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7.05 19:09최종 업데이트 26.07.05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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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한국 침략은 '성적' 폭력의 측면도 띠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같은 속(俗)의 세계뿐 아니라, 불교·유교·기독교·천주교 같은 성(聖)의 영역에도 일제의 폭력이 가해졌다.

일제가 한국 지배를 목적으로 전쟁을 치른 대상은 청나라(1894) 및 러시아(1904)와 동학군이다.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와는 한일 군사협력(1904)을 하는 척하다가 외교권을 강탈(1905)했을 뿐,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학군과는 전쟁을 했다. 1894년 하반기에 일제가 상대한 동학군은 약 20만의 대군이었다. 일제는 가장 대중적인 한국 종교를 군사적으로 꺾은 뒤에 한국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런 일제의 지배하에서 여타의 종교들도 수난을 겪었다. 독립운동가인 역사학자 박은식은 1920년에 펴낸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일본인들은 우리 민족에 대하여 우리 역사를 없애는 데 그치지 않고 언어·서적·예의·문화·윤리·풍속 모두를 모조리 없애려 하였다"라며 "각 종교에 대해서는 더욱 힘을 쏟았다"고 지적했다.

일제 지배 10년 만인 1920년에도 그랬으니, 일제강점기 막판에는 탄압이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일왕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뿐 아니라 한일 교단의 통합을 강제하는 일까지 있었다.

일례로, 예수교장로회의 경우에는 친일목사 김응순의 주도하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해산하고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규칙을 채택하여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응순 편)되는 일이 있었다.

한국의 종교들이 탄압도 받고 친일도 하던 일제 막판에 스스로를 비교적 잘 지켜낸 종교가 있다. 추호의 거리낌도 없을 정도로 친일 행위를 배격한 것은 아니지만, 선을 넘는 수준의 친일 행위로부터 교단과 교인들을 지켜낸 종교가 있다. 불법연구회로 불리다가 해방 직후에 지금의 명칭을 갖게 된 원불교가 그런 발자취를 남겼다.

1943년에 불교시보사가 발행한 <불법연구회 요람>에 근거한 양현수 원광대 명예교수의 2016년 7월 29일 자 <원불교신문> 기고문은 "당시의 교세는 교당 25개소, 교도 9137명, 신도 2만 명"이었다고 설명한다. 정식 입교한 교도와 그렇지 않은 신도를 합하면 대략 3만 명이 1943년경의 원불교 교인이었다는 설명이다.

그 정도의 교세를 가진 종교가 친일 과오를 크게 범하지 않은 것은 대단한 일이다. 1943년부터 교단을 이끈 2대 종법사 송규(속명 송도군)는 그런 면에서도 집중 조명이 필요한 인물이다.

박중빈과 함께 경전 편찬에 중추적 역할

정산 송규 종사
정산 송규 종사원불교 기록관리소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행한 <2018년 한국의 종교 현황>은 "원불교는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1916년 4월 28일에 궁극적 종교 체험인 대각(大覺)을 이룸으로써 창립"됐다면서 "불법(佛法)의 시대(화)·대중화·생활화를 표방했다"고 기술한다. 경북 성주 출신인 송규 역시 이 같은 진리의 시대화·대중화 등에 관심을 갖고 열여덟 살 때인 1918년에 입문했다.

원불교는 불교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불교의 종파는 아니다. 기존 불교에서는 석가모니불·아미타불·약사여래·미륵불 등이 신앙의 대상이 되지만, 원불교에서는 진리를 상징하는 일원상(○)이라는 기호가 신앙의 중심에 있다. 원불교 경전인 <정전(正典)>은 "일원(一圓)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라고 말한다. 인격화된 신보다는 일원으로 상징되는 진리 자체가 원불교 신앙의 중심에 놓인다.

불교에 비해 원불교에서는 재가신앙이 더 크게 중시된다. 때를 가림 없이, 장소를 가림 없이 수행에 전념한다는 <정전>의 "무시선 무처선(無時禪 無處禪)"이라는 문구는 속세 공간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교단 내 입지를 강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박중빈 종법사로부터 불법을 배운 송규는 재가 수행이 아닌 출가 수행의 길을 걸었다.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에 모든 것을 건 그는 광주 서쪽인 전남 영광군의 해안 갯벌을 막아 농토를 만드는 공사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는 초기의 원불교가 경제적·공동체적 기반을 구축하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박중빈과 함께 경전 편찬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교단 본부인 총부에서는 연구부장·교무부장·총무부장·교정원장 등의 임무도 수행했다. 박중빈이 열반에 든 1943년에는 제2대 종법사의 책임을 맡았다.

1943년이라는 시점은 한국인들을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일제의 압력이 극을 달릴 때였다. 이때까지 교단을 무난히 지켜낸 박중빈도 대단했지만, 새로이 교단을 이끌게 된 송규의 어깨도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원불교도 어느 정도는 과오를 범했다. 원불교출판사가 펴낸 <원불교 교사(敎史)>는 정산(鼎山)이 호인 송규가 종법사에 취임했을 당시의 사정을 이렇게 서술한다.

"정산 종법사 취임 후 당면한 첫 난관은 패전의 빛이 날로 짙어져 가는 일정 당국의 노골적인 탄압과 수탈에 대처하는 일이었다. (중략) 총부를 비롯한 각 교단의 범종이 헌납이라는 미명하에 강제 공출되고, 모든 법회는 집회계를 제출하여 임석 경관의 설교 감청을 받아야 했으며, 국방헌금과 근로동원이 가중됨은 물론, 산업부의 농작물은 강제공출되어 총부 대중의 식량이 절박해졌고, 징병·징용 훈련 등으로 남자 청년 임원들은 집단생활이 어렵게 되어 산업대라는 이름으로 각지에 분산되고 여자 청년 임원들도 정신대를 면하기 위하여 사무 요원을 제하고는 공장 혹은 병원에 분산 취업하였다."

범종 같은 성물을 지키지 못하고 법회에 대한 일제의 감시를 허용하고 국방헌금 등을 낸 것은 원불교의 과오다. 송규의 역사적 의의는 원불교가 더 이상의 친일에 빠지는 것을 막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 있다.

친일 과오를 크게 범하지 않으면서 교단 유지

정산 송규 종사
정산 송규 종사원불교 기록관리소

일제는 원불교 경전을 자국의 국가정책에 맞게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정전>과 <회규>까지 그들의 국체·국책에 맞도록 개편 시행할 것을 강요"했다고 위 책은 말한다.

경전을 바꾸는 일은 범종을 넘겨주고 국방헌금을 납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는 제국주의의 영혼이 교리 속에 침투하는 것을 허용하는 일이었다. 송규는 이에 대해 저항했다. 소극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그는 일제의 강요를 거부하는 쪽을 택했다. <원불교교사>는 송규가 "(일제의) 그 예봉을 서서히 무마하는 한편, 지방 순회를 빙자하여 부산에서 시일을 천연"했다고 기술한다.

주기철 목사처럼 목숨을 걸고 신사참배 요구에 항거하는 종교인들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종교 지도자들은 일제의 요구를 수용하고 교단 내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송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경전 내용을 바꾸라는 일제의 요구를 점차 약화시키면서, 지방 출장을 명분으로 일제 측과의 만남을 피하고 시일을 연기했다. 그는 경전을 바꾸라는 요구를 끝내 수용하지 않았다.

그런 방식으로라도 일제의 요구를 거부하고 교단의 순수성을 지켜낸 종교 지도자가 그 시기에는 많지 않았다. 이런 지도자가 밀려나지 않고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원불교 교인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교인들 대다수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현실 순응을 요구했다면 송규가 그 상황에서 종법사 지위를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전봉준처럼 교인들을 이끌고 항일 전쟁을 벌이거나 아니면 교단을 해체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런 방법을 택했다면 추호의 친일도 범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에서 송규는 교단을 유지하면서도 과도한 요구를 피해 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런 노력이 성과를 거뒀기에 원불교는 친일 과오를 크게 범하지 않으면서 교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송규는 해방 이후에는 새 시대에 적응시키는 방향으로 원불교를 이끌었다. 해외에서 귀환하는 동포들을 구호하고 한글을 보급하고 교육 사업을 확충했다. 1946년에는 유일학림을 세웠고 이는 원광대학교로 발전했다. 1947년에는 불법연구회를 원불교로 개칭했다. 열반에 든 것은 1962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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