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당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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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다니가 생활을 통해 진보를 구체화한 사례라면, 다른 쪽에는 토니 블레어가 있다. 블레어는 1997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을 압승으로 이끈 전 총리다. 그는 18년 동안 이어진 보수당 집권을 끝냈고, 노동당을 세 차례 연속 총선 승리로 이끌었다. 선거정치만 놓고 보면 그는 실패한 정치인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당을 다시 집권 가능한 정당으로 만든 인물이었다.
그러나 선거 승리와 사회의 재건은 같은 일이 아니다. 블레어는 노동당을 이기게 했지만, 사회가 시장에 종속된 마거릿 대처 이후의 영국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지역 격차, 공공서비스의 취약성, 금융 중심 성장은 그 질서 안에서 계속 굳어졌다.
그가 내세운 것은 '제3의 길'이었다. 낡은 좌파도 아니고, 보수 우파도 아니라는 노선이었다.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재정 신뢰를 중시하며, 중산층 유권자에게 안심을 주는 노동당을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그 결과 노동당은 더 넓은 유권자를 얻었다. 그러나 동시에 대처주의가 바꿔놓은 영국의 기본 질서를 상당 부분 전제로 삼았다.
블레어의 영국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최저임금 도입, 공공서비스 투자, 아동빈곤 완화 같은 성과는 있었다.그러나 그것은 대처주의 이후의 영국을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되돌리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보수당은 패배했지만, 시장이 사회를 조직하는 방식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블레어는 보수당을 이겼다. 그러나 대처주의를 이겼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점에서 블레어의 길은 버넘에게 경고가 된다. 선거에서 이기는 정당을 만드는 일과 사회를 바꾸는 정당을 만드는 일은 다르다. 중도는 승리의 기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집값, 지역 격차, 공공서비스, 필수재의 시장화를 바꾸지 못한다면, 승리는 오래가지 못하는 관리의 기술에 머문다.
버넘도 같은 유혹 앞에 설 수 있다. 시장을 안심시켜야 한다는 요구, 중도층을 놓치면 안 된다는 압박, 너무 진보적으로 보이면 안 된다는 충고는 언제나 따라붙는다. 생활을 말하되 소유와 권한의 문제는 깊이 묻지 말라는 유혹도 생긴다. 바로 그 순간 생활정치는 사회를 바꾸는 언어가 아니라, 선거를 이기는 포장지가 된다.
생활은 이념의 반대말이 아니다
여기서 개념을 구분해야 한다. 민생, 실용, 생활정치는 유권자에게 다가가는 방식에 관한 말이다. 반면 진보, 중도, 보수는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바꿀 것인가에 관한 선택이다. 이 둘은 같은 층위의 말이 아니다.
실용을 말한다고 중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민생을 말한다고 이념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어떤 정치가 생활의 문제를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생활을 시장에 맡길 것인지, 공공의 책임으로 볼 것인지, 개인의 부담으로 둘 것인지에 따라 정치의 방향은 달라진다.
중도는 종종 균형처럼 들린다. 그러나 실제 정치에서 중도는 방향의 이름이 아니라 방향의 부재를 가리킬 때가 많다. 무엇을 위해 싸울지 말하지 않는 정치가 스스로를 중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좌우의 갈등을 넘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갈등이 생기는 이유를 말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생활은 이념의 반대말이 아니다. 오히려 생활은 이념이 검증되는 곳이다. 집세를 누가 정하는가, 교통비를 누가 부담하는가, 병원 대기줄을 누가 감당하는가, 보육과 돌봄을 누가 책임지는가, 에너지 요금 앞에서 누구의 삶이 먼저 흔들리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정치는 자기 색을 숨길 수 없다.
생활을 말하려면 색을 줄여야 한다는 생각은 착시다. 생활의 언어는 부드럽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언어를 끝까지 밀고 가면 공공성, 재분배, 노동, 세입자 권리, 지역 권한의 문제로 이어진다. 그 지점에서 멈추면 생활정치는 관리가 된다. 그 지점을 통과하면 생활정치는 진보의 가장 구체적인 언어가 된다.
외연을 넓히는 일과 자기 근거를 지우는 일은 다르다.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과 더 흐릿해지는 일도 같은 뜻이 아니다. 정치가 넓어지려면 언어는 쉬워져야 한다. 그러나 방향까지 흐려져서는 안 된다. 생활을 말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지우는 순간, 확장은 대중화가 아니라 자기 해체가 된다.
버넘의 시험지

▲지난 22일 영국 런던에서,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사임 일정을 발표한 직후, 새로 선출된 메이커필드 지역구 의원이자 전 그레이터 맨체스터 시장인 앤디 버넘이 국회의사당 옆 더비 게이트에 도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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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질문은 다시 버넘에게 돌아온다. 버넘은 이미 생활을 말한다. 그의 과제는 생활을 말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그 생활을 어디까지 밀고 갈 수 있느냐다. 버스와 집과 물과 에너지를 말하는 데서 멈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움직이는 소유와 권한의 문제까지 들어갈 것인가.
맘다니의 길은 집세에서 주택시장으로, 버스요금에서 공공교통으로, 에너지 요금에서 필수재의 소유와 통제로 간다. 생활의 불편을 줄이는 일과 그 불편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바꾸는 일은 다르다. 맘다니의 길은 후자에 가깝다. 이것이 생활정치형 진보의 길이다.
반대편에는 블레어의 유혹이 있다. 생활을 말하면서도 재정 신뢰, 시장 안심, 중도 확장이라는 이름으로 권력관계의 질문을 지워버리는 길이다. 처음에는 넓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위험하지 않은 정당, 관리 가능한 정당, 시장이 두려워하지 않는 정당이라는 이미지는 선거에서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승리는 오래가지 않는다. 사람들의 하루를 말하면서도 그 하루를 비싸고 불안하게 만드는 질서를 그대로 둔다면, 유권자는 결국 묻는다.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집은 살 만해졌는가. 교통은 공공의 권리로 돌아왔는가. 병원과 학교와 에너지는 시장의 부담이 아니라 사회의 책임이 되었는가.
버넘의 미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험의 기준은 분명하다. 생활을 말한다는 이유로 시장의 힘과 공공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그는 스타머와 다른 얼굴로 같은 벽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진보가 생활을 말한다고 중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활을 말하지 못할 때 진보는 자기 존재 이유를 잃는다. 진보의 과제는 생활을 피해 이념으로 도망가는 것도, 생활을 핑계로 이념을 지우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의 하루를 붙잡고, 그 하루를 흔드는 구조를 끝까지 묻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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