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마음이 담긴 개성주악.
차유진
혜정 쌤과의 인연은 9년 전 드라마 <돈꽃>에서 시작됐다. 분장팀장과 배우로 만나 반년 동안 함께 호흡하며 진한 추억을 쌓았다. 연일 밤샘 촬영이 이어져 현장에서 웃음이 사라질 때에도 쌤은 늘 밝은 목소리로 배우와 스태프들을 먼저 챙겼다.
엄마가 폐수술을 받고 입원해 계시던 때, 병간호로 정신없던 내게 병원 근처까지 찾아와 립스틱을 선물하며 "힘내"라고 말해준 것도 그녀였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혜정 쌤을 존경해 왔다. 그토록 따뜻했던 쌤에게도 시린 겨울은 찾아왔다. 급격히 위축된 방송 제작 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손을 놓아야 했다.
방송국에서 30년 가까이 한길만 걸어온 뒤 프리랜서로 나선 쌤 역시 그 현실을 비켜 갈 수 없었다. 결국 3년 가까이 본업을 내려놓아야 했고, 생계를 위해 다시 간호조무사 자격을 취득해 새로운 일터로 향해야 했다. 그러니 쌤의 복귀 소식은 단순히 작품 하나를 시작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긴 겨울 끝에 마침내 되찾은 봄이다.
쌤을 만나자마자 짧은 포옹으로 반가움을 나눈 뒤 곧장 순두부찌개집으로 향했다. 긴 토크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먼저 배부터 든든히 채웠다. 식사를 마친 뒤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차에 쌤은 자신이 아는 카페가 있다며 내 손을 이끌었다.
카페 문을 여는 순간 커피 향보다 쌍화차의 은은한 향이 먼저 반겼다. 진열장에는 갓 윤을 낸 듯 반질반질한 개성주악이 정갈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잠시 후 친분이 있다는 여사장님이 쌤과 반갑게 근황을 나누며 저마다 다르게 고명을 얹은 개성주악을 정성껏 내어주었다.
사장님이 자리를 뜨자, 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방송 일을 못 하고 힘든 시기를 보냈었잖아. 간호조무사 학원 다니면서 밤에는 아르바이트도 했거든. 그런데 어느 날부터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문고리에 예쁜 개성주악이 걸려 있는 거야."
같은 교회를 다녔던 카페 여사장님이었다. 개업 초창기라 연습하다 남은 것, 팔고 남은 것이라며 부담 갖지 말라고 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남은 주악이 아니었다. 밤 늦게 지친 몸으로 돌아올 그녀를 떠올리며 "뭐라도 드시고 힘내세요"라는 마음을 문고리에 걸어둔 것이었다. 그 다정함은 하루도, 한 달도 아닌 1년 동안 이어졌다.
한 직장에서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쉰을 넘어 낯선 세상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 막막함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하루를 겨우 버티고 돌아와 문고리에 걸린 작은 주악을 마주할 때마다, 누군가 자신의 고단함을 알아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헤어질 무렵, 쌤은 "어머니도 드시라고 그래" 하며 개성주악을 한아름 포장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서 받았던 다정함을, 이번에는 또 다른 사람에게 건네고 있었다. 문득 깨달았다. 다정함은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을. 혼자 품고 있기에는 너무 뜨거워, 결국 또 다른 사람에게 닿게 된다는 것을.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을 전하는 일
내가 받은 이 마음을 나는 누구에게 전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언니였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길어지면서 언니는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잃어버렸다. 몇 달 전 언니는 내 차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다.
"나도 새 운동화 신고 싶어. 머리도 예쁘게 자르고 싶어."
오래도록 자신보다 가족을 먼저 챙기며 살아온 언니가,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울던 순간이었다. 고단한 삶의 무게를 가까스로 견뎌 온 마음의 둑이 끝내 무너지듯 쏟아내던 그날의 울음이 아직도 내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언니 곁에 머물기로 했다. 문고리에 말없이 개성주악을 걸어두었던 카페 사장님처럼, 일주일에 세 번 성당에 가서 언니를 위해 초를 켠다. 미사를 봉헌하고, 타오르는 촛불 영상을 응원의 글과 함께 보낸다.
내 기도가 단 하루라도 언니에게 살아갈 힘이 된다면. 잠시라도 숨을 고를 틈이 된다면. 내 정성이 언니의 삶에 작은 등불 하나라도 밝혀 줄 수 있다면. 다행히 언니도 이전보다 한층 밝아진 답장을 보내온다.
"너의 기도가 위안이 되고 안심이 된다."
"흔들리지 않고 잘 버틸 수 있는 것도 너의 기도 덕이야."
"주말이라 기도가 안 오나 했네. 요즘은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나도 내 생각을 잘 안 하는데… 내가 참 복이 많다."
오늘도 성당 언덕에 올라 초를 켠다. 문고리에 걸렸던 작은 주악처럼, 타오르는 촛불도 같은 마음을 전한다. '당신을 혼자 두지 않겠다'는 다정함을.
▲언니를 위해 바치고 있는 촛불들과 기도.
차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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