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23 09:28최종 업데이트 26.06.23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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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집단학살을 명시적으로 금지한 최초의 합의, 유엔 총회 결의 제96(I)호는 이렇게 쓴다.

"살인이 개별 인간의 생존권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살해(제노사이드)는 전체 인류 집단의 생존권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존권의 부정은 인류의 양심에 충격을 주며, 이들 집단이 표상하는 문화적 및 기타 기여의 상실이라는 형태로 인류에게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고, 도덕률 및 국제연합(UN)의 정신과 목적에 위배된다."

차후 제노사이드협약으로 이어지는 이 결의로 인류는 전시와 평시를 가리지 않고, 인간을 집단적으로 학살하는 모든 행위를 인간의 이름으로 끝내기로 합의했다. 1946년 12월 11일의 일이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이에 따른 인명피해, 그리고 전후 처리 과정에서조차 불거진 형평성의 문제를 국제사회가 봉합한 결과였다.

비록 보호 대상이 '국민적, 민족적, 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으로 한정된다는 한계와, 국민국가 내부에서 벌어지는 문화적 말살책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었으나, 인류는 오랜 기간 이 정신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인류가 집단학살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 1993년1994년 만들어진 임시 국제형사재판소, 2001년 확립된 인도주의적 보호책임 규범,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한 구체화까지, 국제사회의 협력은 언제나 어려운 과제였지만 국민국가와 내부의 구성원들이 이와 같은 '어려운' 일을 해낸 까닭은 결국 인간은 존엄하다는 합의가 있어서였다. 그리고 어려운 시기에도 인류는 늘, 인간은 존엄하다는 원칙 아래 어려운 진보를 거듭해 왔다.

'최소한의 합의'라는 의미

극우가 부상하고 국제사회의 정의가 흔들리는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최소한의 합의'마저 흔들리는 국면 아래 서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집단적 학살과 이에 침묵하는, 심지어 동조하는 국제사회가 그 원인이다.영화로도 알려진 내용처럼, 2024년 여섯 살이었던 팔레스타인 소녀는 가족과 함께 대피하던 중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사망한다. 대피하는 민간인에 대한 포격은 이미 1994년 유엔 전문가 위원회가 인종청소, 즉 대량학살의 정황으로 지적한 범죄이기도 하다.

영화 <힌드의 목소리> 포스터
영화 <힌드의 목소리> 포스터(주)더콘텐츠온

그뿐인가, 병원은 전기가 끊겨 환자들이 사망하고, 의료진은 감금과 고문 끝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두 인류가 두 차례의 전쟁을 거치며 어렵게 합의한, 인간의 존엄성을 정면으로 비웃는 처사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이러한 비극 앞에서 당장의 학살을 멈추게 할 실효적인 조치도, 일치된 규탄 의사도 내놓지 못했다. 국가를 행위자로 하는 국제법 체제의 단면이었다.

공백을 메운 주체는 시민들이었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민간 해상 지원 활동을 펼치는 단체, 글로벌 수무드 플로틸라는 2025년 여름부터 활동하며, 그들이 내세운 목표처럼 "정부가 보호하지 못한 인간의 존엄성과 국제법을 수호하기 위한 세계적인 운동"을 펼쳐 왔다(☞ 관련 자료: 글로벌 수무드 플로틸라 소개).

단체가 소개하는 참여자들, 즉 70여 개국에서 온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은 사실 사라져 가는 인간의 존엄과 양심을 대변하기 위해 나선 셈이다. 한국에서도 세 명의 활동가가 배를 타고, 마치 한국 근대사에서 어두웠던 시기를 연대의 힘으로 극복했듯이 지금 폭력, 공포 속에 놓인 민중과 함께하기 위해 떠났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민중이 당한 것처럼, 폭력과 고문에 가까운 행위 끝에 공해상에서 나포됐다.

국민이 공해상에서 나포되자 대통령이 나서 이스라엘의 국제법 위반을 비판하고,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시민들로부터는 생환을 염원하는 기도가 잇따랐다. 그러나 눈에 띄는 반응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2007년 선교를 목적으로 여행자제국가 아프가니스탄에 출국한 개신교도들과의 비교였다. "왜 여행하지 말라는 지역에 가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당위와 실제 모두 잘못된 비교를 앞세우고 있다.

교인들의 출국은 국제인권법이 보장하는 개인적 권리의 행사였다.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CCPR)'은 모든 사람에게 자국을 포함한 어느 나라에서든 떠날 자유(제12조)와 종교·신념의 자유(제18조)를 보장한다. 그러나 이 권리들은 공공의 이익 앞에서 절대적이지 않다. 자신의 종교나 신념을 표명하는 자유는 법률로 규정되나, 공공의 안전·질서·보건·도덕 또는 타인의 기본적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 제한될 수 있다. 국민국가가 여행자제경보를 내고, 자유를 제한하는 이유다.

가자 항해는 초점이 완전히 다르다. 인도주의적 항해는 사적 권리의 행사가 아니라, 국제인도법상 국제사회에 부여된 인도주의적 의무이기도 하다. 실제 국제법의 하나인 제네바협약은 점령지에 대한 구호 의무를 명시하고, 구호품과 구호 활동 역시 보장하도록 하고 있다. 국제법이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는 지금, 항해라는 수단은 이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궁여지책이기도 하다.

요컨대 한쪽은 국가가 합법적으로 막을 수 있었던 선택이고, 다른 한쪽은 국가가 마땅히 허용하고 보호했어야 할, 더 나아가 국제사회가 인도주의적 의무로 부과한 행위다. 활동가들은 국제사회가 채웠어야 할 의무를, 그리고 '내'가 채웠어야 할 의무를 메우러 갔다.

이스라엘서 석방된 활동가, 증언 기자회견
이스라엘서 석방된 활동가, 증언 기자회견가자지구행 구호선에 탑승했다가 이스라엘군에 나포됐던 활동가 김아현씨와 김동현씨가 5월 28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나포 당시 가혹행위 증언 및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러한 구체적 의무 앞에서 해야 할 일은 활동가들에 대한 연대와 지지 이외에도 더 있다. 한때 식민지배와 저개발국가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지금 고소득국가의 일원으로 자리한 한국이라면, 시민이 해야 할 의무의 범위는 더 커진다. ICJ 보스니아 사건(2007)이 확인했듯이 이는 영향력 있는 국가가 가용한 모든 수단을 다해야 하는 구체적 의무, 그리고 국제공동체 전체에 지는 대세적 의무인 까닭이다.

이미 많은 활동가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은 유명한 무기 수출국이며, 이스라엘에도 총기·폭탄류를 수출해 온 것으로 확인된다(관련 기사: 한국, 2024년 이스라엘에 무기 84억원 팔았다). 만약 그러한 이전이 학살에 쓰일 것을 알면서 이뤄진다면, 그것은 도의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합의에 관한 도전이다. 무기거래조약 제7조는 중대한 인도법·인권법 위반에 쓰일 '압도적 위험'이 있으면 수출을 거부하도록 명한다. 더욱이 제노사이드협약 제3조는 공모를 처벌 대상으로 명시하고, 국가책임 법리(ILC 위법행위책임 초안 제16조)는 타국의 위법행위를 알면서 원조·지원한 국가에 책임을 지운다. 무엇보다 한국이 가입한 무기거래조약(ATT)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사안이다.

그렇기에 연대하는 시민들은 취소된 활동가의 여권 효력을 복구하도록 정부를 압박하는 일, 전쟁범죄에 전용될 수 있는 무기·전략물자의 이전을 점검·중단하도록 촉구하는 일, 무엇보다 자국 정부가 가장 평화로운 행동에 부끄러운 침묵으로 답하지 않도록 요구할 수 있다.

흔한 냉소가 있다. '국제법에 무슨 강제력이 있느냐'는 것이다. 절반만 맞다. 국제법에는 중앙집권적 경찰도, 강제관할권을 가진 상위 법원도 없다. 그러나 구속력이 비단 강제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합의는 준수되어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원칙은 조약법의 토대이고(조약법협약 제26조), 관습법과 강행규범은 가입 여부와 무관하게 모든 국가를 구속한다. 역설적이게도, 국가들이 자신의 행위를 끊임없이 '합법'이라 변호한다는 사실 자체가 국제법이 행동을 규율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무엇보다 한국 시민들이 가장 잘 아는 것처럼, 한국은 식민지배와 혼란스러운 근대를 거치며 인권과 평등, 인간의 존엄이라는 인류의 근대적 합의에 오랫동안 기대 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연대 끝에 이제 그 합의를 지키고, 확산시킬 수 있게 된 위치에 섰다. 지금 한국 시민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그리고 형평하게 배분돼야 한다고 여기는 사회적 자원의 상당 부분도 이와 같은 합의에 힘입어 한국에서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 역시 이와 같은 연대의 뜻을 돌려주는 데 있다.

스스로 저소득 국가의 공중보건 재난 현장에서 일해 온 의사이자 의료인류학자인 폴 파머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장 기본적인 권리, 곧 살아남을 권리가 거대한 풍요의 시대에 짓밟히고 있다." 세계화와 '과학적' 진보가 넘치는 것과 같은 시대에, 오히려 인류가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당하는 현장을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나온 말이다. 파머의 말대로, 그 대책이 불평등하게 배분되었을 뿐, 인류는 폭력에 대응할 힘과 책임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한국시민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역시, 이러한 연대의 기반 위에 존재해야 지속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 될까? 국제사회가 그 응답을 지켜보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HSC의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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