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진김시진은 강하고, 꾸준하고, 영리하고, 성실한 투수였다. 그래서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 사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투수이기도 했다. 단, 최동원이라는 더 강렬한 이름과 늘 겹쳐야 했다는 점이 그의 유일한 불운이었다.
삼성 라이온즈
1984년에는 전기리그를 우승한 뒤 한국시리즈에서 껄끄러운 OB 대신 만만한 롯데를 만나기 위해 후기리그 막바지에 롯데에게 일부러 져주기까지 하는 무리수를 던지고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 4승 신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또 1985년에는 그런 변수마저 남기지 않으려고 전후기리그를 모두 석권하며 통합우승을 달성했지만, 세상은 약속이라도 한 듯 '진정한 우승'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가을야구의 축제 기간을 삭제해 버린 눈치 없는 사람들이라는 눈 흘김을 당하는 것은 덤이었다. 이듬해부터는 선동열이 이끄는 해태 타이거즈의 왕조시대가 열려버렸고, 삼성은 1986년과 1987년 연속으로 준우승에 머물며 OB에서 롯데를 거쳐 해태로 넘어가는 대관식의 배경화면을 담당하는 고질적인 조연배우로 고착되고 말았다.
그래서 적어도 20세기의 삼성에게 우승이란 여느 팀들과는 꽤 다른 느낌의 단어였다.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팀들에게 우승이란 언젠가 반드시 도달하고 싶은 목표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오늘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디게 만드는 동기다. 하지만 삼성에게만은 그것은 당연히 가져야 할 것임에도 갖지 못하는 난감함이며, 그래서 모든 노력을 모아 이루어야 할 목표라기보다는 세상의 비웃음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라도 얼른 한 번은 하고 넘어가야 할 묵은 숙제 같은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우승을 향한 삼성의 집념이 좀 뒤틀려 보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뒤틀린 집념이 팬들의 눈앞에서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 장효조와 김시진을 보낸 트레이드였다. 정규시즌에는 리그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수확하는 투수였지만 한국시리즈에서 꼭 필요한 1승을 지켜내지 못하는 김시진. 그리고 자타공인 최고의 타자였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외야에서 '만세'(실책)를 부르며 우승 가도에 재를 뿌린 장효조.
그 둘 대신 '혼자 한국시리즈 4승을 거둘 수 있는 투수' 최동원과 '그나마 선동열의 공을 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타자' 김용철을 받아오기로 한 승부수. 물론 선수회 결성에 관한, 혹은 해마다 누적된 연봉협상 과정에서의 갈등들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개입되어있긴 했다. 하지만 최소한 삼성에게 더 중요한 것이 '우승을 위한 처방'이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트레이드를 마주하는 팬들은 혼란스러웠다. 정든 선수를 보내야 하는 아쉬움이라고만은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마음이고, 우승을 위한 결단이라고 평가하기만도 어색한 난해한 계산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런 의문을 그들은 품을 수밖에 없었다. 우승이란 과연 무엇인가? 팀과 선수는 어떤 관계이고, 팬과는 또 무슨 관계인가? 그 이전에, 야구란 도대체 왜 하는 것인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답을 찾기도 전에, '실패'라는 결과가 먼저 찾아왔기 때문이다. 선수를 맞바꾸고 맞은 첫 시즌인 1989년, 시즌 20승은 기본으로 기대했던 최동원이 단 1승에 그쳤고 팀은 만년 꼴찌 태평양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하며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그나마 김용철이 3할을 치며 제 몫을 했다고는 하지만 장효조가 늘 해주던 것을 생각하면 헛기침이 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 이듬해 최동원은 절치부심하고도 6승에 그치며 결국 유니폼을 벗었고, 김용철 역시 2할 5푼대로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라이온즈는 다시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았고, 또다시 준우승으로 끝났지만 그것도 부랴부랴 최동원과 김용철 없이 버텨내는 법을 마련한 결과일 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승부수와 그나마 돌아온 처절한 실패. 그 앞에서 팬들은 분노하거나 따져 물을 기회마저 잃어버렸고,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말없이 고통을 감내하며 슬퍼하는 일뿐이었다. 20세기 내내 최강이었지만 최정상에 오르지 못했던 삼성 라이온즈 팬들의 오랜 기억 속 단단히 굳어져 버린 한이란, 굳이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그렇게 묻지도 따지지도 못한 채 함께 떠안아야 했던 고통과 슬픔이다. 야심 차게 뭔가 저질러놓고는 곧장 실패해서 무릎이 꺾인 무관의 사자왕 곁에서, 그저 함께 울고 지나왔던 세월의 깊은 심연이다.
구단에게, 팬에게, 우승이란 무엇인가?
▲통합 4연패2011년부터 2014년까지, 삼성 라이온즈는 전무후무한 통합 4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왕조 시대의 해태 타이거즈마저도 정규리그와 한국시리즈를 4년 내내 제패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삼성 라이온즈의 팬들에게 '우승'은 아픈 기억들을 더 많이 떠올리게 하는 단어다.
연합뉴스
기업에게 우승은 성과다. 투자의 회수이며 브랜드의 증명을 통한 지속적 수입 기반의 창출이다. 그러나 팬에게 우승은 이야기다. 사랑한 시간, 기다린 시간, 함께 울고 웃으며 늙어간 기억이 마침내 완성되고 보상받는 순간이다.
그런데 아마도 겉으로는 같은 '우승'을 외치는 동안에도 초일류기업 삼성과 라이온즈의 팬들은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약 삼성이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우승했다면 구단의 논리가 팬들을 설득해 끌어들였을 수도, 혹은 구단과 팬들이 결별해 다른 길을 가거나 아주 오랜 '적과의 동침'을 이어가기로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우승은 오지 않았고, 삼성과 팬들은 그저 설명되지 못한 고통을 함께 견디는 한 몸이 되었다.
대부분의 팬덤은 함께 승리한 기억으로 결속한다. 하지만 삼성의 팬들은 함께 민망해하고, 함께 조급해하고, 함께 좌절한 기억으로 묶였다. 끝내 얻지 못한 정상. 끝내 끝나지 않는 갈망. 그리고 그 실패의 시간 속에서 비로소 탄생한 팬들. 삼성 라이온즈의 팬들이 욕이 나올 만큼 우승에 거듭 실패하던 시간에도, 또 욕을 먹을 만큼 우승을 반복하던 시간에도 흩어지지 않은 이유가 어쩌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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