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유럽간첩단’사건으로 재판 받는 피고인들. 오른쪽에서 맨 끝이 박노수. 그 옆이 김규남이다.
진실위 자료사진
1929년에 전남 보성에서 출생하고 도쿄대 박사과정을 졸업한 김규남은 케임브리지대에서 극동정책을 연구하고, 덴마크국제대학에서 복지사회 및 농업정책을 공부했다. 그런 뒤 서울대·국방대학원·중앙공무원교육원 등에서 강의를 했다.
유럽과 일본을 모두 거친 그의 학력은 중앙정보부가 최초에 명명한 이 사건의 타이틀인 '유럽 및 일본을 통한 북괴 대남간첩단 사건'에 부합했다. 중앙정보부는 혁신세력의 의회 진출이라는 임무를 띠고 남한 국회에서 암약해 온 간첩으로 그를 규정했다.
중앙정보부는 김규남보다 네 살 적은 박노수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이 사건의 중심에 있다고 주장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8권 '박노수·김규남 등 유럽간첩단 사건'에 따르면, 박노수는 "일본 유학 시절에 공산주의 서적을 구입·보관하였고, 영국에 유학 중이던 1965.부터 1968.까지 동베를린을 왕래하고 평양을 방문하여 지령을 받고 잠입·탈출하고 북한 공작원과 회합, 금품을 수수"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김규남은 "박노수의 주선으로 영국으로 유학하여 1965.부터 1966.까지 동베를린을 왕래하고 평양을 방문하여 지령을 받고 잠입, 탈출하고 박노수 및 북한 공작원과 회합, 금품을 수수하고 국가기밀을 누설하여 간첩행위를"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김규남과 박노수는 자신들이 평양에 간 사실을 인정했다. 위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은 북한 공작원이 북한의 실상을 직접 확인해 보라며 강압적으로 끌고 간 일을 재판 과정에서 진술했다. 북한 측이 관광을 시켜주고 정치 행사에 참여시켰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고 이들은 항변했다.
중앙정보부는 그들이 진술한 내용 그 이상을 증명하지 못했다. 중앙정보부가 주장한 "지령을 받고 잠입", "국가기밀을 누설" 등의 부분은 가혹행위에 의한 허위자백의 결과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불법연행·불법구금·고문·가혹행위의 결과로 허위자백이 나왔다고 위 보고서에 명시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두 사람이 북한 공작원의 강요·강압하에 북한에 갔다가 풀려났다는 점뿐이다. 귀환 뒤에 신고하지 않은 부분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이들을 간첩으로 규정할 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한 수사는 상당히 야만적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체포된 피고인은 뒤늦게 붙들렸다는 점 때문에 구타를 당했다. 위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진술했다.
"연행되어 조사실로 가려고 복도를 걸어가는데 수사관들이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잡혔는데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느냐며 마구 때렸다."
이와 같이 복도에서 처음 만나자마자 폭행하는 수사관들이 있었는가 하면, 황당한 방법으로 때리는 수사관도 있었다. 조사실에 있었던 수사관은 늦게 붙든 것을 한스러워하며, 끌려온 그의 구두를 벗겨 "분풀이 하듯이 때렸다"고 한다. 수사기관이 이처럼 이성을 잃고 있었으니 제대로 된 수사가 나올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는 거물급 간첩 만드는 일에 골몰
1960년대 후반은 북한의 무장 공비 침투가 가장 활발할 때였다. 한미 연합군이 베트남전쟁에 힘을 쏟아붓는 점을 활용해 북한은 남한을 공격적으로 밀어붙였다. 유럽간첩단 사건이 발표되기 이전의 1년 동안 발생한 주요 대남 공격만 해도.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1968.11.2), 주문진 무장간첩사건(1969.3.16.), EC-121기 격추 사건(1969.4.15.)을 들 수 있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한국 정부는 유라시아 대륙을 무대로 하는 글로벌하면서도 어이없는 간첩 사건을 조작하는 데에 에너지를 소모했다. 툭하면 무력 공격을 가하는 북한을 상대로 대북 정보활동에 집중해야 중앙정보부는 3선 개헌에 부정적인 김종필과 연관된 김규남을 거물급 간첩으로 만드는 일에 골몰했다.
남북 대결이 가장 첨예했던 시기에 한국 정권과 정보기관이 북한에 집중하지 못하고 남한 국민들을 간첩으로 내모는 데 공을 들이는 모습은 남한이 남북 대결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를 보여준다. 북한을 정면으로 직시하지 못하고 한국 국민들을 북한과 엮는 일에 고심하는 모습은 남북대결에 집중하지 못했던 반공 정권의 실상을 드러낸다.
이는 과거 정권들의 반공이 대북용이기보다는 대남용이었음을 의미한다. 북한도 대남 공작을 하고 남한 정권도 대남 공작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시절이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김규남과 박노수는 그런 반공 정책의 희생양이다. 이들은 그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1972년 7월 14일 자 <동아일보>에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 관련 김규남 사형 집행'이라는 제목이 등장했고, 같은 달 29일 자 <매일경제>에 '간첩 박노수 등 2명 28일 사형 집행'이라는 제목이 나타났다.
유럽간첩단 사건이 조작됐다는 점은 재심 판결로써 확인되고 있다. 2015년 12월 29일에 대법원은 김규남·박노수 사건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된 사실을 밝혔다. 그 뒤 다른 공동피고인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도 무죄가 선고됐다. 무죄는 선고됐지만, 목숨이 되돌아오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