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7.06 14:03최종 업데이트 26.07.06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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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의 창단식초대 김인식 감독이 구단기를 받아들고 있다. 하지만 쌍방울 레이더스의 연고지 전북 지역의 팬들은 타이거즈로부터 쉽게 마음을 떼지 못했다.쌍방울 레이더스

쌍방울 레이더스라는 야구단이 있었다. 1990년에 창단해 2000년에 해체하기까지 꼭 10년 동안, 전북 지역을 연고로 활동했던 한국프로야구의 8번째 팀이었다. 흔히 이 팀을 가리키는 말이 '꼴찌', '약체' 같은 것들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쓰인 말은 아마도 '비운'일 것이다.

물론 그 비운의 상당 부분은 모기업 '쌍방울'이 프로 야구단을 운영하던 다른 기업들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는 데서 비롯됐다. 내의를 만드는 회사로 시작해 리조트와 건설 부문으로 확장하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야구단을 창단하는 시점에 자본금 200억 원 안팎에 불과한 중견기업 수준이었다. 자본금 50억 원 이상의 독립된 야구단 법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한국야구위원회의 가입 조건을 충족하기에도 힘이 부치는 형편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못지않은 '비운'은, 애초에 연고지의 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기 어려운 배경과 연관됐다. 리그 창설 당시의 약속대로 1985년 OB 베어스가 서울로 연고지를 옮긴 뒤 남겨진 충청권을 위해 빙그레 이글스가 창단되며 야구팀 수가 7개로 늘었고, 홀수 체제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8번째 팀의 창단이 필요해졌을 때 당연하게 떠오른 후보지는 전북이었다. 강원과 제주 지역에 별도의 연고 팀 창설이 어렵고 충청권을 남북으로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나마 도 단위 중 남은 것은 전북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전북도민들의 다수는 신생팀 창단을 환영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은 전북 지역에 야구팀이 없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북도민들은 해태 타이거즈를 '광주와 전남'보다도 오히려 자신들의 팀으로 생각해 왔다.

전후 호남 야구의 출발점이 바로 1972년 군산상고의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역전 우승이라는 극적인 사건이었고, 그래서 1982년에 창단된 해태 타이거즈 선수단 대부분이 군산상고 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군산시민은 '호남 야구의 심장'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왔고, 그 심장에 뿌리 내린 해태 타이거즈를 두고 또 다른 야구팀이 '적자'를 자처하며 밀고 들어온다는 이질감을 지우지 못했다.

그래서 전북 지역 신생팀 창단 소식은 곧장 호남 지역에서 전북을 분리해 당시 절대강자였던 해태 타이거즈의 기반을 쪼개어 약화시키려는 영남 정권의 흉계가 아니냐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쌍방울 레이더스는 연고지 시민들의 사랑과 축복보다 더 짙은 의심과 반감 속에서 탄생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비운의 팀이었다.

빈약한 재정의 모기업에 의심 어린 시선을 보내는 연고지 팬들, 그리고 군산상고와 전주고를 제외하면 마땅히 선수를 배출해 줄 학교가 없는 척박한 터전. 신생아 레이더스의 여린 발로 걸어야 할 길은 그런 가시밭길이었다.

연고지 팬들의 사랑을 받지 못한 신생팀

1군 무대에서 치른 9시즌 중 4번의 꼴찌는 그런 점에서 의외의 선방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물론 첫해인 1991년과 3년 차인 1993년에 간신히 꼴찌만 벗어난 것으로 포함하면 대부분의 기간 동안 최하위권을 맴돌았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1996년과 1997년에는 정규시즌 2위와 3위에 오르며 정상에 도전했고, 전주구장과 군산구장에도 북적이는 기억을 남겼다.

창단 첫 해 입단해 팀 내에서 신인왕 경쟁을 벌였던 투수 조규제와 타자 김기태, 그리고 만 18세부터 붙박이 선발투수로 마운드를 지키며 통산 134승과 144패를 쌓게 되는 김원형은 쌍방울 레이더스의 토대가 된 선수들이었다. 그들은 손쉬운 1승의 표적으로 점찍고 달려드는 다른 팀들에게 그나마 긴장해야 하는 한순간들을 만들어냈고, 또 이따금 운이 따라주면 허를 찌르고 반전을 만들어내는 비장의 무기들이었다.

그리고 기적과도 같았던 1996년과 1997년, 완전한 무명으로 시작해 꾸준히 성장한 끝에 리그를 대표하는 포수로 자리 잡은 박경완과 구원투수로서 다승과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쓸어 담으며 1997년 MVP에 오른 김현욱 같은 이들이 힘을 보태 새로운 시대를 여는 듯했다.

그 사이 군산상고를 졸업하고 해태 타이거즈의 왕조 시대를 열었던 '김씨들'에 대한 기억이 옅은 세대들이 레이더스의 팬층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만약 한 걸음만 더 나아가 한국시리즈에 오른다면. 그리고 내친김에 우승을 이루기만 한다면. 쌍방울 레이더스는 우선 타이거즈를 대신해 군산과 전주의 적자로 인정받았을 것이고, 어쩌면 호남 야구의 쌍두마차가 되어 20여 년 전과 같은 광주와의 상승작용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돌격대의 포도대장 박경완가장 약하고 가난한 팀 레이더스에 연습생으로 입단한 박경완은 강한 어깨, 장타력, 투수 리드 능력을 차례로 인정받았고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 사이 한국 최고의 포수로 군림했다. 그는 지금도 역대 최고의 포수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가 현금 9억 원과 맞바꾸어져 현대 유니콘스로 이적한 시점으로부터 쌍방울 레이더스가 몰락하고 현대 유니콘스가 정상으로 올라섰다.쌍방울 레이더스

하지만 가장 큰 환호성이 터져 나오던 바로 그 시간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붕괴가 시작되고 있었다. 문제는 1997년 1월 24일부터 2월 2일 사이에 무주와 전주 일대에서 열렸던 동계 유니버시아드대회였다. '민간자본참여'가 유행어처럼 어지러이 쓰이던 김영삼 정권 말, 그 대회에 적극적으로 유치된 자본의 상당 부분이 하필 쌍방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대회를 위해 무주와 전주 일대에 스키장과 리조트를 짓는 사업을 맡은 쌍방울은 그 몇 해 동안 늘 그래왔듯 제2금융권에서 대부분의 자본을 조달했고, 대회가 끝난 얼마 뒤부터 금융시장에서 시작된 연쇄 붕괴가 경제 전반을 덮치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바로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라 불리는, 바로 그 사태의 시작이었다. IMF 시대 내내 스키장과 리조트가 개점휴업 상태였음은 물론이다.

성공적으로 치러내기만 하면, 그리고 그렇게 조성된 동계스포츠 붐을 바탕으로 리조트 경기가 살아난다면 그룹 전체의 위상이 격상될 거라던 달콤한 기대 속에 지켜보던 대회. 그 대회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들려온 한보철강과 그룹의 부도 소식으로 시작해 3월엔 삼미, 4월엔 진로, 또 5월부터는 삼립과 대농, 또 일일이 이름을 적을 수도 없는 수십 개의 기업집단들이 부도 기업의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자금 시장에 돈이 마르고 금리가 오르고 대출 상환 압박이 가중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그리고 특히 제2금융권에서 조달한 부채가 많던 쌍방울 그룹이 부도를 낸 것은, 레이더스가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을 치르기 하루 전인 1997년 10월 5일이었다.

가을야구 전야의, 모기업 부도 소식

결국 1승 2패로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내주며 2번째 가을야구를 마무리한 레이더스는 다음번에는 반드시 정상에 오르겠다는 각오로 겨울 훈련을 준비했다. 하지만 부도를 내고 더 이상 돈을 끌어올 수 없게 돼버린 모기업은 그 각오를 뒷받침할 능력이 없었다.

투자 이상의 성과를 낸 선수단에 훨씬 많은 보상이 이루어져야 했지만, 오히려 구단이 내놓은 '자구책'은 선수단 인건비 20% 감축으로 시작했다. 일본인 코치의 해임, 그리고 조만간 팀의 주축이 될 것으로 기대하며 육성해 온 유망주들과, 다른 팀에서 전성기를 보낸 뒤 싼값에 팔려 와 그나마 오랜 경험을 살려 이곳저곳 팀의 빈틈을 메워온 한대화, 박노준 같은 노장들의 방출이 이어졌다. 다른 팀들에게 획기적인 전력 강화의 기회로 그 해부터 허용된 외국인 선수 2명의 선발권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물론 그 정도로 끝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1997년 11월 12일, 주전 포수 박경완이 현금 9억 원을 받는 조건으로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8년 7월에는 마무리투수 조규제가 다시 6억 원에 현대로 보내졌고, 그 시즌이 마무리된 뒤에는 4번 타자 김기태와 불펜 에이스 김현욱이 삼성의 현금 20억 원과 맞바꾸어졌다.

지명한 신인 선수들은 계약금을 주지 못해 대부분 대학으로 보내야 했다. 그리고 남은 선수들로 겨울에는 비닐하우스에서 훈련하고 원정경기는 당일 아침에야 이동하며 냉난방조차 시원치 않은 숙소에서 밤을 지새우며 1999년을 보낸 레이더스는 결국 해체의 운명을 맞게 된다.

레이더스가 해체된 뒤 전북 지역의 연고권은 마찬가지로 부도를 맞은 해태를 대신해 타이거즈를 운영하게 된 기아에게 주어졌고, 레이더스에 남아 있던 선수들은 인천을 연고로 창단한 신생팀 SK 와이번스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연고지를 넘겨받은 타이거즈도, 선수들을 이어받은 와이번스도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다. 쌍방울 레이더스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지워졌고 또 잊혀졌다.

오늘날, 쌍방울 레이더스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간혹 기억하는 이들이 있더라도,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던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을 떠올리듯 이야기할 뿐이다. 혹은 조금 진지한 사람이라면, 레이더스처럼 선수를 팔아 연명하는 야구팀이 다시는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팔고 버리고 줄이면서 눈물을 삼킨 적이 있는, IMF를 기억하는 세대들에게 기업이 살기 위해 야구단을 팔고, 야구단을 살리기 위해 선수를 파는 일은 언젠가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현실이다. 그리고 그 잠재적 현실 속에서 사랑하는 무언가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기억은, 굳이 끄집어내고 싶지는 않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는 인생관 한 구석의 경계선이다.

어쨌거나 잠시라도 쌍방울 레이더스를 응원했던, 혹은 최소한 진지한 시선으로 바라본 적이 있는 이들에게 김기태, 조규제, 박경완, 김현욱이라는 이름들은 아련한 아픔이거나 혹은 슬픔 같은 감정을 일깨운다. 삶은 간혹 즐겁고 대개 무료하지만, 그 무료함이 간혹 슬픔으로 기울 때와 비슷한 느낌을, 그 이름들은 일깨운다. 그래서 그 팀과 그 선수들의 이름은 야구팬들의 기억 속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아주 작은 틈에 남아 있는 차가운 현실의 느낌이다.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지막 팬클럽쌍방울 레이더스와 함께 성장했던 전주와 군산의 청년들이 팀이 사라진 10년 뒤 야구장을 찾아 옛 우상들을 응원했다.쌍방울 레이더스 팬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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