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루에다(Rueda)의 와이너리 ‘보데가 데 알베르토(Bodega De Alberto)’에서 마리아노 데 후안(Mariano De Juan) 부장이 오크배럴의 마개를 열고 긴 도구로 와인과 리스(lees)를 저어주고 있다. 리스는 발효를 마친 효모와 미세한 침전물로, 와인과 다시 섞어주면 질감과 풍미를 더 깊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찬재
오크배럴의 발효가 더 흥미로웠던 것은, 그 안에서 와인을 그냥 가만히 두지만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마리아노 부장이 오크배럴 위의 마개를 열었다. 그는 긴 도구를 넣어 배럴 안쪽을 천천히 저어주었다. 배럴 바닥에 가라앉은 리스(lees), 곧 발효를 마친 효모와 미세한 침전물을 와인과 다시 섞어주는 과정이었다.
와인 양조에서는 이를 바토나주(bâtonnage)라고 부른다고 한다. 효모 앙금이 와인과 다시 접촉하면 질감이 부드러워지고, 향과 풍미가 깊어지며, 입안에서 느껴지는 구조감도 더 풍성해진다고 한다. 알베르토 와이너리는 이런 방식으로 와인의 맛을 더 입체적으로 만들고, 발효와 숙성의 흐름을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그 장면은 경주의 왕신 장독대를 떠올리게 했다. 왕신멸치액젓도 그냥 멸치와 소금을 장독에 넣어두고 기다리기만 하지 않는다. 장독을 열고, 멸치와 소금이 잘 섞이도록 손으로 직접 저어준다. 멸치의 살과 기름, 내장에 들어 있는 자가분해효소가 소금과 고루 만나야 비로소 발효가 깊어진다. 멸치가 스스로의 효소로 자기 몸을 천천히 풀어내고, 그 살과 기름이 장독 안에서 다시 섞이며 감칠맛의 바탕을 만든다.
알베르토의 오크배럴 안에서 효모 앙금과 와인이 다시 섞이듯, 왕신의 장독 안에서는 멸치와 소금, 살과 기름, 자가분해효소가 다시 섞인다. 와인에서는 효모의 시간이 풍미를 만들고, 액젓에서는 멸치 자신의 효소가 감칠맛을 만든다. 서로 다른 원료와 전혀 다른 문화권의 발효지만, 원리는 닮아 있었다.
좋은 발효는 그저 방치하는 시간이 아니다. 자연이 일하도록 기다리되, 사람이 손을 넣어 그 시간이 고르게 흐르도록 돕는 일이다.
장독 속 멸치를 저어주는 일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다. 멸치의 자가분해효소가 멸치 살과 기름을 스스로 녹이고, 소금과 함께 깊은 감칠맛으로 변해가도록 돕는 발효의 핵심 과정이다. 루에다의 오크배럴 앞에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발효는 기다림이지만, 좋은 발효는 그냥 기다림이 아니다. 사람의 손이 자연의 시간을 깨우고, 다시 섞고, 천천히 깊어지게 만드는 일이다.
도미니코 수도회가 이곳에 남긴 것은 단지 건물이 아니었다. 포도를 거두고, 즙을 내고, 어둠 속에서 시간을 기다리는 방식이었다. 수도원은 기도와 침묵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농업과 양조의 공간이기도 했다. 포도주는 성찬의 상징이었고, 수도원 경제를 지탱하는 생산물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유럽의 여러 수도원은 포도밭과 저장고, 양조 기술을 오랫동안 축적해왔다. 데 알베르토의 지하 동굴은 그런 수도원 양조 전통이 스페인 루에다의 땅속에 남아 있는 현장처럼 느껴졌다.
냉장 장치가 없던 시대, 인간이 와인을 지키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술은 땅속이었다. 지상에서는 계절이 바뀌고 낮과 밤의 온도가 출렁이지만, 지하 동굴은 비교적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한다. 햇빛도 적고, 바람도 직접 닿지 않는다. 그곳에서 와인은 빠르게 변하지 않는다. 천천히 나이를 먹는다.
나는 그 어둠 속에서 다시 경주의 장독대를 떠올렸다. 장독은 하늘 아래 놓이고, 데 알베르토의 저장고는 땅속에 숨어 있다. 겉으로는 정반대의 공간이다. 그러나 둘은 같은 질문을 품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미생물이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일하도록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원료가 시간과 만나 깊어지도록 도울 것인가. 발효는 인간이 자연을 완전히 지배하는 기술이 아니라, 자연이 가진 조건을 읽고 조율하는 일이다.
스테인리스 탱크, 현대 와인의 차가운 통제
지하 동굴에서 지상으로 올라오자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우리는 수도원의 돌기둥과 400년 가까운 지하의 시간 속에 있었는데, 눈앞에는 현대식 대형 스테인리스 탱크가 줄지어 서 있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금속 표면, 온도 제어 장치, 위생적으로 정리된 배관과 설비. 현대 루에다 와인을 상징하는 주역이었다.
루에다의 오늘날 화이트 와인 스타일은 이 스테인리스 탱크를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베르데호의 산뜻한 산미, 시트러스와 허브의 향, 깨끗하고 신선한 인상은 대부분 낮은 온도에서 정밀하게 관리되는 발효를 통해 살아난다. 스테인리스 탱크는 외부 산소와 오염의 영향을 최대한 줄이고, 냉각 장치를 통해 발효 온도를 일정하게 붙잡는다. 효모가 너무 뜨겁게 날뛰지 않도록 조율하고, 포도 고유의 향이 날아가거나 산화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다.
대형 스테인리스 탱크 앞에 서면 처음에는 차갑고 무표정한 공업 설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금속의 차가움 안에는 현대 와인 산업의 중요한 철학이 들어 있다. 좋은 와인을 한 번 우연히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균질화된 품질로 만들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세척이 쉽고, 온도 조절이 가능하고, 발효 상태를 숫자로 관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스테인리스는 와인을 개성 없는 액체로 만드는 도구가 아니라, 품종의 깨끗한 출발점을 확보해주는 현대적 발효 플랫폼이었다.

▲스페인 루에다(Rueda)의 와이너리 ‘보데가 데 알베르토(Bodega De Alberto)’에 줄지어 선 현대식 스테인리스 발효 탱크. 지하 동굴의 흙벽과 오크배럴이 오래된 숙성의 시간을 보여준다면, 이 차갑고 매끄러운 금속 탱크들은 현대 루에다 화이트 와인의 정밀한 발효를 상징한다.
이찬재
물론 한계도 있다. 너무 닫힌 용기는 와인을 단정하게 만들지만, 때로는 질감과 깊이를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 산소와 너무 멀어지면 향은 깨끗해도 입안의 폭이 좁아질 수 있고, 삶은 달걀과 같은 불쾌한 환원취가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루에다의 좋은 와이너리들은 스테인리스 하나만 고집하지 않는다. 스테인리스로 신선함과 품종의 순도를 지키고, 오크배럴이나 푸드르, 리스 숙성, 콘크리트 에그 같은 다른 용기와 방법으로 질감과 복합성을 더한다. 루에다는 '전통 대 현대'의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여러 용기를 조합해 베르데호의 표정을 넓혀가는 실험실에 가까웠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같은 유럽의 오래된 와인 산지들은 겉으로는 전통과 테루아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내부로 들어가 보면 고민의 중심에는 여전히 발효가 있다. 포도즙이 어떤 온도에서 발효되어야 하는가. 산소와 얼마나 만나야 하는가. 효모 앙금과 얼마나 오래 접촉해야 하는가. 어떤 용기가 향을 덜 가리고, 어떤 용기가 질감을 더하는가. 결국 와인의 혁신은 품종이나 마케팅의 혁신만이 아니다. 발효 용기의 혁신이기도 하다.
장독대도 미래 발효 산업의 기술 자산이다
루에다에서 처음 배운 것은 와인이 포도만으로 익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포도즙은 땅의 자갈에서 시작해 수도원 건축의 돌기둥과 지하의 어둠, 나무의 숨, 효모 앙금을 깨우는 손길, 철제 탱크의 차가운 통제를 지나 비로소 와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음 여정은 더 흥미로운 그릇들로 이어진다. 콘크리트 에그, 햇볕 아래 놓인 유리 다마후아나(Damajuana), 황금빛 산화 숙성 와인 도라도(Dorado), 그리고 진흙 항아리 티나하(Tinaja). 현대의 와이너리들은 왜 다시 둥근 용기와 흙의 숨결, 태양의 산화와 사람의 환대로 돌아가고 있을까.
우리는 루에다에서 와인을 마신 것이 아니라, 와인이 되어가는 조건들을 따라 걸었다. 포도즙이 와인으로 변해가는 그릇의 시간을 보았다. 포도밭의 자갈에서 시작된 길은 데 알베르토의 수도원 건축과 지하 동굴, 오크배럴, 푸드르, 리스, 스테인리스 탱크로 이어졌다. 같은 포도즙이라도 어떤 발효 용기를 만나느냐에 따라, 또 그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저어주고 기다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간을 얻는다. 용기는 중립적이지 않았다. 손길도 중립적이지 않았다. 용기와 사람의 손은 발효의 방향을 결정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었다.
그 길은 멀리 경주의 장독대와도 조용히 이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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