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세론(Seron)의 수제 산양유 치즈 공방 ‘퀘세리아 세로네스 아르테사노(Queseria Serones Artesano)’ 제조실에서 송연실 진아에프앤씨 대표(사진 왼쪽부터), 마스터 치즈 메이커 주안 엔리케 레베르테(Juan Enrique Reverte) 공동대표, 파블로(Pablo) 부장, 이찬재 실장(서울대 푸드테크학과 석사과정)이 환하게 웃고 있다.
이찬재
공장 방문의 마지막, 파블로 부장은 나에게 열처리를 하지 않은 그들의 귀한 생치즈 한 조각을 건네며 시식을 권했다. 그는 "유통의 제약 때문에 멀리 수출하기는 어렵고, 이곳에서 먹을 때 가장 제대로 된 풍미를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조심스레 베어 문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멸균을 거치지 않아 자칫 무겁지 않을까 했던 예상과 달리, 치즈는 한없이 가볍고 담백하면서도 혀끝에 닿는 순간 대자연의 미생물이 빚어낸 묵직한 견과류와 허브의 복합적인 감칠맛이 입안 가득 파도처럼 밀려왔다. 살짝 쫄깃한 식감에, 향은 강하지 않았지만 산양유의 유지방이 가진 묵직함과 산뜻함이 함께 섞여 있었다. 질리지 않는 맛이었다. "세상에 이런 치즈가 있었나"라고 스스로 탄성을 내질렀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강렬하게 관통한 것은 첫 입구에서 들이마셨던 '메주의 쿰쿰한 향'의 진정한 의미였다. 세로네스 아르테사노의 발효 철학은 지구 반대편 한국, 특히 내가 몸담고 있는 '왕신'의 전통 장독 발효 철학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험준한 지형적 고립과 가난 덕분에 산업화가 늦어져 오히려 오래된 전통이 살아남았다는 세론의 역사적 궤적은, 타협 없이 옛 방식을 간직해 온 한국 전통 장독 발효의 배경과 쌍을 이룬다. 무엇보다 대기업식 생산의 편의성을 과감히 포기하고, 자연 미생물의 힘과 '시간'에 미각을 온전히 내어준다는 본질적 철학이 서로 닮아 있었다.
열처리하지 않은 치즈가 신선한 산양유 원유의 생생한 풍미를 살려내듯, 한국의 전통 발효 역시 가열 정제보다 자연 발효의 맑은 감칠맛을 살리는 방식을 택해 왔다. 공정을 인위적으로 더하는 대신 미생물의 속도를 묵묵히 기다려주는 두 장인의 결단이 국경을 넘어 닮아 있었다.
박람회를 위해 준비했던 매콤한 왕신유자핫소스를 이 담백한 안달루시아 장인 치즈에 살짝 곁들여 입에 넣었을 때 경험한 폭발적이고 환상적인 마리아주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히 레시피를 억지로 섞은 것이 아니라, 대량생산의 획일화 대신 척박한 자연의 바람과 시간을 경외해 온 두 발효 문화의 철학적 공감대가 입안에서 조화롭게 만나는 순간이었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1차원적 물질을 넘어, 혹독한 전쟁과 빈곤의 역사를 견뎌낸 지역의 기후,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생태계, 그리고 인내라는 '시간' 그 자체를 묵묵히 내어놓는 위대함. 이역만리 스페인 안달루시아 산악지대의 거친 바람과 한국 경주의 뜨거운 햇살 아래 숨 쉬어온 장독이 품어낸 길고 긴 세월은 결국 '살아 있는 미식(Living Gastronomy)'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로 수렴되고 있었다. 치즈 공방을 나서며 뒤돌아본 세론의 척박한 돌산 위로, 장독에서 피어오르는 끈질긴 생명력의 향기가 산바람을 타고 오래도록 맴도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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