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벨레스 하몽 전문점 ‘하모네리아 알 안달루스(Jamoneria Al-Andalus)’ 앞. 송연실 진아에프앤씨 대표와 이찬재 실장(서울대 푸드테크학과 석사과정)이 이곳 제품을 들고 있다. 뒤편의 ‘Secadero de Jamones’ 표지는 이곳이 하몽 숙성장과 판매장이 함께 있는 현장임을 보여준다.
이찬재
오래된 장독대 앞에 서면 항아리만 보이지 않는다. 햇빛이 드는 방향, 바람이 지나가는 길, 흙마당의 습도, 계절마다 달라지는 온도까지 함께 보인다. 좋은 장독대가 단순한 항아리의 집합이 아니라 햇빛과 바람, 흙마당과 옹기, 계절이 축적된 발효 환경이듯, 트레벨레스의 하몽도 단순한 육가공품이 아니었다. 건물의 위치, 계곡의 바람, 낮은 온도, 습도, 소금, 사람의 손이 함께 만든 숙성의 결과였다.
하모네리아 알 안달루스에서 본 것은 하몽이 상품이 되는 과정만이 아니었다. 숙성실과 상점, 포장과 식탁이 한 공간 안에서 이어지는 구조였다. 돼지다리는 소금과 바람, 긴 시간을 통과해 하몽이 되고, 다시 마을의 가게와 식탁으로 나온다. 트레벨레스라는 이름은 그렇게 숙성장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간판과 골목, 포장지와 식당의 접시 위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돼지다리를 무첨가 고산 숙성으로 바꾸는 방식
트레벨레스 하몽의 특별함은 돼지가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데 있지 않다. 이베리코 흑돼지처럼 원료의 희소성으로 프리미엄을 설명하는 방식과도 다르다. 핵심은 돼지다리가 해발 1200m 이상 알푸하라 고산지대의 공기와 소금, 건조한 바람, 긴 숙성 시간을 통과하며 어떻게 달라지느냐에 있다.
그 과정에서 맛과 향이 달라진다. 원료육 자체가 모든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원료육을 어떤 장소에서,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오래 다루느냐가 중요하다. 트레벨레스 하몽은 바로 그 지점에 서 있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차이가 있었다. 일부 육가공 하몽과 햄류는 보존성과 색 안정성을 위해 질산염이나 아질산염 계열 화학첨가물에 기대기도 한다. 그 방식은 고기의 색을 일정하게 붙잡고, 유통의 편의를 높인다. 그러나 우리가 찾고 싶었던 프리미엄은 그런 쪽이 아니었다. 먹음직스러운 색을 내기 위해 첨가물을 쓰는 하몽과, 소금과 바람, 건조와 자가효소만으로 시간을 견디는 하몽은 출발점부터 다르기 때문이었다.
트레벨레스 하몽은 돼지다리와 바다소금, 그리고 고산지대의 건조한 공기에 기대어 숙성된다. 보존료와 색소, 질산염 계열 첨가물로 색을 붙잡는 방식이 아니다. 수분을 빼고, 바람을 들이고, 오래 기다려 맛을 농축하는 방식이다.
이 차이는 단순한 '무첨가' 표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식품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에 가까웠다. 첨가물로 균일성과 속도를 얻는 길이 있다면, 트레벨레스는 소금과 바람, 자가효소와 긴 숙성으로 차이를 만드는 길을 택한 셈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트레벨레스 하몽에 더 마음이 갔다. 경주 왕신리에서 왕신멸치액젓을 만들며 우리가 끝까지 붙잡아 온 가치도 결국 같다. 화학첨가물 없이, 좋은 원료와 신안 천일염, 장독과 자연의 시간으로 맛을 완성하는 일. 빠른 공정보다 느린 숙성을 믿는 일. 소비자에게 더 선명하고 정직한 성분표를 내놓는 일. 트레벨레스에서 본 것은 왜 현대사회에서 소비자들이 클린라벨(복잡한 첨가물 대신, 소비자가 이해할 수 있는 원료로 만든 식품)에 열광하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현장이었다.
앞서 세론의 치즈 공방에서 보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화려한 첨가물로 맛을 꾸미기보다 산양유 원유와 손의 감각, 숙성 시간을 믿는 방식. 트레벨레스의 하몽 역시 같은 영감을 던지고 있었다. 좋은 음식은 무엇을 더 넣어서 완성되는가, 아니면 불필요한 것을 끝까지 넣지 않음으로써 완성되는가. 치즈와 하몽, 액젓, 된장은 서로 다른 식품이지만, 그 현장에서 만난 키워드는 같았다. 화학첨가물 제로. 클린라벨. 수작업. 그리고 시간.
성분표가 단순하다고 공정까지 단순한 것은 아니다. 자연 조건과 원료 상태, 숙성 시간, 장인의 판단이 더 세심하게 맞물려야 한다. 소금과 시간에 기대는 느린 숙성은 단순함 속에 까다로움을 감춘다. 기계의 효율성을 앞세우는 시대에도, 대자연의 호흡에 자신의 오감을 맞춘 장인의 손은 여전히 필요했다. 위대한 숙성은 자연을 완전히 통제하는 데서 나오지 않았다. 자연의 조건을 읽고, 그 속도에 공정을 맞추는 데서 완성되고 있었다.
건조실을 나오면서 우리는 '프리미엄'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했다. 트레벨레스에서 목격한 프리미엄은 원료의 희소성만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일반적인 돼지다리를 고산지대의 자연 조건과 무첨가 숙성 공정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이곳의 프리미엄은 대량생산의 속도와 반대편에 있었다. 많이 넣고, 빨리 만들고, 균일하게 맞추는 방식이 아니었다. 덜 넣고, 오래 기다리고, 장소의 차이를 맛으로 남기는 방식이었다.
IGP가 지키는 것은 문화의 이름이자 상업적 권리였다

▲하모네리아 알 안달루스의 지하 세카데로에서 바라본 계곡 쪽 창. 어두운 숙성고 안으로 시에라 네바다의 차고 건조한 산바람이 스며드는 통로다. 하몽은 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풍과 통풍, 낮은 온도와 시간 속에서 천천히 마르고 익어간다.
이찬재
트레벨레스라는 이름이 세월을 건너올 수 있었던 데에는 오래된 명성과 제도적 울타리가 함께 있었다. 1862년, 스페인 이사벨 2세는 트레벨레스 하몽의 품질을 인정해 왕실 인장 사용을 허락했다. 그 인장은 한때 이곳 하몽의 원산지를 증명하는 표시로 찍혔고, 오늘날에도 마을의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이후 트레벨레스 하몽은 지역 품질 규정과 스페인 국가 차원의 승인을 거쳐, 2005년 유럽연합의 IGP(Indicación Geográfica Protegida), 즉 보호지리적표시제도 안에 등록됐다.
이 제도는 이름을 보호한다. 돼지의 사육은 다른 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트레벨레스라는 이름을 쓰기 위해서는 고기를 염장하고 건조·숙성하는 과정이 정해진 알푸하라 고산지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아무 곳에서나 만든 제품이 '트레벨레스'라는 지명을 쓸 수 없다. 고기의 무게와 숙성 기간에 따라 라벨이 구분되고, 생산자는 그 규정 안에서 품질을 관리한다.
트레벨레스 IGP 하몽은 고기의 무게에 따라 공식 최소 숙성 기간이 14개월, 17개월, 20개월로 나뉜다고 한다. 여기에 중량 감소 기준 등을 충족하기 위한 추가 숙성을 거치면 17개월, 20개월, 23개월 이상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좋은 하몽은 빨리 만들 수 없다. 좋은 하몽은 기다림의 균형 위에서 태어난다.
IGP는 지역 식문화의 정체성을 지키는 장치다. 동시에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생산자와 지역을 구분해 주는 법적·상업적 장치다. 이름을 보호한다는 일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 장소의 조건과 생산 방식의 차이를 시장에서 설명할 언어가 생기기 때문이다. 트레벨레스라는 지명 안에는 고도와 바람, 염장실의 창문, 장인의 손놀림, 그리고 그 이름을 둘러싼 상업적 이해관계가 함께 들어 있었다.
한국의 전통 발효식품도 이 지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얻는다. 장독에서 오래 발효한 액젓과 간장, 된장의 가치를 어떻게 제도적으로 설명하고 보호할 것인가. 특정 지역의 바다, 소금, 콩, 볏짚, 장독, 생산자의 손맛이 만들어낸 미세한 미식의 차이를 어떻게 소비자에게 설득할 것인가. 트레벨레스의 IGP는 지역 전통식품이 세계 시장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보여주었다. 동시에 문화 보호와 상업적 권리 사이의 균형도 함께 생각하게 했다.
피에드라 벤타나의 식탁, 메뉴판은 알푸하라 음식의 지도였다

▲트레벨레스 골목에 자리한 전통 레스토랑 ‘메손 피에드라 벤타나(Meson Piedra Ventana)’ 앞. 왼쪽으로 식당 간판과 야외 테라스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경사진 산악마을 도로가 이어진다. 이곳은 트레벨레스 하몽과 알푸하라 산악 음식을 실제 식탁 위에서 만나는 공간이다.
이찬재
하몽 숙성실을 둘러본 뒤, 우리는 이 마을의 로컬 음식을 맛보기 위해 전통 레스토랑 '메손 피에드라 벤타나(Mesón Piedra Ventana)'의 문을 열었다. 식당 안에는 오래된 나무 의자와 투박한 벽이 있었다. 천장에는 하몽과 생활 도구들이 걸려 있었다. 일부러 꾸민 민속박물관이라기보다, 오랫동안 이 마을 사람들이 먹고 일하고 쉬어 온 생활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식당 한편의 낡은 액자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1992년 이 식당을 창업한 고 호세파 토레스(Josefa Torres), 별명 '라 루비아(La Rubia)' 여사를 기리는 기사였다. 낡은 액자 속 기사에는 그녀가 트레벨레스 마을에서 사랑받은 인물이었고, 1992년 남편과 함께 이 식당을 열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액자는 피에드라 벤타나가 단순한 로컬 식당이 아니라, 한 지역 여성의 손맛과 가족의 삶, 마을의 기억이 이어진 공간임을 보여준다. 하몽과 소시지, 수프와 감자를 식당의 언어로 이어온 마을의 부엌이었다. 그 부엌을 비즈니스의 장으로 확장한 사람도 그였다.
그녀는 알푸하라 산골의 전통 도축과 염장 육가공 문화, 곧 마탄사(Matanza)의 기억을 식당의 메뉴로 이어낸 인물로 보였다. 마탄사(Matanza)는 스페인 농촌에서 겨울철 돼지를 도축하고, 그 고기를 하몽과 소시지, 염장육으로 가공하던 전통 공동체 풍습을 말한다.
사계절의 산바람 아래서 하몽, 초리소, 모르시야, 롱가니사를 염장하고 말리는 가정식 저장의 법도가 이 식당의 식탁에 남아 있었다. 이 식당은 단순한 로컬 식당이 아니었다. 고산 지대의 저장 식문화를 실제 음식으로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트레벨레스의 전통 레스토랑 ‘메손 피에드라 벤타나(Meson Piedra Ventana)’ 전경. 흰 벽의 산악마을 건물 아래 나무 기둥과 테라스가 자리하고, 중앙에는 ‘Restaurante Piedra Ventana’ 간판이 걸려 있다. 이곳은 트레벨레스 하몽과 알푸하라 산악 음식을 실제 식탁 위에서 만나는 공간이다.
이찬재
메뉴판에는 'Jamón de Trevélez', 'Longaniza y morcilla alpujarreña', 'Sopa Alpujarreña' 같은 이름이 보였다. 메뉴판 자체가 이 지역 식문화의 작은 지도였다. 돼지, 소금, 감자, 수프, 올리브오일이 알푸하라 산악 식탁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 테이블로 이 지역 식문화의 압축판, '플라토 알푸하레뇨(Plato Alpujarreño)' 한 접시가 올랐다. 매서운 겨울의 칼바람과 험한 산길의 노동을 견디기 위해 알푸하라 농부와 산악 노동자들이 즐겨 먹던 고단백, 고열량의 음식이다.
접시 위에는 트레벨레스 하몽, 초리소, 모르시야, 롱가니사 소시지, 올리브오일에 볶아낸 '가난한 자들의 감자(Patatas a lo pobre)', 그리고 튀기듯 구운 달걀프라이가 함께 놓여 있었다. '가난한 자들의 감자'라는 이름은 초라함의 표현이라기보다, 감자와 양파, 피망, 마늘처럼 산골 부엌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버리지 않고 한 끼로 완성해낸 생활의 지혜를 표현했다.
화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감자와 달걀, 하몽과 소시지가 함께 놓인 모습은 고산지대 목동과 농부들이 한 끼를 어떻게 버텼는지를 설명했다. 산악의 음식은 멋보다 열량을, 장식보다 저장을 먼저 생각한 듯했다.

▲트레벨레스 하몽과 초리소, 모르시야, 감자, 달걀이 함께 담긴 플라토 알푸하레뇨(Plato Alpujarreno). 알푸하라 산악 노동자의 식탁을 압축해 보여주는 음식이다.
이찬재
계란 노른자를 톡 터뜨려 올리브오일이 밴 감자와 하몽 한 점을 곁들여 입에 넣었다. 먼저 감자의 고소함이 올라왔다. 이어 하몽의 짭조름함과 은은한 단맛, 지방의 부드러운 향이 퍼졌다. 좋은 하몽의 지방은 차갑게 굳어 있는 기름덩어리가 아니었다. 체온에 가까워지는 순간 부드럽게 풀리며 견과류 같은 고소함과 숙성육 특유의 깊은 감칠맛을 남겼다.
그 감칠맛은 단순한 양념의 맛이 아니었다. 단백질이 긴 시간 동안 분해되며 생긴 아미노산의 맛, 지방이 천천히 변하며 만든 향, 소금과 건조가 조율한 농축의 맛이었다. 멸치액젓 한 방울이 김치와 국물의 맛을 끌어올리듯, 하몽 한 조각도 감자와 달걀, 소시지의 맛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입안에서 하몽의 지방이 천천히 녹는 동안, 나는 바다의 멸치와 산악의 돼지가 전혀 다른 재료이면서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고 생각했다. 둘 다 소금 속에서 시간을 견딘다. 둘 다 단백질이 풀리며 감칠맛을 얻는다. 둘 다 인간의 조급함을 거부한다. 플라토 알푸하레뇨는 알푸하라의 역사와 기후, 저장문화를 한 번에 이해하게 하는 미식의 언어였다.
시에라 네바다의 산바람 속에서 다시 한국 장독을 떠올리다
식당을 나와 다시 마을의 차가운 공기를 마셨다. 트레벨레스의 골목을 빠져나오며 뒤돌아보았다. 하얀 벽, 산안개, 하몽 간판, 세카데로의 나무 창문, 식당 안의 낡은 액자가 한 장면처럼 겹쳐졌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한국 장독대의 햇빛과 바람을 떠올렸다.
트레벨레스 하몽이 자연을 이기기보다 그 속도에 맞추었다면, 한국의 액젓과 된장, 간장은 장독 안에서 계절의 호흡을 따라 익어간다. 하나는 고산의 건조한 공기를 빌린다. 하나는 옹기의 숨과 햇빛, 바람, 비와 계절의 순환을 빌린다. 하나는 돼지 뒷다리와 소금으로 출발한다. 하나는 멸치와 콩, 소금으로 출발한다. 출발점은 다르지만, 그 끝에는 같은 논리가 깔려 있었다.
소금, 자가효소, 건조, 기다림, 그리고 자연 앞에 몸을 낮춘 사람의 손.
스페인의 하몽과 한국의 장독 발효는 서로 다른 대륙에서 태어났다. 그래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인간은 자연의 시간을 어떻게 음식으로 바꾸어 왔는가. 부패의 가능성을 어떻게 맛과 저장의 기술로 전환해 왔는가. 지역의 조건을 어떻게 문화와 미식의 자산으로 바꾸어 왔는가.
트레벨레스에서 만난 하몽은 그 질문에 대한 시에라 네바다 산의 대답이었다. 돼지다리를 고산지대의 자연 조건과 장인의 감각으로 전혀 다른 식품으로 바꾸어내는 방식. 화학첨가물에 기대지 않고, 원료와 소금과 시간을 믿는 방식. 그것이 이곳에서 확인한 트레벨레스 하몽의 핵심이었다.
발효의 원형을 찾아 떠난 안달루시아의 탐방은 그렇게 시에라 네바다의 차가운 바람과 한 조각 하몽의 감칠맛 속에서 긴 여운으로 남았다. 그 여운은 다시 한국의 장독 앞으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트레벨레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제대로 된 음식의 힘은 오래 기다리는 태도에서 나온다고. 자연을 이기려는 조급함이 아니라, 자연이 일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맞추는 세심함에서 깊은 맛이 태어난다고. 진짜 프리미엄은 가장 빠른 공정이 아니라, 덜 넣고 오래 기다리는 마음에서 천천히 완성된다고.
스페인 시에라 네바다의 산바람 속에서 나는 다시 한국 장독의 숨소리를 들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