상속자> 1890년퍼블릭 도메인

조지 킬번의 <상속자>는 가족에서 상속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고작 열 살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아이가 가문 소유의 마구간에 들른 장면이다. 일하던 관리자들 앞에서 이 꼬마는 벌써 자신이 이 집안의 주인임을 잘 아는 태도다. 가족이란 단순히 가슴 뛰는 사랑이나 편안한 안식의 의미에 머물지 않고, 지극히 차갑고 위계적인 구조의 한 부분임을 보여준다. 상속을 통해 남자의 권력이 유지되는 장치 성격이 깔려 있음을 알려준다.

또한 근대에 접어들어 아내를 선택할 자유가 다소라도 열렸다고 한다. 근대 자본주의와 쌍을 이루고 있던 개신교의 이념, 즉 종교의 자유라는 기치가 가족 관념에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엥겔스가 '체면상 프로테스탄트 경향의 위선 정신'이라고 한 이유가 있다.

형식상으로는 자유로운 연애를 보장하는 듯하지만, 실질상으로는 재산을 중심으로 한 계급적 위치로 한정한다는 점에서 위선이다. 자신이 속한 자산가층에서 대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안에서 허용한다. 만약 누군가가 신분이나 지위를 거스르고 순수한 사랑으로서의 가족을 향해 달려간다면 <용서> 그림과 유사한 상황이 생길 가능성이 커진다.

가족의 절대화가 왜 문제인가?

가족이 해당 사회의 성격과 깊이 연동되어 있다면, 가족의 성격과 형태가 상대적이고 유동적이라는 의미가 된다. 본질상 상대적인 가족을 마치 영원히 변하지 않을 고정된 가치와 틀로 절대화하는 순간, 정작 그 안에서 가장 중요한 자신이 사라지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자기를 위해 실현한 것이 자기를 삼켜버리는 일종의 자기 소외에 갇히기에 십상이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호 톨스토이가 <참회록>에서 고백한 다음 내용도 비슷하다. 그가 결혼 직후에 가족을 절대적 가치로 삼았던 결과도 자기 소외였다고 한다. "나의 생활은 멈춰버렸다. 호흡하고, 먹고, 마시고, 잠잘 수는 있었다. (…) 그러나 거기에는 이제 진정한 의미의 생활은 없었다."

가정에만 몰두하는 동안 보편적인 가치에 관한 관심이 사라졌고, 이어서 자아도 흐릿해졌다. 물론 생명체로서의 인간인 이상 먹고 자는 단순한 생활은 이어졌다. 하지만 자기 세계관을 갖고 이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의미의 생활'은 사라졌다. 그는 성찰을 통해 다시 의미를 찾는 길로 들어선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우상화하는 순간 '배후의 힘'에 지배당하는 생활만 남는다고 한다. 누가 배후인가? 권위주의적인 통치 세력이나 사회 시스템을 이용해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세력은 사람들이 가족주의에 빠져 있기를 바란다. 오직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사고하도록 유도한다. 가족에 시야를 한정함으로써 사회적인 부정의와 부조리, 즉 현실의 억압과 빈곤에 눈을 감도록 만든다.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었던 일이다.

사회적 가치가 가족의 가치에 무조건 우선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공적인 가치만을 우선하여 개인이나 가족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전체주의나 국가주의로 흐른다. 문제는 반대 편향이다. 즉 가족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태도도 그만큼 문제다. 우리 내부에서 극복해야 할 주요 과제는 두 방향에서 동시에 온다. 하나는 전체주의적인 사고, 다른 하나는 가족 이기주의적인 사고다. 가족을 여러 가치의 하나로 상대화할 필요가 있다.

공적인 가치와의 공존이라는 관점에 설 때 가족의 진정한 의미도 실현된다. 가족의 속살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가족의 양면성을 통찰할 때 사적 가치와 공적 가치 사이, 혹은 사적이라 하더라도 다양한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가능성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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