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24 15:14최종 업데이트 26.06.24 15:17
  • 본문듣기
1999년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재한 일본인 부인회인 부용회(芙蓉會)후원행사. '부용회'는 일제시대에 한국또는 일본에서 한국인 남성과 결혼, 태평양전쟁 종료 후 한국에 남게된 일본인 부인들의 모임이다. 1999.12.14
1999년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재한 일본인 부인회인 부용회(芙蓉會)후원행사. '부용회'는 일제시대에 한국또는 일본에서 한국인 남성과 결혼, 태평양전쟁 종료 후 한국에 남게된 일본인 부인들의 모임이다. 1999.12.14연합뉴스

일제 패망 직후, 해외 한국인들은 한국으로 들어오고 주한일본인들은 한국을 떠나는 것이 대세였다. 그런데 이 대세에 역행 하는 일본인들이 있었다. 그 상황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일본인들이 있었다. 그중 일부가 부용회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 부용회의 마지막 생존자인 야마구치 마스에가 지난달 8일에 별세한 사실이 지난 23일 언론에 보도됐다.

1929년에 홋카이도에서 태어난 야마구치 마스에는 한국인 유학생과 결혼한 뒤 패망 이후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런 다음,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 여성들의 모임인 부용회에서 활동했다. 부용회 회원들을 포함한 '주한일본인 부인'들은 해방 이전과 이후의 한일관계사를 한·일 양국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야마구치 마스에는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한국학연구> 1996년 제8호에 실린 김응렬 고려대 교수의 논문 '재한일본인 처의 생활사'는 주한일본인 부인의 숫자를 "1000명 전후"로 추측했다. 13년 전인 1983년에는 그 숫자가 1500여 명으로 추정됐다는 것이 이 논문의 설명이다. 이는 한일협정(1965) 이후에 일본으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한국 측 통계에 잡히지 않는 여성들의 숫자를 뺀 것이다.

적지 않은 수의 일본 여성들이 한국인과 결혼한 것은 1930년대 후반 이후다. 이때부터 일본 여성과 한국 남성이 일본에서 결혼하는 일이 많아졌다. 야마구치 마스에가 한국 유학생을 만난 것도 이 시기다.

일본 여성과 한국 남성의 결혼

<오늘의 문예비평> 2020년 겨울호에 실린 문화칼럼니스트 임회록의 기고문 '역사의 경계인들 – 재한일본인 여성'은 "일본 내무성의 통계에 따르면 1938년 79만 명이던 조선인들의 숫자는 1944년 194만 명에 이른다"라며 "강제징용된 조선 청년들이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인 여성과의 결혼을 장려하는" 일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또 "징집된 일본 청년들로 인해 결혼 적령기의 일본인 남성이 부족한 것도 일본 여성이 조선인과의 결혼을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덧붙인다.

이 기고문에 소개된 아오키 츠네(1928년 생)의 집에는 홋카이도 탄광으로 강제징용된 한국 청년이 하숙을 했다. 아오키의 아버지는 청년의 성실함에 반해 사윗감으로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아오키는 1944년에 결혼하고 1945년에 아이를 낳게 됐다.

그런데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이 해방된 그해에 그의 남편은 고향인 전북 진안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아오키의 어머니는 딸의 동행을 반대했다. 하지만, 아오키는 남편도 없는 일본 땅에서 자기 자녀가 한토진(반도인) 소리를 들으며 성장하는 게 염려돼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런데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이로 인한 피난 도중에 세 아이 중 막내인 두 살짜리 아들이 굶어 죽었다. 그런 뒤 가족 모두가 장티푸스에 걸려 고생을 하게 되자, 점잖고 성실했던 남편이 알콜 중독자로 돌변해 아오키를 폭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코가 뭉개질 정도로 패는 남편의 폭행을 피해 걸어서 도망갔다"고 위 기고문은 알려준다.

훗날 부용회 회장이 될 구니타 후사코는 부산 건너편인 규슈섬의 동쪽에 있는 시코쿠섬의 에이메현에서 출생했다. 그와 사귀게 된 청년은 일본어가 서툴렀다. 청년은 시골 출신이라 사투리를 쓰는 것이라며 자신은 일본인이라고 해명했다. 구니타는 이 해명을 믿고 22세 나이로 그 청년과 결혼했다.

패망 뒤에 구니타는 남편의 고향으로 이주하게 됐다. 그곳은 '일본 시골'이 아니라 부산이었다. 구니타는 아오키처럼 경제적 곤란을 겪지는 않았지만, 적지 않은 마음고생에 시달렸다. 위 기고문의 설명이다.

"동래의 대지주였던 시댁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별 어려움 없이 지냈지만, 언어와 생활습관, 문화 차이로 인해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그녀의 삶을 유독 힘들게 했던 것은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반일감정이었다."

구니타 같은 사례도 있기는 하지만, 한·일 국교가 파탄된 상태에서 한국에 들어온 주한일본인 부인들의 평균적인 처지를 이해하려면 아래의 설명을 참고하는 게 좋을 듯하다. 위 기고문의 내용이다.

"조선인 남편의 호적에 오르지 못한 일본인 여성의 다수는 그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무국적자가 되었다. 국민됨의 기본이 국적을 가지는 것이라면, 일본인 여성들은 그 기본적인 권리마저 가질 수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1965년 한일수교 후 일본 국적을 되찾은 이들도 일부 있지만, 그들 중에는 오랫동안 무국적자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한국과 일본 사회로부터 아무런 경제적 도움도 받지 못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이도 있었다."

한국인이라고 하기도, 일본인이라고 하기도 뭐한 처지

한국 땅에서 무국적자 취급을 받는 일본인 부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1962년에 가톨릭 주도로 결성된 것이 미생회(彌生會)다. 이 모임이 이때 결성된 것은 형식적으로나마 반일정책이 추진됐던 이승만 집권기(1948~1960)에는 일본인 여성들이 모임을 갖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미생회가 개칭된 것이 부용회다. 1966년 9월 9일 자 <조선일보> 4면은 "재한일본부인회가 부용회로 개칭"됐다는 뉴스를 전한다. 연꽃을 뜻하는 부용이 단체 명칭이 된 것은 한국인이라고 하기도 뭐하고 일본인이라고 하기도 뭐한 일본인 부인들의 처지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위의 '역사의 경계인들' 기고문에 이런 설명이 있다.

"부용을 모임의 이름으로 정한 까닭은 일본의 꽃 사쿠라와 한국의 꽃 무궁화 중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가 없어서 제3국의 꽃, 중국의 부용으로 정한 것이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일본인임을 드러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국인인 척 살아갈 수도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부용이라는 꽃으로 표현한 것이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본 여성과 한국 남성의 결혼이 많아진 것은 강제징용으로 인한 노동자 강제동원이 급증하고 일본 정부가 한국 남성들의 도주를 방지하고자 일본 여성과의 결혼을 권장한 데에 기인한다. 이런 결혼이 일제 식민 정책의 산물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일본 정부는 주한일본인 부인들의 처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는 세 명의 일본인 부인이 1972년 하반기에 도쿄 시내와 왕궁(황거) 앞에서 시위를 벌인 이유와 관련이 있다.

한국살이가 힘들어 한일협정 뒤에 되돌아간 그들은 "차라리 돌아오지 말 것을"이라는 후회가 들 정도로 차별과 냉대를 심하게 겪었다. 그들이 투쟁을 결심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해 12월 10일자 <조선일보> 7면은 그때까지 6개월간 이어진 이 투쟁을 이렇게 묘사했다.

"세 명의 할머니 투사는 오늘도 이마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플래카드를 든 채 도오꾜 거리를 쏘다녔다. 고함을 치고 비라를 뿌리기도 했다. '고국을 찾아온 우리에게 거주의 자유를 달라', '잃어버린 고향에 우리를 내쫓지 말라'."

일본 정부는 협정 체결 4년 뒤인 1969년부터 주한일본인 부인들의 귀환을 허용했다. 그런데 조건이 까다로웠다. 위 기사는 일본 정부가 신원 보증인을 요구하고 거주지를 본적지로 제한했다고 알려준다. 가족과 친지들이 다 떠나고 없는 본적지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기에 '우리를 고향으로 내쫓지 말라'며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세 여성은 "우리는 일제 때 내선일체정책의 선구자로서 동국인끼리 결혼한 것이지 국제결혼을 한 것은 아니다"라며 "우리가 왜 죄인인가?"라고 하소연했다. 일본인 부인들이 고국에 돌아간 뒤에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하소연이다.

주한일본인 부인 문제는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로 인해 발생했다. 이 여성들이 한·일 어느 쪽에서도 마음 편히 살 수 없었던 것은 양국 간의 과거사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부용회원인 야마구치 마스에의 별세는 식민지배 미해결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지금도 우리 곁에 있을 정도로 한·일 식민지배 문제가 현재진행형의 현안임을 다시금 상기시켜준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