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tmatic촬영영화필름과 여름의 빛 펜탁스렌즈의 강한 컨트라스트가 합쳐진 여름의 필름 발색을 보여준다.
이재필
묵직한 나사산 위에 얹은 기다림의 의식
펜탁스가 만들었던 올드 렌즈들은 흔히 말하는 가성비가 훌륭하다. 시장에 풀린 수량이 워낙 많다 보니 성능과 광학적 완성도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손에 넣을 수 있다. 가끔 제조 공정에서 방사성 물질인 토륨을 희토류에 섞어 넣어 세월이 흐를수록 렌즈 알이 영롱한 호박색(Amber)으로 익어가는 '토륨 코팅' 타쿠마 렌즈 같은 녀석들은 약간의 프리미엄이 붙기도 한다. 그렇다고 지갑이 가벼운 대학생들이 엄두도 못 낼 만큼 허황된 금액은 아니다.
얼마 전 단골 카메라 수리점 구석에서 50mm f1.8 표준 타쿠마 렌즈와 135mm f4 망원 렌즈를 구할수 있었다. 그때 주인 아주머니가 렌즈 뒤에 렌즈 뚜껑 대신 '덤'으로 툭 달아주었던 것이 바로 스포매틱 바디였다. 하도 흔하게 굴러다니는 모델이라 별다른 기대 없이 집어 들고 요리조리 만지작거렸는데 아쉽게도 뷰파인더 너머 거울이 위로 딱 붙은 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투박한 기계 안에는 '인스턴트 리턴 미러(Instant Return Mirror)'라는 기술이 숨어 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내부 거울이 위로 들렸다가, 촬영이 끝나면 기계적인 스프링의 힘으로 즉시 제자리로
돌아와 작업자의 시야를 확보해 주는 방식이다. 지금이야 숨 쉬듯 당연한 메커니즘이지만 1960년대에는 카메라 산업의 지형을 바꾼 혁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50년이 넘는 모진 세월을 견디는 동안 거울을 움직여주던 내부의 윤활유가 양초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거나, 충격을 흡수해 주던 내부의 차광 스펀지가 끈적한 타르처럼 녹아내렸다는 점이었다. 결국 거울이 위에서 툭 멈춰버리는 미러 리턴 불량 개체가 유독 많아진 이유였다.
말 그대로 제 짝인 렌즈를 보호하기 위한 렌즈 캡 신세로 전락한 개체였다. 데려온 녀석의 상태를 보니 뷰파인더 오른쪽에 외롭게 매달려 있어야 할 노출계 바늘도 미동조차 없었다. 과거에 널리 쓰이던 수은 배터리가 환경 규제로 전면 단종된 지 오래이기도 하고, 빛을 받아 전기를 흐르게 하던 CdS(황화카드뮴) 센서가 수명을 다해 잠든 탓이다. 현재 판매되는 시계 배터리들은 과거와 다르게 전압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Sony A7촬영외장노출계를 적용한 스포매틱 모델 - 오랜 세월로 인해 노출계가 망가진 모델이 많지만 기계식 모델이기에 전지가 없어도 외장 노출계로 문제없이 작동한다.
이재필
그럼에도 이 카메라를 쓰레기통 대신 가방에 집어넣은 이유는, 이 기계가 전기가 없어도 사용 가능한 '풀 기계식 셔터(배터리의 힘이 아니어도 시계태엽의 텐션으로 작동되는 셔터유닛)' 바디이기 때문이다. 배터리가 방전되면 아예 작동을 멈추는 요즘 디지털 기기들과 달리, 이 카메라는 오직 정밀하게 맞물린 태엽과 톱니바퀴의 탄성으로만 작동한다.
내부 노출계를 켜는 아주 작은 전등 스위치 역할 외에는 배터리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기계식 카메라가 지닌 든든한 아날로그의 힘을 믿고, 스마트폰 화면 위에 얹어 쓰는 손가락 크기만 한
미니 외장 노출계 하나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해 질 녘 동네 산책길을 나섰다.
늦은 오후의 그림자가 거치 거쳐 간 풍경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느지막한 오후 시간이었다. 세상의 모든 실루엣이 옆으로 길게 늘어지며, 평범한 골목길조차 극적인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바꾸어놓는 시간대이다. 가방에서 스포매틱을 꺼내 들고 렌즈의 나사산을 끝까지 돌려 맞춘 뒤 셔터 장전 레버를 당겼다. 엄지손가락 끝에 전해지는 쨍한 느낌의 셔터에서 저항감이 느껴지며 손목을 타고 찌릿하게 올라왔다.

▲spotmatic촬영여름 한낮의 길어진 그림자의 형태가 여름이 가까이 다가왔을 느낄수 밖에 없다.
이재필
펜탁스의 오랜 자랑거리 중 하나는 SMC(Super Multi Coated)로 대변되는 다층막 코팅 기술이다.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셔터를 누를 때 렌즈 내부의 경동 안에서 빛이 마구 반사되어 뿌연 고스트 현상이나 둥근 빛망울이 맺히는 '플레어'를 아주 영리하게 억제해 주기로 유명한 독보적인 기술이다.
얇은 화학 막을 여러 겹 입혀 빛이 반사되어 튕겨 나가지 않고 고스란히 필름의 에멀션 층(빛으로 화학반응이 일어나 상이 맺히는 층)까지 도달하도록 길을 열어준다. 완벽하게 태양을 마주 보는 강렬한 역광은 아니었지만, 유통기한이 살짝 지난 영화용 필름(Vision3 250D)을 밀어 넣고 찍은 결과물들은 현상소 스캐너에서 아웃풋이 나오는 순간 입을 벌리게 만들었다.

▲spotmatic촬영플랫한 피사체이지만 벽의 질감과 어두운 부분의 색상도 차분하게 표현되는 걸 알 수 있다.
이재필
매끈하고 선명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건조한 요즘 디지털 사진과는 피부로 느껴지는 결 자체가 달랐다. 2000년대 초반, 특유의 불완전하면서도 진득한 색감으로 수많은 골수팬을 양산했던 초기 디지털카메라의 CCD(빛을 전하로 변환시켜 이미지를 얻어내는) 센서처럼, 공간의 밀도가 아주 촘촘하고 진하게 표현되었다.
내심 렌즈 알이 조금 더 크고 밝은 50mm f1.4 토륨 코팅 렌즈였다면 광학적인 왜곡과 호박색 변색이 만들어내는 따스한 빈티지 톤이 더 도드라졌을 거라는 아쉬움이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손에 쥔 소박한 50mm f1.8 타쿠마 렌즈 하나만으로도 내가 서 있던 골목길의 공기를 담아내기에는
차고 넘쳤다.
오늘날 필름과 디지털의 경계를 막론하고, 이렇게 착한 비용으로 자신만의 고집스러운 개성을 보여주는 브랜드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낡은 뷰파인더로 들여다본 찬란한 세상
노을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파란 하늘, 그리고 그 하늘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붉은 벽돌 교회의 첨탑. 아래로 길게 드리워진 짙은 회색의 그림자까지, 인화된 결과물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보니 오래된 카메라 커뮤니티에서 마니아들이 나누던 유난스러운 상투적인 찬사들이 비로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태양을 마주하고 셔터를 눌러도 플레어를 억제해 준다."
"라이카의 렌즈가 공기를 담는다면, 펜탁스의 타쿠마는 붉은색상과 공기의 질감까지 담아준다."
조금은 낭만에 취한 이들의 과장 섞인 가십처럼 들렸던 문장들이, 약품 냄새 풍기는 필름의 은염 입자 위에서 고스란히 증명되고 있었던 셈이다.
▲spotmatic촬영펜탁스의 자랑인 SMC(Super Multi Coating) 코팅은 하늘에 색상이나 빨간색등의 채도를 선명하게 표현해준다. 그래서 펜탁스 카메라 사용자들은 붉은색 피사체를 찍는 버릇이 있다.
이재필
필름 카메라라는 낯선 취미를 시작하는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거쳐 가거나 장바구니에 담아두게 되는 브랜드가 펜탁스이다. 요즘 나오는 세련된 미러리스 카메라들에 비하면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무겁고,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사진 한 장을 겨우 얻을 수 있는 불편한 쇳덩어리일 뿐이다.
하지만 백 퍼센트 순수한 역학적인 장치들이 맞물려 돌아갈 때 발생하는 신뢰감, 그리고 손끝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타격감은 주머니는 가볍지만 세상의 찰나를 나만의 시선으로 포착하고 싶어 하는 청춘들에게 주는 아날로그의 귀한 선물임이 틀림없다.
눈을 피로하게 만드는 액정 화면에서 잠시 벗어나, 수십 년 전 이름 모를 기술자가 정밀하게 깎아 만든 유리 알과 태엽의 힘에 기대어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 그것은 단순히 사진을 찍는 행위를 넘어, 매 순간 빠르게 흘러가 버리는 시간의 덜미를 묵직하게 붙잡아두는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장롱 속 깊은 곳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는 스포매틱이 있다면, 지금 당장 꺼내어 나사 모양의 렌즈를 조여 매고 밖으로 걸어 나가 볼 일이다. 찰칵하는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우리가 잊고 살았던 계절의 진짜 색깔이 눈앞에 펼쳐질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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