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29 06:57최종 업데이트 26.06.2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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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한국 프로야구의 창설을 기획하고 주도한 것은 청와대였다. 서울의 봄과 광주의 오월을 짓밟고 세워진 전두환 정권이 민심 수습을 위해 여력이 있을 만한 기업들을 하나씩 물색하고 제안해 가며 만든 것이 프로야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업들이 내키지 않는 사업에 뒷덜미 잡혀 질질 끌려 들어갔다고 보는 것도 사실과는 다르다. 꾸준한 경제성장이 소비여력을 만들고 있었고, 뒤늦게 해금된 컬러 TV가 기업들에게 새로운 홍보 전략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MBC는 정권보다도 한발 앞서 프로야구단 창단을 준비해 온 기업이었고, 1975년에 이미 프로야구단으로의 전환을 염두에 두고 '준프로급 실업야구팀' 자이언트를 만들어 운영해온 롯데도 있었다. 삼미는 정권의 권유를 받기도 전에 제 발로 걸어들어온 기업이었고, 해태도 참여를 권유받았을 때 내건 조건은 당대의 인기 야구인 김동엽을 창단 감독으로 주선해 달라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서울을 연고지로 내줘야만 가능하다고 버티는 두산에게 '3년 후 상경'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대전에서 시작하게 한 정도가 약간의 진통이었다.


그런데 삼성이 창단을 주저한 이유가 특이했다. 삼성이 문제 삼은 것은 '현대와 대우가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1등 기업 삼성이, 그나마 경쟁상대로 인정해 줄 만한 현대와 대우마저 참여하지 않는 판에 끼어 우승을 한들, 그것이 무슨 대단한 보람이 되겠느냐는 항변이었다. 프로야구 시작 당시 삼성에겐 야구란 그저 중소기업들 몇이 모여서 복작거리는, 1등 기업 삼성이 끼어들기 영 민망한 동네잔치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대통령이 띄운 장단에 맞춰주는 것이 나쁠 것도 없었고, 그 좁은 무대에 끼워주기로 큰맘 먹은 마당에, 삼성이 상상할 수 있는 목표란 우승 말고는 있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너무 야박하게 군다는 손가락질 받지 않고 '신사적으로' 이루어내야만 한다는 것이 당시 삼성그룹 수뇌부의 인식이었다. 그것은 개막전이 시작되자마자 상대 MBC 청룡을 정신없이 몰아붙여 7점 차로 앞서게 되자 '점수는 그만 내고 적절히 조절하라'는 지시가 더그아웃으로 전달되게 만든 배경이었다.

삼성 라이온즈, 우승 그 이상을 위해 만들어진 야구단

장효조.지난 1987년 프로야구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한 삼성 라이온즈의 주장 시절 모습.
장효조.지난 1987년 프로야구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한 삼성 라이온즈의 주장 시절 모습.타격의 정교함에 관한 한, 아직까지 그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자신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 2스트라이크 이후에 스트라이크존 경계선을 타고 들어오는 공에 그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면, 주심은 깊은 고민에 빠져야 했다. 자신이 장효조보다 나은 선구안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연합뉴스

그러나 야구라는 것이, 삼성이 경험해 온 어떤 사업 영역과도 다른 '난해한 것'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야구란 사람의 몸과 몸이, 그것도 둥근 공과 방망이를 통해 마주치며 결과를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욕심껏 불러 모은 선수들의 명성이 각자 오랜 세월 동안 쌓아 올린 훌륭한 실적을 증명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것이 동시에 얼마 남지 않은 선수 수명을 의미한다는 점까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삼성은 전문적이거나 혹은 겸손하지 못했다. 일부러 승부의 고삐를 풀었던 개막전이 결국 연장 10회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을 맞는 것으로 마무리된 것은 그들의 앞날을 예고하는 하나의 징조였다.

1970년대 초중반 국가대표 주전포수였고, 코치 겸 선수로서 삼성 라이온즈 창단에 참여했던 우용득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도 우리가 최강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알게 됐지. 너무 나이가 들어버렸다는 걸. 그리고 너무 오래, 화려한 명성 속에서 안주해왔다는 걸." 첫해의 준우승은, 다시 말해 삼성이 우승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하지만 더 씁쓸한 것은, 그것이 그나마 선수들이 최선 이상을 쥐어짜낸 결과였다는 점이었다.

1983년 이후 삼성은 정말 강해졌다. 이만수가 좀 더 노련하고 강해졌고, 무엇보다도 김시진과 장효조가 합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84년에는 야구 하나만은 지지 않겠다고 없는 살림을 쥐어짜며 돈싸움에서 버티려 들던 두산을 가소롭다는 듯 툭툭 떨쳐 내며 일본 프로야구의 정상급 투수 김일융까지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이만수는 포수로서 활약하면서도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했고(1984년은 타격, 타점까지 3관왕), 장효조는 1983년부터 1987년 사이의 5년간 4번 타격왕에 올랐다. 또 김시진은 1985년과 1987년 다승왕에, 김일융도 1985년 공동다승왕에 이름을 올렸다. 삼성은 국내 최고를 다투는 투수 2명과 타자 2명을 보유한 압도적인 팀이었다.

그렇게 이름값에만 머물지 않는 내실 있는 최강의 전력을 구축했고, 또 훈련시설과 숙소 등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병행했으며, 심지어 현직 메이저리그 코치들을 통해 겨울마다 선진야구를 습득하는 기회까지 만들었다. 기업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야구팀의 전력을 강화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우승에 이르지 못했다.

강해진 라이온즈, 머나먼 정상

김시진
김시진김시진은 강하고, 꾸준하고, 영리하고, 성실한 투수였다. 그래서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 사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투수이기도 했다. 단, 최동원이라는 더 강렬한 이름과 늘 겹쳐야 했다는 점이 그의 유일한 불운이었다.삼성 라이온즈

1984년에는 전기리그를 우승한 뒤 한국시리즈에서 껄끄러운 OB 대신 만만한 롯데를 만나기 위해 후기리그 막바지에 롯데에게 일부러 져주기까지 하는 무리수를 던지고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 4승 신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또 1985년에는 그런 변수마저 남기지 않으려고 전후기리그를 모두 석권하며 통합우승을 달성했지만, 세상은 약속이라도 한 듯 '진정한 우승'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가을야구의 축제 기간을 삭제해 버린 눈치 없는 사람들이라는 눈 흘김을 당하는 것은 덤이었다. 이듬해부터는 선동열이 이끄는 해태 타이거즈의 왕조시대가 열려버렸고, 삼성은 1986년과 1987년 연속으로 준우승에 머물며 OB에서 롯데를 거쳐 해태로 넘어가는 대관식의 배경화면을 담당하는 고질적인 조연배우로 고착되고 말았다.

그래서 적어도 20세기의 삼성에게 우승이란 여느 팀들과는 꽤 다른 느낌의 단어였다.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팀들에게 우승이란 언젠가 반드시 도달하고 싶은 목표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오늘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디게 만드는 동기다. 하지만 삼성에게만은 그것은 당연히 가져야 할 것임에도 갖지 못하는 난감함이며, 그래서 모든 노력을 모아 이루어야 할 목표라기보다는 세상의 비웃음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라도 얼른 한 번은 하고 넘어가야 할 묵은 숙제 같은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우승을 향한 삼성의 집념이 좀 뒤틀려 보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뒤틀린 집념이 팬들의 눈앞에서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 장효조와 김시진을 보낸 트레이드였다. 정규시즌에는 리그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수확하는 투수였지만 한국시리즈에서 꼭 필요한 1승을 지켜내지 못하는 김시진. 그리고 자타공인 최고의 타자였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외야에서 '만세'(실책)를 부르며 우승 가도에 재를 뿌린 장효조.

그 둘 대신 '혼자 한국시리즈 4승을 거둘 수 있는 투수' 최동원과 '그나마 선동열의 공을 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타자' 김용철을 받아오기로 한 승부수. 물론 선수회 결성에 관한, 혹은 해마다 누적된 연봉협상 과정에서의 갈등들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개입되어있긴 했다. 하지만 최소한 삼성에게 더 중요한 것이 '우승을 위한 처방'이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트레이드를 마주하는 팬들은 혼란스러웠다. 정든 선수를 보내야 하는 아쉬움이라고만은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마음이고, 우승을 위한 결단이라고 평가하기만도 어색한 난해한 계산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런 의문을 그들은 품을 수밖에 없었다. 우승이란 과연 무엇인가? 팀과 선수는 어떤 관계이고, 팬과는 또 무슨 관계인가? 그 이전에, 야구란 도대체 왜 하는 것인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답을 찾기도 전에, '실패'라는 결과가 먼저 찾아왔기 때문이다. 선수를 맞바꾸고 맞은 첫 시즌인 1989년, 시즌 20승은 기본으로 기대했던 최동원이 단 1승에 그쳤고 팀은 만년 꼴찌 태평양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하며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그나마 김용철이 3할을 치며 제 몫을 했다고는 하지만 장효조가 늘 해주던 것을 생각하면 헛기침이 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 이듬해 최동원은 절치부심하고도 6승에 그치며 결국 유니폼을 벗었고, 김용철 역시 2할 5푼대로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라이온즈는 다시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았고, 또다시 준우승으로 끝났지만 그것도 부랴부랴 최동원과 김용철 없이 버텨내는 법을 마련한 결과일 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승부수와 그나마 돌아온 처절한 실패. 그 앞에서 팬들은 분노하거나 따져 물을 기회마저 잃어버렸고,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말없이 고통을 감내하며 슬퍼하는 일뿐이었다. 20세기 내내 최강이었지만 최정상에 오르지 못했던 삼성 라이온즈 팬들의 오랜 기억 속 단단히 굳어져 버린 한이란, 굳이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그렇게 묻지도 따지지도 못한 채 함께 떠안아야 했던 고통과 슬픔이다. 야심 차게 뭔가 저질러놓고는 곧장 실패해서 무릎이 꺾인 무관의 사자왕 곁에서, 그저 함께 울고 지나왔던 세월의 깊은 심연이다.

구단에게, 팬에게, 우승이란 무엇인가?

통합 4연패
통합 4연패2011년부터 2014년까지, 삼성 라이온즈는 전무후무한 통합 4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왕조 시대의 해태 타이거즈마저도 정규리그와 한국시리즈를 4년 내내 제패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삼성 라이온즈의 팬들에게 '우승'은 아픈 기억들을 더 많이 떠올리게 하는 단어다.연합뉴스

기업에게 우승은 성과다. 투자의 회수이며 브랜드의 증명을 통한 지속적 수입 기반의 창출이다. 그러나 팬에게 우승은 이야기다. 사랑한 시간, 기다린 시간, 함께 울고 웃으며 늙어간 기억이 마침내 완성되고 보상받는 순간이다.

그런데 아마도 겉으로는 같은 '우승'을 외치는 동안에도 초일류기업 삼성과 라이온즈의 팬들은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약 삼성이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우승했다면 구단의 논리가 팬들을 설득해 끌어들였을 수도, 혹은 구단과 팬들이 결별해 다른 길을 가거나 아주 오랜 '적과의 동침'을 이어가기로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우승은 오지 않았고, 삼성과 팬들은 그저 설명되지 못한 고통을 함께 견디는 한 몸이 되었다.

대부분의 팬덤은 함께 승리한 기억으로 결속한다. 하지만 삼성의 팬들은 함께 민망해하고, 함께 조급해하고, 함께 좌절한 기억으로 묶였다. 끝내 얻지 못한 정상. 끝내 끝나지 않는 갈망. 그리고 그 실패의 시간 속에서 비로소 탄생한 팬들. 삼성 라이온즈의 팬들이 욕이 나올 만큼 우승에 거듭 실패하던 시간에도, 또 욕을 먹을 만큼 우승을 반복하던 시간에도 흩어지지 않은 이유가 어쩌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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