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킬번 <상속자> 1890년
퍼블릭 도메인
조지 킬번의 <상속자>는 가족에서 상속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고작 열 살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아이가 가문 소유의 마구간에 들른 장면이다. 일하던 관리자들 앞에서 이 꼬마는 벌써 자신이 이 집안의 주인임을 잘 아는 태도다. 가족이란 단순히 가슴 뛰는 사랑이나 편안한 안식의 의미에 머물지 않고, 지극히 차갑고 위계적인 구조의 한 부분임을 보여준다. 상속을 통해 남자의 권력이 유지되는 장치 성격이 깔려 있음을 알려준다.
또한 근대에 접어들어 아내를 선택할 자유가 다소라도 열렸다고 한다. 근대 자본주의와 쌍을 이루고 있던 개신교의 이념, 즉 종교의 자유라는 기치가 가족 관념에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엥겔스가 '체면상 프로테스탄트 경향의 위선 정신'이라고 한 이유가 있다.
형식상으로는 자유로운 연애를 보장하는 듯하지만, 실질상으로는 재산을 중심으로 한 계급적 위치로 한정한다는 점에서 위선이다. 자신이 속한 자산가층에서 대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안에서 허용한다. 만약 누군가가 신분이나 지위를 거스르고 순수한 사랑으로서의 가족을 향해 달려간다면 <용서> 그림과 유사한 상황이 생길 가능성이 커진다.
가족의 절대화가 왜 문제인가?
가족이 해당 사회의 성격과 깊이 연동되어 있다면, 가족의 성격과 형태가 상대적이고 유동적이라는 의미가 된다. 본질상 상대적인 가족을 마치 영원히 변하지 않을 고정된 가치와 틀로 절대화하는 순간, 정작 그 안에서 가장 중요한 자신이 사라지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자기를 위해 실현한 것이 자기를 삼켜버리는 일종의 자기 소외에 갇히기에 십상이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호 톨스토이가 <참회록>에서 고백한 다음 내용도 비슷하다. 그가 결혼 직후에 가족을 절대적 가치로 삼았던 결과도 자기 소외였다고 한다. "나의 생활은 멈춰버렸다. 호흡하고, 먹고, 마시고, 잠잘 수는 있었다. (…) 그러나 거기에는 이제 진정한 의미의 생활은 없었다."
가정에만 몰두하는 동안 보편적인 가치에 관한 관심이 사라졌고, 이어서 자아도 흐릿해졌다. 물론 생명체로서의 인간인 이상 먹고 자는 단순한 생활은 이어졌다. 하지만 자기 세계관을 갖고 이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의미의 생활'은 사라졌다. 그는 성찰을 통해 다시 의미를 찾는 길로 들어선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우상화하는 순간 '배후의 힘'에 지배당하는 생활만 남는다고 한다. 누가 배후인가? 권위주의적인 통치 세력이나 사회 시스템을 이용해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세력은 사람들이 가족주의에 빠져 있기를 바란다. 오직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사고하도록 유도한다. 가족에 시야를 한정함으로써 사회적인 부정의와 부조리, 즉 현실의 억압과 빈곤에 눈을 감도록 만든다.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었던 일이다.
사회적 가치가 가족의 가치에 무조건 우선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공적인 가치만을 우선하여 개인이나 가족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전체주의나 국가주의로 흐른다. 문제는 반대 편향이다. 즉 가족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태도도 그만큼 문제다. 우리 내부에서 극복해야 할 주요 과제는 두 방향에서 동시에 온다. 하나는 전체주의적인 사고, 다른 하나는 가족 이기주의적인 사고다. 가족을 여러 가치의 하나로 상대화할 필요가 있다.
공적인 가치와의 공존이라는 관점에 설 때 가족의 진정한 의미도 실현된다. 가족의 속살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가족의 양면성을 통찰할 때 사적 가치와 공적 가치 사이, 혹은 사적이라 하더라도 다양한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가능성이 커진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