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이 지난해 12월 10일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세계인권선언 77주년 2025 인권의 날 기념식에 참석하려다 인권단체 회원들에게 저지당하고 있다. 2025.12.10 [공동취재]
연합뉴스
안창호 위원장은 취임 당시부터 황당한 인권의식을 노출했다. 2024년 9월 3일 국회 인사청문회 때는 "차별금지법이 도입되면 에이즈가 확산할 수 있다", "동성애는 공산주의혁명의 핵심 수단이 될 수 있다" 등의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취임 1년 뒤인 작년 9월 15일, 인권위원회 노조는 안창호 위원장에 대한 진정서를 인권위원회에 제출했다. 그의 여성 비하 및 차별 발언, 특정 종교 비하 발언, 인종혐오 발언, 종교 편향적 인사 조치 등이 인권위원장을 인권위원회에 진정한 이유였다.
그보다 앞선 작년 3월 26일에는 118개의 국가인권기구로 구성된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GANHRI)이 한국 국가인권위원회에 대한 특별심사 개시를 통보했다. 대한민국의 인권보호 역량을 국제사회가 의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대한민국 인권보호의 수준을 떨어트리는 안창호 위원장의 행보는 최근 들어 두드러지는 인권위 내홍의 원인이 됐다. 이달 23일에는 육성철 광주인권사무소장이 인권위 간부 중 여섯 번째로 보직 반납을 선언했다. 안창호 위원장과 더는 함께할 수 없다는 인권위 직원들의 호소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제3조 제2항은 "위원회는 그 권한에 속하는 업무를 독립하여 수행한다"고 밝힌다. 인권위원 임명 과정에 국회·대통령·대법원장이 관여하지만, 위원회는 다른 국가기구와 무관하게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천명한 조문이다.
그러나 인권위에 대한 국가 차원 혹은 정권 차원의 간섭과 위협은 한두 해의 일이 아니다. 이 같은 문제점은 안창호 사태의 저변에 깔려 있을 뿐 아니라, 인권위가 출범한 2001년 11월 25일 이래 주기적으로 나타난 인권위 파행의 원인이었다.
끊임없는 인권위 파행의 원인
인권위가 설치된 이후의 세 번째 대통령인 이명박 때는 이 기구를 아예 대통령 직속에 두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대통령 취임식을 한 달여 앞둔 2008년 1월 16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에 두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국내외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결국 무산됐지만, 그런 시도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인권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그해 12월 23일,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의 홈페이지를 통해 널리 알려진 것이 있다. 현직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시위대에 얻어맞아가면서 촛불 난동을 어렵게 진압한 경찰의 행위를 인권탄압이라고 규정한 국가인권위원회가 이 정부하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고 발언한 일이다. 국가인권 기구에 대한 이명박 정권 핵심부의 인식을 드러내는 발언이었다.
조갑제 전 대표는 "한나라당은 좌경적인 국가인권위원회를 국민권익위원회에 흡수시키는 법안 제출을 검토 중"이라고 썼다. 인권위의 독립적 활동에 대한 이명박 정권의 불안감을 반영하는 장면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예정 없는 대대적인 감사원 감사를 실시하는 방법으로, 또 대폭적인 직원 감축 방안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인권위를 압박했다. 이명박 정권 2년차인 2009년에 임명된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이 대대적인 퇴진 운동에 직면한 일은 이 시기에 인권위가 겪은 위기를 잘 보여준다.
박근혜 정권 역시 인수위 단계에서부터 인권위를 압박했다. 인권위가 2013년 1월 18일에 비정규직 처우개선 방안 등이 담긴 것으로 알려진 '차기 정부 인권 과제'를 인수위에 전달하자, 인수위의 반응은 '이 내용을 함구하라'는 것이었다. 인권 과제를 인수위에 전달하자마자 언론에 공표하는 것이 인권위의 종래 관행이었다. 이때는 인권위가 이 관행을 따르지 못했다.
2015년 2월 14일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인 유영하 인권위 상임위원이 대형 사고를 일으켰다. 그의 주도하에, 세월호 참사나 통진당 해산 같은 주요 현안에 관한 내용이 삭제된 '인권규약 이행실태 의견서'가 유엔에 발송됐다. 이 때문에 '인권위의 유엔 보고서 마사지 논란'이 일어났다.
이 시기의 인권위원회 역시 심각한 파행을 겪었다는 점은 대선이 있었던 2012년 8월에 두 번째 임기를 개시한 현병철 위원장이 박근혜 탄핵소추 1년 전인 2015년 8월까지 장기집권한 사실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산파역인 김대중 대통령은 <김대중 자서전> 제2권에서 "나는 수첩에 제정해야 할 법안들을 메모했다"고 한 뒤 "수첩 메모의 맨 위에 적혀 있는 것이 국가인권위원회법(인권법)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그는 임기 4년차인 2001년 11월에 가서야 인권위 출범을 성사시켰다. 수첩 최상단에 적어놓고도 빨리 성취하지 못한 원인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인권위 설치에 대한 법무부 및 검찰의 소극적 태도, 둘은 시민단체 내부의 의견 조율 필요성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야당의 반대"였다.
인권위 설치를 반대한 그 야당과 계승세력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의 인권위를 압박하고 파행으로 몰아갔다. 그 세력이 윤석열 정권 때는 안창호 위원장을 앞세워 인권위를 약화시켰다.
정권 변동과 관계없이 국민 인권 안정적으로 보호해야
▲국가인권위원회국가인권위원회
이정민
이는 인권위와 관련된 시스템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제3조 제2항은 인권위의 독립성을 규정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인권위가 정권교체의 영향을 받고 있다. <김대중 자서전>에 적힌 그 야당과 계승 세력이 집권할 때마다 인권위가 늪에 빠지고 있다. 정권 변동과 관계없이 국민 인권을 안정적으로 보호할 시스템이 아직 마련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왕실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횡행했던 19세기 초반 이래로, 한국은 시민혁명이나 민란이 자주 일어나고 민주주의의 역동성이 강렬히 표출되는 지역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인권은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으로 인해 정권 비판 세력이 언제라도 체포될 수 있고,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것이 그 증거다.
인권이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는 상태에서 민주주의의 역동성이 강하면, 대중이 피를 흘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진보세력의 역량이 강했던 해방정국이 일단락된 직후인 1948년부터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수시로 자행된 것은 그 같은 구조적 문제점을 반영한다.
인권과 민주주의가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 대중의 법적 지위가 언제라도 취약해져 민주주의가 위협받기 쉽다는 점은 한국 현대사가 잘 증명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비대칭성을 극복하고 민주주의 수준만큼 인권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 한국의 당면 과제다.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정권이 국가인권위원회를 집중 공략한 것은 그 같은 구조적 문제점을 잘 이해하는 세력이 정권을 운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정권 교체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이 기구에 대한 대중적·국민적 참여와 지원의 폭을 넓힐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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