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7.04 17:37최종 업데이트 26.07.04 17:38
  • 본문듣기
영화 속 '아이답지' 않은 아이,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 어딘가 조금은 '이상한 아이들'을 들여다봅니다.[기자말]
"방귀 냄새 나. 역겨워."
"밥을 싸오다니. 별종이다."

노란 머리의 백인 아이들 사이에서 김동현이라는 이름은 유독 눈에 띈다. 교사는 그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영어 이름을 지어올 것을 제안한다. 이어진 점심시간, 엄마가 싸준 김밥을 꺼내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린다. 낯선 음식에 아이들은 노골적인 혐오를 쏟아낸다. 결국 동현은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몰래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날 이후 동현의 별명은 '라이스 보이(rice boy)'가 된다.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1990년대에 캐나다의 한 소도시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앤소니 심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어린 시절 그는 TV나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왜 나처럼 생긴 사람이 없을까?'

어른이 된 그는 한국인 이민자의 삶을 다룬 작품을 직접 만들어 보기로 한다. 한국에서 이민 온 아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소영은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며 헌신하지만 동현의 삶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판씨네마

절 계단에 버려진 아이 소영(최승윤)은 고아원을 전전하다 성인이 되어 한 남자를 만난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지만 남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1980년대는 미혼모의 아이를 법적으로 출생신고할 수 없는 시대였다. 소영은 갓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고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캐나다에서 소영은 공장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간다. 말도 문화도 낯선 곳에서 아들 하나만 바라보며 헌신하지만 동현의 삶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학교에서 인종차별과 따돌림을 겪는 동현은 자신의 상황을 엄마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무심코 내뱉는 말과 스쳐가는 표정만으로 소영은 아들이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짐작한다.

어느 날 밤, 거울 앞에서 혼자 눈을 찢어 보던 동현은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나 이상하게 생긴 거 같아?"

그러자 소영은 동현에게 말한다. 누가 너를 놀리거나 괴롭히면 "두 유 노 태권도?" 하면서 세게 때리라고. 그럼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소영의 이런 태도에는 한국에서는 부모 없는 아이로, 캐나다에서는 동양인 싱글맘으로 살아가며 차별을 겪어야 했던 자신의 삶이 반영돼 있다. 공장에서 성추행을 하는 백인 남성에게 소영은 경고한다. 한 번만 더 내 몸에 손을 대면 죽여버리겠다고.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아이들

샌드위치와 젓갈이 뒤섞인 도시락처럼, 동현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판씨네마

하지만 소영의 말은 오히려 독이 된다. 술래잡기를 하던 아이들은 동현의 안경을 빼앗고 "라이스 보이"라고 놀리며 침을 뱉는다. 동현은 엄마가 가르쳐 준 것처럼 "두 유 노 태권도?"라고 외치며 백인 아이들에게 달려들었다가 결국 학교에서 정학 처분을 받는다. 학교를 찾아간 소영은 다른 아이들도 인종차별과 괴롭힘으로 정서적 폭력을 가했는데 왜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 동현만 처벌받아야 하느냐고 항의한다. 이것 또한 인종차별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소영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9년의 시간이 흐르고 동현은 10대 청소년 데이비드(이든 황)가 된다. 노랗게 탈색한 머리에 푸른색 렌즈를 낀 그는 이제 백인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함께 담배를 피우며 성적인 농담을 나누고, 친구 집에 모여 대마초 브라우니를 나눠 먹기도 한다.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던 꼬마 아이는 이제 엄마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하나둘 늘어난다. 집에서도 한국어보다 영어를 더 많이 쓴다.

혼자 어딘가에서 뚝 떨어진 외계인 같았던 9년 전과 달리, 동현의 반에는 또 다른 한국인 이민자가 있다. 여자 아이는 이전에 동현이 겪었던 것처럼 "코리아", "눈 찢어진 애"라는 조롱을 듣는다. 동현은 그 말이 마치 자신을 향한 것처럼 들려서 괴롭다.

겉으로 보기에 동현은 캐나다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어딘가 텅 빈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과제를 내준다. 가족의 역사를 주제로 가계도를 그리라는 것이다. 교사는 "나는 과거를 존중한다. 우리가 온 곳을 모르면 갈 곳도 모를 테니까"라는 마야 안젤루의 말을 인용하며, 이번 과제를 통해 학생들이 가족과 자신에 대해 알게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한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과제가 동현에게는 너무나 어렵다. 엄마 소영이 한 번도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준 적 없기 때문이다.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동현은 궁금하다. 영화에는 동현이 홀로 거울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샌드위치와 젓갈이 뒤섞인 도시락처럼 동현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

동현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보면서 책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가 떠올랐다. 저자인 일본인 브래디 미카코는 아일랜드인 남편과 영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중산층 영국인과 이민자가 다니는 명문 가톨릭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은 갑자기 백인 노동자 계급이 대부분인 '구 밑바닥 중학교'에 입학하겠다고 선언한다. 처음에는 몸집이 작은 동양계 아이가 인종차별이나 학교 폭력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차별의 세계는 저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인종도, 국적도, 계층도 다양한 학교에서는 이민자 아이가 다른 이민자 아이에게 혐오 발언을 하기도 하고 가난과 정치의 문제가 얽힌다. 책에는 브렉시트 이후 우경화에 대한 우려가 깊어지는 상황에서 '영국적', '유럽적'이라는 표현을 두고 논쟁하는 장면이 나온다. '구 밑바닥 중학교' 교장은 누구도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데 하나만 택하라고 강요하는 풍조가 세상을 갈수록 나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이에 공감하며 저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쓴다.

"분단이란, 여러 정체성 중 하나를 타인에게 덮어씌운 다음 그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정체성을 골라 자신에게 둘렀을 때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먹만으로 혐오를 멈출 수 없다

동현은 자신의 뿌리를 찾아 아빠의 고향인 강원도로 향한다.판씨네마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동현을 인종차별한 이들은 브래디 미카코의 말처럼 동현을 둘러싼 수많은 정체성 가운데 '한국인', '동양인'이라는 한 가지 기준만으로 그를 판단하고 위계를 나눈다. 한국인은 그저 '라이스', '눈 찢어진 애'로 납작하게 소비되고 그 사람을 둘러싼 다양한 삶의 맥락은 지워진다. 차별주의자들은 사람을 한두 가지 특징으로 환원하고 타인을 자신보다 약하고 낮은 존재로 규정하면서 우월감을 느낀다.

최근 논란이 되었던 서울 배재고 야구부의 '지역 비하 응원'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전라도 광주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야구부 학생들은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특정 지역을 혐오하고 조롱하는 문화가 어느 한 학교만의 일탈이 아니라 10대들 사이에서 마치 놀이처럼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광주제일고등학교(광주일고) 교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수도권에 있는 다른 학교와 경기할 때도 욕설이나 지역 비하성 발언이 있었다고 말했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을 들으면서, 10대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침통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이 침통함에는 내 아이 역시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포함돼 있다.

"지금도 광주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재학생들은 서울, 수도권 쪽으로 진로를 결정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그 학생들이 수도권이랑 서울에 와서 이런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고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이규연 광주일고 교장

청소년들이 스포츠 경기장에서 혐오 발언을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오랫동안 축적된 온라인 일베 문화가 있다. 일베 문화를 양지로 끌어올려 마케팅에 활용한 기업의 책임 역시 무겁다. 특정 지역을 집요하게 비하해 온 사회·정치적 문화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혐오에 빠진 학생들을 악마화하면서 더 강력한 처벌만으로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을 볼 때마다 입맛이 쓰다. 이번 사태를 특정 세대 또는 집단의 일탈로만 규정하는 순간, 혐오를 가능하게 만든 구조와 문화는 가려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만든 것은 결국 어른들이다. '요즘 아이들'을 욕하기 전에 어른의 책임을 먼저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같은 반에 있는 한국인 여자아이를 향한 인종차별을 말리던 동현은 또다시 주먹을 휘두른다. 그러나 혐오를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와 문화가 그대로인 상황에서 주먹만으로 혐오를 멈출 수 없다. 주먹질을 할 대상만 달라질 뿐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정학을 당한 동현에게 소영은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동현의 뿌리를 찾아 아빠의 고향인 강원도로 향한다. 그곳에서 동현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삼촌을 처음 만난다. 그리고 어린 시절 자신을 그토록 괴롭게 했던 쌀이 자라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다.

추수를 앞둔 황금빛 논에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고, 가족들은 한 밥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는다. 삼촌은 "이게 다 할아버지가 키운 쌀이야. 이보다 맛있는 밥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오랫동안 부끄러움의 대상이었던 쌀은 동현이라는 한 사람과 가족의 역사를 품은 존재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비로소 알게 된 동현의 얼굴은 편하고 홀가분해 보인다. 그는 이제야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 사람인지 깨달은 것 같다. 자기혐오에서 벗어난 동현은 노랗게 염색했던 머리를 짧게 잘라낸다.

앞서 가계도 숙제를 내준 교사는 이번 과제를 통해 반 친구들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특징이나 조건이 아닌 한 사람을 둘러싼 맥락을 알게 됐을 때 우리는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다. 캐나다로 돌아간 동현은 어떤 가계도를 그려낼까. 부디 다른 친구들에게도 동현이라는 한 사람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 https://brunch.co.kr/@hongmilmil 에도 실립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