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27 19:18최종 업데이트 26.06.2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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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인공지능) 기반이 없는 시절에 역사·문화에 관한 탄탄한 글을 수십 년간 거의 매일 같이 발표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읽고 쓰는 데 일과의 상당 부분을 바치는 것은 기본이고, 지금 같으면 AI가 단 몇 초 만에 해주는 검색 및 자료 정리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그런 시절에 조선일보 기자 이규태(1933~2006)는 왕성한 학구열과 부단한 노력에 더해 조선일보사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한국의 역사·문화에 관한 글을 지속적으로 써냈다. 그는 이 분야에 관한 한국인들의 지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글이 대중적 호응을 얻은 것은 1980년대부터다. 그는 대표 칼럼인 '이규태 코너'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세기 후반의 조선일보 주요 필진 중 하나가 그였다. 그런데도 거의 아무런 사회적 논란도 일으키지 않고 지속적인 사랑을 받았다. 그런 점에서도 인상적인 인물이다.

한국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알린 기자

조선일보 2006년 2월 27일 <한국인에게 한국을 깨우쳐준 '천생 기자'>
조선일보 2006년 2월 27일 <한국인에게 한국을 깨우쳐준 '천생 기자'>조선일보 PDF

이규태는 서양 문화가 물밀듯 들어온 1950년대에 10대 후반과 20대를 보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서양 문화에 대해 막연한 동경심을 품던 시절에 학교를 마치고 사회로 나왔던 것이다.

그가 사회의 중견이 된 뒤인 1980년대는 한국인들이 먹고사는 문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우리의 옛것을 돌아보며 우리 것의 가치를 재평가할 여유를 갖게 된 시기다. 그 이전부터 역사·문화에 관한 글을 써온 그는 1980년대에 이르러 이 방면의 사회적인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일례로, 1980년 2월 9일의 <조선일보> 4면에 실린 그의 칼럼은 실내에서 신발을 신는 문화와 신발을 벗는 문화를 비교한다. 그는 일제 말기의 국민학교에서 실내 신발 착용의 야만성에 관해 주입받았다고 회고했다. 일본은 미국과 싸우기 위해 미국 문화를 그렇게 매도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는 해방 뒤에는 정반대 관념을 갖게 됐다. "집안에서 신발을 벗는 습관이 있는 나라가 이 세상에서 한국 이외에는 일본과 버마 정도의 극히 제한된 지역에 국한된 것을 알았을 때, 이 신발을 벗는 문화에 열등감마저도 느꼈"다고 칼럼에 썼다.

그랬던 그는 47세가 된 1980년에 쓴 위 칼럼에서는 야만이니 문화니 하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벗어나, 자연환경을 통해 두 문화를 비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두 문화의 차이를 설명하는 여러 관점을 언급하면서 그중 하나로 '물과 습도의 관점'을 소개했다.

그는 신을 신고 밭일을 하는 유럽인과 달리, 논에서 일하는 한국인은 신을 신었다 벗었다 하는 데 익숙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또 유럽의 땅은 대체로 건조해 신발이 더러워질 일이 별로 없으므로 그것을 신고 실내에 들어가도 무방하지만, 한국의 촌락은 물이 많은 곳에 조성돼 있어 땅의 습기로 인해 신이 더러워지기 쉬우므로 그것을 신고 실내에 들어가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이 칼럼에서는 대기질의 차이도 지적된다. 한국의 대기는 유럽보다 습하므로 발 건강을 위해 통풍이 잘되는 신발을 신게 되고 또 신을 자주 벗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이 통풍 걱정이 필요 없는 게다를 신는 것은 그곳 습도가 한국보다 높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규태는 이 외에도 온돌·젓가락·김치 문화 등등과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탐구하는 글들을 썼다. 100% 정답을 기대하기 힘든 분야이기는 하지만, 일상의 소재를 바탕으로 역사와 전통을 재조명하는 방법으로 그는 한국학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규태의 글에는 친일이나 식민지배에 관한 것들도 있다. 1968년 5월 12일에 쓴 <조선일보> '개화백경' 코너는 이재극이라는 친일파를 소개한다. 을사늑약 2주 전인 1905년 11월 3일, 한양 남산 주한일본공사관에서 무쓰히토 일왕(연호는 메이지)의 53회 생일연회(천장절)가 열렸다. 이때 황실 대표로 참석한 이재극 궁내부대신은 축배를 들고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삼창했다.

대한제국 황제를 위해 '만세'를 외쳐야 할 신하가 일왕을 위해 그렇게 했다는 보고를 받은 고종은 이재극을 불러 꾸짖었다. 그러나 엉뚱하고 기막힌 답변에 고종은 할 말을 잃었다. 이재극의 답변은 "신은 만세라 부르지 않고 반자이라 불렀나이다"였다. 박정희의 친일정책으로 인해 반일감정이 높던 시절에 이규태는 이런 글을 써서 친일문제를 환기시키기도 했다.

이규태가 연세대에서 전공한 것은 화학공학이다. 전공과 어울리지 않는 신문사에 들어간 그는 이번에는 신문사와 잘 어울리지 않는 분야를 파헤치고 글을 썼다. 도서관을 갖춘 학교나 연구소에서 해야 할 일을 신문사에서 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자료를 모아둘 공간 확보가 절실했다.

1만 5천 권의 책... 수작업으로 모든 자료를 정리했다

1998년 2월 28일 자 <실향 비둘기>
1998년 2월 28일 자 <실향 비둘기>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이규태 특집기사인 1998년 3월 5일 자 <조선일보> 22면에 따르면, 이 시기에 그의 도서 구입비는 월평균 200만 원이었다. 그해 1월 24일 자 <한겨레> 7면에는 이때의 짜장면값이 2500~2800원으로 보도됐다. 이런 시절에 매월 그 정도 돈을 도서 구입에 썼던 것이다.

그렇게 사 모은 1만 5천 권 이상의 서적이 아파트 서재는 물론이고, 현관에서부터 거실과 부엌과 아이들 방까지 채워졌다. 이로 인한 불편을 덜고자 1995년에 내린 결단이 빌라로 이사 가는 것이었다. 서울 서초구의 그 빌라에는 20평 남짓의 지하실이 딸려 있었다. 아파트에서 빌라로 이사 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와 달리, 그때 그의 기분은 환희에 가까웠다. 그는 "3년 전 용케 지하가 딸린 이곳 반포동의 빌라를 하나 구해 소원을 푼 셈입니다"라고 말했다.

'용케' 얻어 '소원'을 푼 빌라 지하실에는 <일성록>·<본초강목>·<비변사등록>·<한국고승집>·<황성신문>·<독립신문>·<육당전집>·<향토서울><고금도서집성>, 조선왕조실록 시리즈, 대한제국 관보, 구한말 외교관계 부속문서, 불교대장경 등이 있었다. 책들마다 손때가 묻고 밑줄이 그어지고 메모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1998년이면 컴퓨터 사용이 보편화된 때이지만, 이때도 그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자료를 정리했다. 위 특집은 이규태의 컴퓨터에 방대한 데이터가 입력돼 있을 것으로 오해하는 독자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철저히 수작업"으로 자료가 정리돼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취급한 항목들을 색인해 둔 것만 10만여 개"라고 알려준다.

이규태 집을 방문한 기자는 그가 어느 책장, 어느 책, 어느 부분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를 훤히 알고 있었다고 알려준다. 색인 정리가 안 된 분야에 관해서도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독서량이 많고 기억력이 좋았던 것이다.

신문 기사의 특성상, 그의 집필은 그날그날의 시사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위 특집은 시사와 접목된 기사를 쓸 때의 집필 방식을 이렇게 소개한다.

"지난 28일 아침 <조선일보>에 나간 '실향 비둘기'란 칼럼도 마찬가지였다. 새 대통령 취임식에서 축포와 함께 날려보낸 비둘기 중 제 집을 찾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는 뉴스에 착안, 2백자 원고지 6장 분량의 이 칼럼을 쓰기 위해 이 고문이 참고한 자료는 무려 17종. 우선 <삼국유사>나 <연려실기술>·<대동야승>·<성호사설>, 조선왕조실록 등 우리 고전들을 뒤져 비둘기에 관한 사항들을 찾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나라 문헌들은 정리가 잘 안 돼 있어, 희망하는 내용의 10% 정도나 건질 수 있으면 큰 수확이나. 다음은 중국의 <고금도서집성>이나 일본의 <고사유원> 등을 통해 동양의 비둘기에 관한 각종 기록들을 섭렵하고, 서양의 전문서들로 넘어갔다."

그는 아침 출근 전까지 위와 같이 자료를 정리해 둔 다음, 글에 인용할 서적 10여 권과 스크랩 자료 등을 가방에 넣고 회사에 가서 글을 썼다. 그런 식으로 '실향 비둘기' 칼럼도 써냈다.

이 칼럼에서 그는 고구려, 고대 그리스, 제2차 세계대전 사례를 근거로 비둘기의 귀소능력을 설명한 뒤,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동원된 1500마리 중 상당수가 남산공원·서울대공원·서울시청의 자기 집을 찾아가지 못한 일을 지적하면서 "해가 갈수록 귀소하지 못하는 실향 비둘기가 는다 하니 서울의 대기오염이 원흉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규태는 전통문화와 역사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높아지던 시절에 이 분야 지식을 신문 지면을 통해 수십 년간 대중에게 알기 쉽고 흥미진진하게 전달했다. AI가 없던 시절에 거의 매일 같이 이런 종류의 기사를 쓴 것은 그의 학구열과 성실성에 기초한다. 그는 아날로그 시대에 가장 부지런한 자세로 우리 사회의 지적 수요를 충족시킨 인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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