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종교지도자원로회의는 2일 오전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한반도 평화공존과 상호존중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이날 선언문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전 의장인 김희중 대주교, 대한불교조계종 전 총무원장 원행스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전 총무 김영주 목사, 원불교 전 교정원장 오도철 교무, 박남수 전 천도교 교령, 김영근 전 성균관장, 이범창 전 한국민족종교협의회장이 이름을 올렸다.
뉴시스
"상대를 존중하는 언어는 결코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평화를 향한 성숙한 자신감의 표현이며, 대결과 증오를 넘어 대화와 신뢰의 길을 여는 작은 시작입니다."
2일 한국종교지도자원로회의가 '한반도 평화공존을 위해 상대의 공식 국호를 존중해 부르자'는 선언을 발표하면서 강조한 내용입니다. 이 선언은 김희중 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원행 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김영주 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오도철 전 원불교 교정원장, 박남수 전 천도교 교령, 김영근 전 성균관장, 이범창 전 한국민족종교협의회 회장이 함께했습니다.
조선(북한)이 '남조선' 대신에 '대한민국'과 '한국'으로 부르기 시작한 지 3년이 지났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제 북한을 조선으로 부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한 지 2년여가 흘렀습니다. 이 사이에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라는 공식 국호를 사용하거나 '조선'이라는 약칭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나온 종교원로회의의 선언은 호칭 문제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차분하면서도 생산적인 논의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 사안이 남남갈등의 소재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저 역시 강조하고 싶은 역사가 있습니다.
'북괴→북한', 보수 정권이 정착시켜
한국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을 주로 '북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북한'으로 부르는 사람이 늘어났고 1988년 5월 창간한 <한겨레신문>은 창간호부터 '북한'이라고 표기했습니다.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반감도 컸습니다.
이를 수습하고 '북한'이라는 호칭을 정착시킨 당사자는 보수 정권인 노태우 정부였습니다. 1988년 '7·7선언'을 발표하면서 적대와 증오의 언어가 아니라 화해와 협력의 언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 호칭 문제가 다시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 사이에 남북 관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체제 경쟁에서 한국이 압승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1991년에 한국과 조선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면서도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통일 지향적인 특수 관계'를 명문화했다는 것입니다.
셋째가 중요합니다. 남북화해협력 정책에도 불구하고 "대북 연고권"을 기반으로 삼아 "북한 급변사태발생시" 흡수통일을 추구하는 '충무계획'과 전시에 '점령→안정화→통일 기반 조성'으로 이어지는 한미연합사령부의 작전계획과 연합훈련이 수립된 때가 바로 1990년대입니다. 이러한 계획은 정권의 변화와 관계없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조선이 이러한 흡수통일론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적대적 두 국가'를 천명한 것이 넷째에 해당합니다.
'북한'을 '멸칭'으로 간주하는 조선
우리의 의도와 관계없이 조선은 '북한'을 '멸칭'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면서 한국에도 공식 국호를 사용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럼 공식 국호 사용이 조선의 '적대적 두 국가론'을 수용하는 것일까요? 공식 국호 사용이 조선 측 요청을 수용하는 의미도 있지만, 적대성을 완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꼭 그렇게만 볼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공식 국호 사용은 상대의 실체를 인정한다는 취지를 품고 있기에 적대적 두 국가론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대가 반감을 갖는 표현을 고수할수록 적대성은 강해지고, 상대와 공감할 수 있는 표현은 불필요한 마찰과 갈등을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이라는 호칭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헌법 3조의 영토조항과 4조의 평화적 통일 추구 조항에 어긋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공식 국호 사용이 조선을 국가로 승인하면서 외국으로 간주하자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차분히 개헌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현행 헌법 하에서도 공식 국호 사용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보면, '북한'이라는 '통일 지향적인 표현'은 오히려 통일을 멀게 만듭니다. 호칭에는 '상대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태도가 담겨 있고, 평화통일에 다가서려면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한민국의 일부라는 뉘앙스가 담긴 '북한'을 고수할수록, 조선은 정권의 변화와 관계없이 한국이 추구하는 것은 흡수통일이라는 확신을 거두지 않으면서 '적대적 두 국가'를 고수하려고 할 것입니다.
'조선' 호칭이 '작은 시작'인 까닭

▲5월 22일 경기도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AWCL) 결승 기자회견에서 내고향여자축구단 리유일 감독(왼쪽)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다면 우리가 공식 국호를 사용하면 남북 관계가 달라질 수 있을까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기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예단할 수 없습니다. 또 이름을 달리 부른다고 조선의 대한국 노선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시작'은 될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5월 23일 조선 내고향 여자축구단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AWCL) 우승 기자회견 자리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내고향 선수단과 기자들 사이의 일문일답이 이어지다가 한 기자가 "북쪽, 북측 여자 축구가 과거부터 굉장히 수준이 높다"고 말하면서 분위기가 싸늘해졌습니다. 결국 선수단이 항의의 표시로 퇴장하면서 국내 대다수 언론은 내고향팀이 '적대적 두 국가' 기조를 재확인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놨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과정에서 특기할 만한 장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고향 선수단이 질문을 던진 기자에게 세 차례에 걸쳐 '국호를 바로 불러달라'고 요청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한국 기자가 '북한'이나 '북측'이라고 호칭하면서 질문했을 때 '답변하지 않겠다'고 반발했던 것과는 사뭇 달라진 태도입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국호를 바로 불러달라'고 요청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고요. 아마도 이러한 요청이 받아들여졌다면, 내고향 선수단도 답변을 이어갔을 겁니다.
지난 3월 9일 호주 시드니에선 조선과 중국의 아시아 여자축구 경기가 열렸습니다. 저를 비롯한 한국 시민들과 호주 동포들은 경기장에서 "조선 이겨라"를 목청껏 외쳤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에 조선 선수들은 우리를 향해 인사했고, 다음날엔 조선 선수단이 호주 동포를 통해 우리 응원단에 감사의 뜻도 전해왔습니다. '변화를 통한 접근'이 작지만 의미 있는 장면을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포츠를 예로 든 이유는 조선이 아무리 남북 관계의 '절연'을 시도해도 그렇게 될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위함입니다.
큰 틀에서 본다면, 남북 관계 최악의 모델은 '통일 지향적인 적대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원하는 최선의 모델은 '통일 지향적인 평화 관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미래에 다가서려면 현재의 재구성이 필수적입니다. 개헌은 장기적인 논의 과제로 담겨두더라도 조선의 국가성을 인정하는 조치를 하나둘씩 취하는 것 이외에 마땅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식 국호 사용은 작지만,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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