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고등학교의 모습.
뉴시스
스타벅스의 5·18 탱크데이 파문이 광주제일고와 배재고의 야구 경기로 번지더니, 배재학당 출신인 이승만을 상기시키는 결과로도 이어졌다. 제81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린 6월 29일 서울 목동구장에서 배재고 선수 일부가 광주제일고 더그아웃을 향해 "스타벅스 가야지"라고 외친 일을 다루는 언론 보도들에서 이승만 이야기들이 나왔다.
언론들은 이승만이 배재고의 전신인 배재학당을 나왔다는 점과, 배재고가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받들고 이승만 동상을 세우며 리박스쿨 관련 교재들을 도서관에 비치한 일 등등을 지적했다. 목동구장 일을 계기로, 이 학교 학생들의 역사인식에 영향을 미칠 만한 배경들이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관련 기사:
'리박스쿨 교재' 보유했던 배재고, 전자도서관엔 '5.18 혐오 책' https://omn.kr/2ivtu)
1895년도 입학생인 이승만(1875~1965) 외에도, 배재학당은 역사적 인물들을 다수 배출했다. 한글학자 주시경은 열여덟 살 때인 1894년에 입학했고, 독립운동가인 몽양 여운형은 같은 나이였을 때인 1904년에 입학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은 열여섯 살 때인 1904년에 들어갔다.
고종 임금이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지어준 것은 학당 설립 이듬해인 1886년이다. 이 학당에 중등 과정인 고등보통학교가 생긴 것은 1916년이다. 이로부터 3년 뒤에 열네 살 나이로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간 학생이 <벙어리 삼룡이> 등을 창작한 소설가 나도향이다. 다시 3년이 흐른 1922년에 배재고보에 들어간 학생은 스무 살인 김소월이다. 이때 김소월은 이미 시인이었다. 그해에 그는 '진달래꽃',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개여울' 등을 발표했다.
민주주의 확산에 기여한 배재학당
배재학당을 졸업한 그 같은 역사적 인물들과 비교해 볼 때, 이승만에게서 특히 더 부각되는 것이 있다. 초기에 형성된 이 학교의 주요 정체성과 대비시켜 볼 만한 것이 그의 인생행로다.
당시의 청년들이 감리교 계열의 이 미션스쿨을 찾은 일차적이고 현실적인 동기는 영어 학습이었다. <한국학논집> 2023년 제90집에 실린 오주철 계명대 겸임교수의 논문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의 교육이 한국 근현대화에 끼친 영향'은 배재학당 설립자인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의 보고서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고 알려준다.
"조선인들은 영어 교습에 대단히 열심이다. 영어를 조금만 알아도 더 나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고 여전히 여기고 있다. 조선인에게 '왜 영어를 공부하느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다'라고 답한다."
조미수호통상조약(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1882년부터 고종은 청나라·일본의 압박으로부터 국권을 지킬 목적으로 미국에 부단히 접근했다. 일본과 척을 지기 싫어하는 미국의 한결같은 외면으로 인해 결국 실패하기는 했지만, 고종의 그 같은 노력은 미국과 영어에 대한 동경심을 한국에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의 한국인들은 영어가 세계 최강 영국의 언어라서가 아니라 임금님이 좋아하는 미국의 언어라서 열심히 공부했다. 아펜젤러가 목격한 영어 열풍은 그런 의미를 띠는 것이었다.
고종은 '인재를 배양하라'는 뜻에서 배재(培材)라는 교명을 지어줬다. 아펜젤러가 생각하는 인재는 '하나님의 일꾼'이지만, 고종이 생각하는 인재는 '영어에 능한 관료'였다. 고종이 기대하는 그런 인재상(像)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이 미국 체류 시절에 메모 형태로 작성한 회고록이 훗날 <청년 이승만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알려졌다. 이 책에서 이승만은 정부가 외국어 및 서양문화 학습을 장려하는 속에서 어머니 몰래 배재학당에 입학했다고 한 뒤, "나는 배재학당에서 영어교사로 채용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영어를 배운 지 6개월 만에 자신이 교사가 됐다고 자서전에 썼다.
아펜젤러 같은 선교사들은 기독교 이념에 부합하는 인재를 배양하고자 했고, 고종 임금은 영어와 서양문화에 능한 인재를 배양하고자 했다. 이승만은 위와 같이 후자에 해당하는 인재였다. 그런데 이 학교는 또 다른 유형의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이 됐다. 이승만은 제3의 유형인 이 인재상에도 부합했다.
배재학당보다 1년 뒤에 설립된 이화학당은 여성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에 비해, 배재학당은 민주주의 교육에서 두각을 보였다. 갑신정변 실패로 인해 미국에 망명했다가 동학혁명·청일전쟁 뒤에 귀국한 서재필이 배재학당을 그런 방향으로 이끌었다.
김승태 전 독립기념관 자료과장의 <서재필: 독립협회를 창설한 개화 개혁의 선구자>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서재필에게 배재학당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별 연속강연을 부탁했다"라고 한 뒤 "서재필은 이 특강에서 국내외 정치 정세와 지리·역사·사회·문화 등 일반 지식과 세계 정세에 관한 것을 강의했다"라고 설명한다.
학교 설립자의 요청으로 이 특강을 장기간 이어간 서재필은 이 기회를 빌려 민주주의를 집중적으로 설파했다. 특강이 6개월쯤 진행된 시점에 그는 이 여세를 몰아 배재학당 학생들을 기반으로 협성회라는 역사적인 청년단체를 조직했다. 청년·학생들의 민주주의 토론장이 된 협성회는 독립협회와 긴밀한 연관을 가지면서 주시경과 이승만 같은 인물들을 지도자로 성장시켰다.
이처럼 배재학당은 서구식 민주주의이기는 하지만 민주주의를 한국에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위의 <한국학논집>은 배재학당이 한국 민주주의에 끼친 공로를 이렇게 평가한다.
"특별히 내한 선교사들의 교육이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것에 대해서는 대표적으로 서재필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배재학당에서의 협성회 조직과 그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고종은 영어에 능한 인재가 배재학당에서 배출되기를 희망했다. 이승만은 영어를 잘하는 인재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인재로도 성장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퍼트리는 인물은 고종이 원하는 인재가 아니었다. 이는 이승만이 고종 정권하에서 탄압받고 수감되는 이유가 됐다.
이승만 동상, 적절치 않아
▲배재학당이 운영하는 배재대에 있는 이승만 동상의 모습. 2018년 5월 3일, '이승만 동상철거 공동행동' 회원들이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에 죄상을 적은 종이를 붙이고 있다.
공동행동
그처럼 민주주의 전파에 앞장섰던 이승만은 나중에는 전혀 상반된 인생행로를 걸었다. 이승만은 체제 변화를 두려워하는 고종이 민주주의를 억압한 것 이상으로 민주주의를 혹독하게 탄압했다. 1948년 7월 24일에 대통령 취임식을 가진 그는 미군정이 벌여놓은 제주 4·3 학살을 이어받아 주권자들에 대한 살상을 이어갔다.
뒤이어 그해 10월에 발생한 여순항쟁(여순사건)을 빌미로 민간인 살상을 계속 유지한 그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이 비상 상황을 자신을 반대하는 '반국가세력'을 학살하는 기회로 활용했다(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 그런 뒤, 비상계엄을 통해 사실상의 내란을 일으키며 4년 만에 끝났어야 할 임기를 무려 12년간이나 이어갔다.
청년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부각된 것은 독립협회 활동과 더불어 배재학당 및 협성회 이력 때문이다. 그는 서재필의 지도하에 민주주의 토론장이 된 배재학당과 협성회를 배경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소양과 역량을 넓혔다. 그랬던 그가 민주주의를 배신하고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19세기 후반에 배재학당에서 강조된 것은 기독교 및 영어와 더불어 민주주의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강조된 민주주의 이념을 배신하고 거역했다. 그런 인물의 동상이 배재고에 세워지고 우상화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승만 같은 인물이 교내에서 추앙되면 학생들의 건전한 역사의식 형성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배재학당이 '리 스쿨'이 돼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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