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26 12:15최종 업데이트 26.06.26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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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서 올려다 본 황등석산의 깎아지른 절벽. 아직은 아무나 내려갈 수 없다.윤찬영

황등석.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황등면에서 나는 돌이다. 예로부터 화강암으론 우리나라에서 늘 첫 손에 꼽혔다.

황등석은 밀도가 높고 조직이 단단한 데다 철분이 거의 들어있지 않아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아도 색이 변하지 않고 은은한 회백색을 띈다. 무려 1400년 세월을 견뎌낸,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으로 꼽히는 익산 미륵사지석탑도 황등석으로 쌓아 올렸다.


청와대 영빈관을 떠받치는 높이 13m, 둘레 3m에 달하는 거대한 돌기둥도 황등석을 깎아 만들었고, 국회의사당과 대법원 청사 그리고 독립기념관 등 나라의 권위를 드러내는 기관들을 지을 땐 여지없이 이 황등석을 썼다.

황등석으로 이뤄진 단단한 돌산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파내려 가기 시작한 건 조선 말기인 1858년으로 알려졌다. 어느덧 17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깊이 100m에 달하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바닥 너비만 축구장 9개를 더한 것 만큼 넓다.

전망대 카페에서 내려다 본 황등석산의 모습윤찬영

최근 3년간의 준비 끝에 석산 꼭대기에 앉아 까마득하게 파인 절벽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카페가 들어섰다. 절벽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 사이 거리는 300-500m, 바닥까지는 100m니 그야말로 아득하다. 앞으로 길어야 4년, 더는 돌을 캘 수 없게 되면 지금은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이 거대한 공간은 '황등석산 문화예술공원'으로 거듭나게 된다.

인간이 함부로 파헤친 뒤 자칫 흉물로 버려질 뻔한 돌산이 새로운 쓸모를 찾게 된 것. 돌산에게도, 인간에게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황등에 가면 꼭 황등시장을 찾아 '황등 육회 비빈밥'을 맛봐야 한다. 무거운 돌을 다뤄야 했던 석공들이 빠르게 기운을 되찾을 수 있도록 날고기를 듬뿍 얹은 밥을 미리 비벼 내놓았던 데서 '비빈밥'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시간의 흔적이 곳곳에 새겨진 황등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황등면은 이렇듯 시간의 흔적이 깊이 새겨진 고장이다. 돌의 흔적 말고도 물의 흔적과 기차의 흔적이 있다.

황등호와 나룻배의 모습. 한때는 나룻배를 타고 건너다녀야 할 만큼 큰 호수였다.한국농어촌공사

황등엔 황등호라는 호수가 있었다. '호수의 남쪽'이란 뜻의 '호남'이 가리키는 호수가 바로 이 황등호라는 이야기도 있을 만큼 호수는 크고 또 중요했다.

둑을 쌓아 물을 가뒀다는 뜻에서 황등제라고도 했는데, 조선의 문물을 기록한 백과사전 <동국문헌비고>(1770년)에선 이 황등제를 김제의 벽골제, 고부 눌제와 더불어 '국중삼호(國中三湖)'로 꼽는다. 또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이들(황등제, 벽골제, 눌제)은 한 지역에 크나큰 이익을 주는 수리시설이므로 국력을 집중하여 축조해야 한다. 이 세 제언(둑)이 제대로 유지된다면, 노령산맥 이북 지역은 영원히 흉년이 없을 것이며 이는 곧 국가 전체에 만세의 이익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세의 대부분은 호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때만 해도 나라가 거두는 세금의 상당한 몫이 이 세 호수가 자리한 지금의 전북에서 걷혔다. 그러니까 만약 호남이 '황등호의 남쪽'을 가리켰다면 그건 '황등호에서 시작해 그 남쪽으로 풍요를 누리는 땅'이란 뜻이 담겼던 셈이다.

한때 둘레가 25리(약 10km)에 달할 만큼 커서 나룻배로 건너다녀야 했던 황등호는 안타깝게도 지금은 옛 제방을 따라 난 길만 남아있다. 익산역에서 북쪽으로 곧게 뻗은 익산대로를 따라 5km를 가면 요교(허리다리)가 나오는데 바로 이곳에 황등호가 자리하고 있었다.

황등호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기차역이 나온다. 황등역이다. 일제강점기이던 1912년 호남선이 놓이면서 옛 이리역(익산역)과 함께 문을 열었는데, 지금은 화물열차만 선다.

옛 황등역의 모습익산시

1912년 호남선은 경부선이 지나는 대전에서 시작해 논산과 강경을 거쳐 전북으로 이어졌고, 전북에선 함열과 황등 그리고 옛 이리(익산)를 거쳐 김제평야를 가로질러 정읍에 이르렀다. 황등역이 문을 연 지 2년이 지난 1914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낸 <호남선 노선안내>엔 벌써 철길을 따라 일본인과 조선인이 제법 모여들어 큰 시장이 만들어졌다고 적고 있다.

"황등은 전주평야 북쪽에 위치한 전라북도 굴지의 시장이다. 읍내 호수는 내지인(일본인) 약 100호, 조선인 약 350호이다. 헌병출장소, 학교조합, 수리조합 등이 있다... (중략)... 임익수리조합의 큰 저수지(황등호)는 역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8정 가량 떨어져 있는데, 주변 익산과 옥구 양 군에 걸쳐 3,000여 정보의 비옥한 논에 관개(물을 대는 것)를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엔 황등의 너른 들에서 수확한 쌀들을 황등역에서 기차에 실어 군산항으로 날랐다. 그래서 황등역 앞엔 큰 정미소들이 여럿 있었다. 황등에선 고구마도 많이 났는데, 술 만드는 주정의 원료로 쓰이던 사람 얼굴 만한 고구마들이 역 앞에 산처럼 쌓여있었다고 한다.

황등에서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도 황등역에서 기차를 타고 옛 이리(익산)로 학교를 다녔다. 일제강점기 이리농림부터 남성(여)중·고와 이리(여)중·고 그리고 전북기계공고에 이르기까지 옛 이리엔 이름난 학교들이 많았다. 그래서 아침이면 800여 명 학생들이 황등역으로 몰려와 기차에 몸을 실었다.

저 멀리 함열역을 떠난 기차가 (지금은 사라진) 다산역에 다다를 때쯤 요란하게 기적을 울리면 학생들은 집에서 밥 먹다 말고 황등역으로 뛰어갔고, 마음씨 좋은 기관사는 멀리서 달려오는 학생들을 5분이고 10분이고 기다려줬다고 한다.

학생들은 화물칸을 개조해 만든 시커먼 통학객차에 타야 했는데, 늘 객차가 모자라 40명이 앉으면 꽉 차는 객차 한 칸에 100여 명씩 몸을 구겨 넣어야 했다. 그래도 자리가 없어 기차에 매달려 가는 학생들도 있었고, 이리역에 닿기도 전에 뛰어내리다 잘못해서 목숨을 잃은 이들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가수 나훈아의 대표곡 <고향역>의 작곡가 임종수도 아침마다 황등역까지 내달렸던 학생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황등 바로 옆 삼기에 살면서 이리 남성중학교를 다녔던 그는 아침마다 20리 논길을 뛰었다고 한다.

"가마솥에 불 때다가 뛰어서 열차 발판에 올라타면 기차가 출발해요. 그때 코스모스와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해 곡에 담았습니다."(<전라도닷컴>(283호), 2025.11.)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이뿐이 곱분이 모두 나와 반겨 주겠지
달려라 고향 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많을 땐 역무원이 12명까지 일했다는 황등역도 1980년대를 지나면서 찾는 발길이 줄었다. 기차만 다니던 길을 버스와 차가 다니기 시작했고, 지방인구도 갈수록 줄어든 탓이다. 한때 역장 혼자 역을 지키기도 했던 황등역은 다행히 고속철도가 익산역을 지나게 되면서 익산역이 맡아오던 화물중계와 화차검수 일을 넘겨받았다. 이제 더는 사람이 타고 내리진 않지만 호남·전라선을 지나는 하루 500대에 달하는 화물열차들이 모두 이곳에서 새로 연결되거나 분리된다.

다시 새로운 시간을 쌓아가는 황등

황등에 옛날 이야기만 가득한 건 아니다. 최근 황등에선 <황등면지> 만드는 일이 한창이다. 황등에서 태어나 공무원으로 30여 년을 보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채수훈 면장이 벌인 일이다. 그는 황등의 58개 마을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함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황등석산이 문을 닫는 4년 뒤면 황등면의 고령화률이 60% 가까이 될 텐데 그때까지 새로운 길을 닦아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황등면지>는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작업이 아니에요. 우리가 이뤄놓은 것들, 우리가 가진 것들을 찬찬히 되짚어보면서 앞으로 황등이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를 함께 찾는, 희망을 만들어가는 일이에요."

채 면장은 황등만의 브랜드도 만들고, '황등석산 문화예술공원'처럼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올 만한 그 무언가도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다. 한때 우시장까지 열리며 장날이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던 황등시장에도 새로운 청년들이 자리를 잡고 활기를 불어넣길 바란다고도 했다.

그는 <황등면지>를 만드는 데 필요한 1억 원이 넘는 돈도 대부분 모금과 기부로 모으고 있다. '고향사랑기부제'의 지정 기부제도 활용하고 있는데, 익산 밖에서 고향사랑기부제로 모인 기부금이 3000만 원으로 황등면민을 비롯한 익산시민이 모아준 기부금 4000만 원에 맞먹는다. 그는 고향을 떠난 이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된다고 했다.

비가 오는 날 아가페정원의 모습.윤찬영

황등엔 아가페정원이란 민간 정원이 있다. 1970년대 초반 빈 땅에 꽃과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게 50년 넘는 시간이 쌓여 지금은 그야말로 풀과 꽃과 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룬 곳이다. 누군가 처음 씨를 뿌렸기에 오늘의 숲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익산시 황등면엔 시간이 만들어낸 돌과 물과 기차 그리고 숲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리고 아직 황등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 황등이 써내려 갈 이야기가 무엇일지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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