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누림도서관 로비거대한 마법사의 책장을 닮은 로비
이인자
입구 안내판을 보다가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영화관이 건물 꼭대기가 아닌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도서관 만큼이나 작은 영화관의 정체가 궁금했던 터라 자연스레 발길이 2층으로 향했다. 마침 보고 싶었던 영화 <와일드 씽>이 상영 중이었다. 정부 지원 '국민 영화관람 할인' 행사(오는 10월 31일까지 진행) 덕분에 리클라이너 좌석이 있는 특별관인데도 관람료는 단돈 3000원이었다. 단양 여행이 선물한 이 뜻밖의 호사를 놓칠 수는 없었다.
영화의 여운을 가다듬은 뒤 본격적인 도서관 탐색에 나섰다. 나는 새로운 도서관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외형만 보지 말 것. 누구나 보는 것만 보지 말 것. 사소하고 작은, 그래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눈여겨볼 것.
올누림도서관에서 내 시선을 가장 먼저 붙잡은 것은 책상 위에 무심히 놓인 나무 독서대였다. 시중에서 흔히 보는 기성품이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특별히 맞춤 제작한 듯했다. 독서대 위에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정성스럽게 새겨져 있었다. 개관 2주년, 웅장한 외관을 꾸미느라 미처 챙기지 못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작은 물건 하나에도 깃들어 있는 사서의 정성이 포근하게 다가왔다.
'책멍 코너'도 인상적이었다. '책멍'이 무얼까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컬러링북을 색칠하고 필사책을 채워갈 수 있는 체험형 공간이었다. 원하는 책을 대출하면 색연필과 볼펜도 함께 빌려준다고 했다. 서둘러 책이음 회원증으로 단양 도서관 회원 가입을 마쳤다.
'3멍'이 있는 도서관
대출한 책 표지에는 '산멍·책멍·예술멍 THREE 멍이 있는 도서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세상에나. 고스톱의 '쓰리고'는 들어봤어도 도서관에서 '쓰리멍'이라니. 이 카피를 쓴 사서의 재치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이런 유쾌한 개그 코드가 살아있는 도서관이라면 편하게 말을 걸어도 될 것 같았다. 데스크 직원에게 다가가 도서관 여행자라는 전혀 비밀스럽지 않은 신분을 밝혔다. 그리고 우리처럼 단양을 찾은 외지 여행객들이 많이 오는지 물어보았다. 직원의 성실한 답변이 이어졌다. 여행객도 많을뿐더러, 근처 캠핑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캠핑 중에 책을 빌려 가기도 한다고 했다.

▲책멍쓰리멍이 있는 도서관
이인자
그리고 이곳 풍경의 백미는 사실 '눈멍'이라고 덧붙였다. 눈 덮인 겨울 산 풍경이 정말 아름다우니 꼭 눈이 오는 날 다시 찾아오라고 권했다. 하지만 눈길을 뚫고 이곳까지 달려올 엄두는 나지 않았다. 아직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눈 내리는 날 내가 근무하는 도서관의 풍경도 꽤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했다.
산멍을 즐길 수 있는 모든 자리가 아름다웠지만, 단양 올누림도서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은 '몽글몽글 스터디존'이었다. 우리가 흔히 경험한 열람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문을 열자 연둣빛으로 물든 벽면과 카페 같은 아늑한 조명, 세심하게 배치된 책꽂이까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가장 다정한 풍경이 펼쳐졌다. 그곳은 온종일 책에 얼굴을 파묻고 공부만 하라며 등을 떠미는 공간이 아니었다. 지칠 땐 잠시 고개를 들어 쉬어 가도 괜찮다고, 가만히 어깨를 토닥여주는 공간이었다.
왜 '몽글몽글'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생각했다. 무언가를 치열하게 견뎌내는 시간이 어떻게 몽글몽글할 수 있을지 곰곰이 곱씹었다. 목표를 이루려면 매운 마늘처럼 독한 마음만 있어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뒤늦은 나이에 글을 쓰면서 경험한 작은 성취들은 좋아하는 마음, 즐거운 마음, 그리고 누군가 건네준 몽글몽글한 응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몽글몽글 스터디존은 작은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응원석이 아닐까 싶었다.
▲몽글몽글스터디존몽글몽글 다정한 응원석
이인자
내 삶의 제철
도서관 여행을 마친 우리는 다시 한번 단양 구경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골목마다 제철을 맞은 마늘이 줄줄이 널려 있었다. 마늘 한 접을 사 갈까 고민하다가 곧바로 마음을 접었다. 내게는 알싸한 마늘을 까는 시간보다, 두 겹 세 겹 단단히 싸인 마음의 껍질을 벗겨내는 시간이 더 간절했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의 껍질을 벗겨낸들, 단양 육쪽마늘처럼 단단하고 매끈한 문장이 써지는 것은 아니었다. 공허한 쭉정이 같은 문장을 마주할 때가 더 많았다. 그럴 때면 나이 오십이 넘어 첫 산문집을 내고, 이제야 내 삶에도 제철이 찾아온 줄 알았던 마음이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문단의 마침표를 찍을 때 쯤이면 깨닫게 된다. 꿈을 이루거나 알찬 열매를 거두는 순간만이 인생의 제철은 아니라는 것을. 삶을 영글게 하기 위해 묵묵히 버텨내는 겨울 같은 시간이야말로, 안으로 안으로 단단해지는 '인내의 제철'이자 '성장의 제철' 이라는 것을.
비록 지금은 땅속에 묻힌 마늘 씨처럼 숨죽이고 있을지라도, 묵묵히 제 시간을 살아내는 우리의 모든 순간이 저마다의 제철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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