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7.11 19:28최종 업데이트 26.07.11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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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 제1087호-교련 종합실기대회KTV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79학번 이재영은 1981년 11월 25일에 교련 수업을 받지 않았다. 당시의 학생군사교육실시령 제2조는 이 수업을 일반군사교육과정으로 지칭하고, 제9조는 이 수업을 4학기 동안 받으면 현역 복무 기간의 3개월을 감하고 2학기 받으면 45일을 감해준다고 규정했다. 교련 수업을 열심히 받도록 하기 위한 이 같은 유인 장치도 있었지만, 그는 출석하지 않았다.

1979년부터 1984년까지의 해군·공군 현역병 복무기간은 35개월이고, 해병·육군은 33개월이었다. 매주 2시간씩 4학기 동안 130시간 이내의 군사교육을 받고 복무기간 3개월을 감면받는 것은 언뜻 보면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4학기 동안 매주 시달림을 받는 학생 입장에서는 3개월 감면이 아니라 2년 연장으로 인식될 수도 있었다.


이재영이 결석한 것은 그런 계산을 했기 때문은 아니다. 수요일인 그날 연세대 학생들은 교련은 물론이고 여타 수업도 받기 힘들었다. 학생운동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 이 학교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서울의 봄'을 짓누른 데 이어 '광주의 봄'을 짓밟은 전두환 신군부의 광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해 하반기에 그들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힘을 과시하고 공포심을 확산시켰다. 하나는 사회정화 및 불량배 순화 등을 명분으로 무고한 국민들을 삼청교육대로 끌고가서 굴리고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 일이다. 또 하나는 운동권 학생들을 군대에 가두고 못살게 구는 강제징집이었다. 국방부가 펴낸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종합보고서> 제1권은 이렇게 설명한다.

"강제징집은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0. 9.부터 1984. 11.까지 학생운동에 참여한 대학생 가운데 제적·정학 및 휴학 등 특수학적변동자를 대상으로 국방부·내무부·문교부 등 정부 각 부·처에서 역할을 분담하여 병역법이 정한 소정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약식절차에 의해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 입대시킨 것을 말한다."

이 보고서는 "위원회 조사 결과, 강제징집자는 1152명"이라고 한 뒤 "서울대가 254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은 고려대 165명, 성균관대 105명, 경북대 37명, 전남대가 29명, 강원대 28명 등으로 확인되었다"고 기술한다.

신군부는 그런 식으로 학생들을 겁주고자 했으나, 상황은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는 1981년에 학생들의 저항이 격렬했던 데서도 확인된다. 이재영이 교련 수업에 불참한 11월에도 그러했다. 그달 9일에는 고려대생들이 병영 훈련장인 경기도 성남시 문무대에서 '학원 병영화 반대', '5·18 광주항쟁 진상조사' 등을 외쳤다. 이로 인해 109명이 제적되고, 학생 다수가 강제징집됐다.

강제입영 직후에는 불법체포·불법감금 등의 피해

25일에는 이재영의 학교에서 시위가 있었다. 이때 교육학과 79학번 양경희가 학생회관 3층 외벽에 매달려 경찰과 대치하다가 추락했다. 학생들은 분노했고 캠퍼스는 전쟁터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교련 수업에 참여하는 것은 인정상으로 볼 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날 사건으로 인해 연세대에서는 200여 명이 연행되고 그 일부가 강제입영됐다. 이재영의 언론 인터뷰에 따르면, 그의 경우에는 교련 불출석을 이유로 F학점을 받은 뒤 강제입영 조치를 받았다. 입영된 것은 1982년 3월 25일이다.

신군부의 강제징집은 국방의 의무를 다할 기회를 학생들에게 부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행복추구권,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학문의 자유 같은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하는 국가폭력이었다. 그런데 이재영은 이런 국가폭력을 연달아 당했다. 강제입영 직후에는 국군보안사령부에 의한 불법체포·불법감금 등의 피해를 입었다.

그해 3월 18일, 5·18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부산 미국문화원 공격 사건(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부산 출신인 그는 이 무렵 부산에서 입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부산 인근인 창원의 제39사단 신병훈련소에 입대했다. 이것이 또 다른 국가폭력을 당하는 계기가 됐다.

훈련소 입소 나흘 뒤인 3월 29일, 그는 보안사 부대인 501보안대로 끌려갔다. 이곳은 그를 미국문화원에 불을 지른 주역으로 몰아갔다. 강제징집을 당한 학생이 때마침 부산 지역에 있었다는 것 등이 이 엉터리 수사의 명분이 됐다.

문화원 공격의 핵심 주역은 고신대 신학생인 문부식이다. 문부식이 얼른 잡히지 않자, 보안사 요원들은 이재영을 주역으로 몰고 갔다. 이를 위해 고문을 가하고, 원하는 진술을 유도했다.

이틀 뒤인 4월 1일, 문부식이 자수했다. 배후조종 혐의를 받은 김현장은 다음날 체포됐다. 이제 이 수사에서 이재영을 억지로 끼워넣을 필요는 없게 됐다. 하지만 보안사는 그를 계속 붙들었다. 그러면서 한층 더 강도 높은 고문을 가했다.

보안사는 이재영을 엮을 전혀 새로운 구실을 찾아냈다. 그것은 반국가단체 찬양·고무와 이적표현물 소지였다. 술 마실 때 사회주의에 관한 발언을 했다는 지인의 진술을 받아낸 뒤 이를 근거로 국가보안법 제7조를 적용했다. 교련 결석과도 무관하고, 문화원 사건과도 무관한 완전히 새로운 조작사건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로써, 한 사람이 3건의 국가폭력을 연이어 당하게 됐다.

징역형 선고... 시련은 석방 뒤에도

지금의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情)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론을 선전·선동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이 규정은 제5항의 이적표현물소지죄와도 연결된다.

1980년 12월 31일부터 1988년 2월 24일(전두환 임기 마지막날)까지 시행된 같은 법 제7조 제1항은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자는 7년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이 역시 이적표현물소지죄와 연결됐다.

지금의 제7조 제1항은 어떠어떠한 사정을 알면서 행위를 했어야 처벌한다는 문구라도 있지만, 1981년에는 그나마 그것도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국가보안법 제7조의 찬양·고무죄나 이적표현물소지죄 등을 적용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재판에 넘겨진 이재영은 징역 10개월에 자격정지 10개월을 선고받았다. 교련 불출석을 계기로 일어난 연이은 불행이 징역형 선고로 귀결됐던 것이다.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시련은 석방 뒤에도 있었다. 학교는 그의 복학을 거부했다. 사회생활도 험난했다. 어렵게 구한 버스회사나 공장 같은 데에 걸핏하면 형사가 찾아왔다. 이 때문에 거듭거듭 해고됐다. 부산 북구 세화상사 근무 때는 노조 활동을 이유로 쫓겨났다.

노무현 변호사가 처음 맡은 노동사건 ‘세화상사’의 해고자였던 이재영씨가 해고자들과 함께하던 노 변호사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그런데 세화상사에서 쫓겨난 일은 귀인을 만나는 계기가 됐다. 노무현사료관 홈페이지에 '이재영(초선 의원 시절 비서) 1차 구술'이라는 문서가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부산상고 후배로 학창 시절 동문 선배 자격으로 특강을 온 노무현 변호사를 본 적이 있다"라며 "1985년 3월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맡은 최초의 노동사건인 세화상사 노조 해고자로 다시 만났다"라고 구술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노무현의) 정치 입문 이후 출마 때마다 선거운동을 도왔다. 초선 의원 시절에는 노동문제 담당 비서로 상임위 활동을 보좌했으며 제16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회분과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1981년부터 겪은 국가폭력들로 인한 피해는 세월이 흘러 2081년이 된다 해도 씻기지 않을 악몽이다. 그 피해가 노무현과의 만남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그가 입은 상처는 쉽게 씻길 만한 것이 아니다. 2020년 1월 16일, 재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은 징역 10월을 선고한 그 판결을 취소했다. 검찰도 무죄를 구형했다. 그렇지만, 38년간 누적된 한을 씻어주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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