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29 13:31최종 업데이트 26.06.29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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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0일 오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운정회' 창립식에 참석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모습.
2013년 12월 10일 오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운정회' 창립식에 참석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모습.이희훈

국가가 고 김종필 총리의 딸에게 위자료 1억 4500만 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28일 자 보도들에 따르면,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14부는 김종필에 대한 전두환 신군부의 탄압으로 인해 1980년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장녀 김예리씨가 받은 정신적 고통에 대해 국가가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최규하 정부하의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밤중에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통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날 김종필 민주공화당 총재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에게 연행돼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대공처 수사단)에 감금됐다. 이 불법구금은 7월 2일까지 이어졌다. 서울중앙지법은 그 47일간의 강압 상태하에서 재산 헌납과 공직 사퇴 등이 강요됐다면서 고인과 유족의 정신적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년 전 '거사' 생각이 났다는 김종필

김종필은 토요일인 5월 17일 오후까지 서울 남산 공화당 당사에서 박정희 피살 이후의 정국혼란 수습책을 강구하다가 집으로 돌아가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가 붙들린 것은 밤 9시 42분에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확대선포가 의결된 뒤였다. <김종필 증언록> 제2권은 이렇게 말한다.


"밤 11시 20분, 미니버스 2대에 나눠 타고 온 군인들이 M16 소총으로 무장한 채 청구동 집에 들이닥쳤다. 군인들이 집 주위를 에워쌌고, 보안사 장모 준위가 먼저 집안으로 들어섰다."

신군부가 그에게 적용한 혐의는 권력형 부정축재다. 그래놓고도 신군부는 사법 처리를 받도록 하지 않았다. 대신, 재산 헌납과 공직 사퇴를 관철시킨 뒤에 풀어줬다.

쿠데타에 성공한 세력이 정적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거나 죄를 찾아낸 뒤 재산과 공직만 빼앗고 풀어주는 일은 지금 같으면 상상하기 힘들지만, 1980년에는 가능했다. 당시의 민도(民度)가 낮아서는 아니었다. 대중이 궐기하고 항의할 만한 여건이 5·18 광주학살 이후로 한동안 조성되지 않았다. 이번 서울중앙지법 판결은 뒤늦게나마 그때의 부조리를 바로잡는 의미가 있다.

한밤중에 연행될 당시 김종필의 눈앞에는 시각적으로 어두운 이미지가 펼쳐져 있었다. 위 증언록은 "1980년 5월 17일 심야, 내가 끌려갔을 때는 높은 담이 사방을 에워싸고 아름드리나무들이 컴컴한 밤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제공된 대우는 괜찮은 편이었다. 주어진 공간도 '한강 뷰'를 갖춘 사실상의 '특실'이었다.

"내가 안내된 방은 건물 2층의 한가운데 있었다. 7~8평 규모로 비교적 널찍한 방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서빙고 분실에서 가장 넓은 조사실이었다. 침대와 화장실, 책상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남쪽 벽에 나 있는 창밖으론 푸른 한강이 내다보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수사관들은 재산 목록부터 들이댔고, 김종필의 명의든 아니든 그와 관련이 있다고 의심되는 재산들에 대해 캐물었다. 김종필의 주치의인 서석조 박사가 세운 순천향병원을 두고도 "실제로 총재님 것이 아니냐?"고 질문했고, 호가 운정인 김종필이 설립한 운정장학재단 소유의 농장·목장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조사했다. 그가 경영하던 제주 감귤농장과 충남 서산 삼화목장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어졌다.

이런 수사의 결과물이 그해 6월 18일에 나온 계엄사의 권력형 부정축재자 수사결과 발표다. 그날 <경향신문> 톱기사는 "김종필씨·이후락씨·이세호씨·김진만씨·김종락씨·박종규씨·이병희씨·오원철씨·장동운씨 등 이른바 시대를 대표하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을 거론하면서 "이들의 부정축재 총액은 모두 8백 53억 1천 1백 54만 원"이라고 보도했다. 그런 뒤, 김종필의 축재액을 216억 4648만 원으로 전했다.

1980년 무렵에는 도시가스가 갖춰진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2층 양옥을 1억 원 이하에도 매입할 수 있었다. 그해 4월 19일 자 <경향신문> 6면은 "대지 70평에 건평 40평의 2층 양옥은 9천만~1억 원을 홋가하고, 대지 50평에 건평 30평 단층 슬라브집이 7천 5백만 원 선"이라고 보도했다.

이런 시절에 김종필이 216억 원 정도를 부정축재했다는 것이 신군부의 발표다. 신군부는 김종필을 포함한 부정축재자들이 재산을 헌납하고 공직에서 스스로 물러나게 된다고 발표했다.

<김종필 증언록>은 "보안사 분실에 끌려가면서 19년 전 거사 때 생각이 났다"고 말한다. 5·16 쿠데타의 책사인 김종필이 1961년에 구사했던 방식을 후배들이 모방한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김종필이 겪은 일은 19년 전에 그가 벌인 것과 흡사했다. 5·16 직후에도 부정축재자 재산 환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한 것과 신군부가 한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일부에서는 전두환의 5·17이 5·16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이야기한다"고 한 뒤 "신군부는 5·16의 방식과 수단을 모방했을지 몰라도, 그 정신은 배우지 못했다"고 단언했다.

5.16 쿠데타를 모방한 전두환

지난 1963년 1월 7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고 있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
지난 1963년 1월 7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고 있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연합뉴스

비상 상황하에서 집권한 세력이 재산 헌납 등을 이유로 정적을 풀어주는 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많았다. 중국의 마오쩌둥 정권과 1944년 이후의 프랑스 정권에서도 있었다. 이런 선례들이 비교적 최근에 많았던 상태에서 김종필이 5·16 때 선례를 남겼고, 전두환은 1980년에 이를 모방했다. 그 모방의 피해자가 역설적이게도 김종필이었다.

구세력 청산을 일반 사법부에 맡기다 보면, 시간이 몇 년씩 지체되다가 대중이 피로감을 느끼게 되는 일도 있다. 김종필과 전두환이 했던 방식은 그 같은 청산을 신속히 진행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에 활용됐다.

이는 구세력을 감옥에 가두지 않고도 재정적 기반을 박탈해 재기 가능성을 현저히 낮추는 방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들을 빨리 풀어주는 대신, 사법부가 선고하는 몰수나 추징보다 많은 금액을 빼앗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서교동 2층 양옥을 1억 미만에 살 수 있었던 시절이다. 이런 시절에 신군부는 기존 정권 핵심들로부터 853억 원을 환수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국민들에게 공표했다. 일반 대중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다고 보기 힘든 조치다. 권력기반 구축에 요구되는 재정적 필요에도 기인하는 일이지만, 대중적 지지의 신속한 확보를 위한 측면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은 그런 방식의 선례를 남긴 김종필을 동일한 방식의 희생자로 만들었다. 김종필이 전두환에게 당한 일에는 김종필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2024년 12·3내란이 성공했다면,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고 공언한 윤석열도 위와 같은 방식을 검토했을 가능성이 있다. 재산권을 부당하게 침해하고 정상적인 사법절차를 마비시키는 그런 방식의 재출현을 막는 데에, 이번 서울중앙지법 판결의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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