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세론(Seron)의 수제 산양유 치즈 공방 ‘퀘세리아 세로네스 아르테사노(Queseria Serones Artesano)’ 숙성실에서 파블로(Pablo) 부장의 안내를 받으며 치즈 숙성 과정을 견학하고 있다. 숙성실 안에는 시간을 견디며 익어가는 산양유 치즈들이 줄지어 놓여 있고, 파블로 부장은 온도와 습도, 표면 관리, 숙성 기간에 따라 달라지는 치즈의 풍미를 설명했다.
이찬재
현대에 이르러 세론의 발효 기술이 지금의 형태로 이어지게 된 배경에는 1930년대 발발한 비극적인 스페인 내전(1936~1939)과 기나긴 독재 정권이라는 뼈아픈 역사가 존재한다. 내전 전 안달루시아는 소수의 부유한 지주들이 토지를 독점하는 대토지 소유제(Latifundio)가 만연하여 불평등이 극심했고, 가난한 소작농들이 주축이 된 좌익 세력이 강했던 곳이었다. 이 때문에 안달루시아 여러 지역은 내전 초기부터 격렬한 충돌과 진압, 보복의 무대가 되었다.
1937년 민간인 피난민들이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알메리아로 도망치던 중 해안 도로에서 폭격을 당한 비극적인 사건, 이른바 '라 데스반다(La Desbandá)'는 안달루시아 현대사의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프랑코 독재 아래 남부 농촌의 빈곤과 정치적 억압은 오래 지속되었고, 많은 주민은 이주와 자급의 삶으로 내몰렸다.
그 결과, 세론과 같은 내륙 산악 지대는 20세기 중후반까지 빈곤과 고립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대규모 산업화와 도시적 기반에서 멀어진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자급자족에 가까운 삶을 이어가야 했다. 안달루시아 내륙 곳곳의 동굴집(Casas Cueva)은 그런 삶의 흔적이었다. 가난한 산악 주민들은 산기슭의 부드러운 점토질과 석회질 암벽을 곡괭이로 파내어 동굴집을 만들고 삶을 이어갔다.
하지만 가난의 산물이었던 이 보금자리는 놀라운 발효의 조건을 품고 있었다. 전기조차 귀했던 시절, 이 지하 동굴들은 사계절 내내 서늘한 온도와 비교적 안정된 습도를 유지하는 '천연 냉장고' 역할을 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이런 공간은 식재료를 보관하고 천천히 숙성시키기에 유리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유럽을 휩쓴 획일적인 대량 생산의 파도도 이 고립된 산골짜기 동굴의 두터운 암벽을 쉽게 넘지 못했다. 외부 세계와의 단절은 역설적이게도 이 지역을 식문화적 타임캡슐로 만들었고, 대량 생산을 위한 화학 첨가물이나 기계식 공장형 시스템의 유입을 늦추며 장인들의 수작업 발효 기술을 보존하게 만든 방패막이가 되었다.
실제로 세론 방문 전날, 안달루시아의 작은 산골 마을에 있는 동굴집을 에어비앤비로 예약해 숙박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절벽에 뚫린 하얀 문들이었다. 마치 산이 사람을 품고 있는 듯했다. 동굴집은 밖에서는 단순한 흰 벽처럼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공기의 온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뜨거운 바깥 햇살과 달리 내부는 놀라울 정도로 서늘했다. 흙과 돌이 오랜 시간 머금은 냉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절벽을 곡괭이로 파들어가다 보니,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은 점점 더 미로처럼 변했다. 벽은 현대 건물처럼 반듯하게 직선을 이루지 않았다. 사람 손으로 돌과 흙을 조금씩 파내며 만든 흔적 때문인지, 벽면은 물결처럼 굽어 있었고 천장도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곳은 갑자기 낮아져 수시로 머리를 부딪혔다.
통로는 두 사람이 동시에 지나가기 어려울 만큼 좁았다. 방과 방 사이에는 작은 계단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겨우 복도를 지나면 또 다른 좁은 통로가 나타났고, 그 끝에서 다시 몇 계단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마치 산속 동굴을 따라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두꺼운 흙벽 때문인지 방 깊숙한 곳에서는 와이파이조차 잡히지 않았다. 이곳은 단순한 호텔이라기보다, 수백 년 동안 안달루시아 내륙 사람들이 더위와 가난을 견디며 만들어온 동굴집 문화의 연장선에 있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밤이 깊어지자 동굴 벽은 외부의 소리를 완전히 삼켜버렸다. 그 적막 속에서 듣는 벽난로의 올리브나무 타는 소리와 와인 한 잔은, 현대 호텔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안달루시아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가난한 자의 소 '무르시아-그라나다' 염소와 극한의 떼루아

▲일행이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세론(Seron) 인근 산악 마을에 1박했던 동굴집 호텔 내부 모습. 흙과 돌을 파내 만든 벽난로에는 장작불이 타오르고, 굽은 벽면과 낮은 천장, 깊숙이 이어지는 실내 구조가 안달루시아 내륙의 독특한 동굴 주거 문화를 보여준다. 세론 일대의 고립된 산악 환경과 건조한 기후 속에서 이런 동굴집은 오래전부터 더위와 추위를 피하는 생활공간이자,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천연 저장 공간 역할을 해왔다. 냉장 기술이 부족했던 시절, 이 같은 공간은 치즈와 하몽 같은 식재료를 보관하고 천천히 숙성시키는 발효 문화의 배경이 되었다.
이찬재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세론(Seron) 인근 동굴집 호텔에서 바라본 석양. 붉게 물든 하늘 아래로 낮은 산과 들판, 사이프러스 나무와 메마른 구릉이 이어지며 세론 일대의 고립된 산악 풍경을 보여준다. 사막 같은 건조함과 고산의 서늘함이 공존하는 이 지역의 자연환경은 치즈와 하몽 같은 저장식품을 천천히 말리고 숙성시키는 발효 문화의 배경이 되었다.
이한기
이 척박한 역사를 이겨낸 발효 문화의 중심에는 자연이 빚어낸 최고의 원재료가 있다. 안달루시아 내륙의 암벽 지대와 가파른 경사면은 덩치가 큰 소보다는 산악 지형에 강한 염소에게 더 알맞은 환경이었다.
덥고 건조하여 부드러운 풀조차 귀한 이곳에서, 산을 타는 능력이 탁월하고 거친 덤불마저 먹고 자라는 염소는 가난한 산악 주민들의 주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자 생존의 동반자였다. 특히 이 지역에 오랫동안 적응해 온 '무르시아-그라나다(Murciana-Granadina)' 염소는 스페인 남동부의 반건조 기후에서 발달한 대표적인 낙농 품종이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세론(Seron)의 수제 산양유 치즈 공방 ‘퀘세리아 세로네스 아르테사노(Queseria Serones Artesano)’ 숙성실에서 송연실 진아에프앤씨 대표와 이찬재 실장(서울대 푸드테크학과 석사과정)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뒤편으로는 숙성을 기다리는 산양유 치즈들이 선반과 작업대 위에 가지런히 쌓여 있다. 이곳은 온도와 습도를 관리하며 치즈가 천천히 익어가는 공간으로, 세론 장인들이 수작업과 시간의 힘으로 발효·숙성 식문화를 이어가는 현장이다.
이찬재
이 염소들은 가파른 바위산을 누비며 야생 타임, 로즈마리 등 지중해성 허브가 섞인 산악 식생을 먹고 자란다. 무르시아-그라나다 염소의 젖은 지방과 단백질 함량이 높은 편으로 평가되며, 이런 성분은 치즈 발효와 숙성 과정에서 깊은 풍미를 만드는 중요한 바탕이 된다.
공방은 대량 생산 업체처럼 불특정 다수의 젖을 섞어 쓰는 대신, 인근 농가와 협력해 이 품종의 산양유를 엄선해 사용한다. 건조한 산악 환경에 적응한 염소들의 젖에는 산지의 야생적인 향과 풍토가 은은하게 스며 있다.
"좋은 치즈는 좋은 우유에서 나온다"는 자연의 절대 명제 아래, 세로네스 아르테사노 장인들은 원유가 가진 본연의 떼루아를 해치지 않는 길을 택했다. 철저히 자연의 속도에 미각을 내어주며 획일화된 대량 공정을 거부하고, 가장 자연에 가까운 상태의 원료를 다루는 이 고집이야말로 이 산악 마을이 오랜 시간 지켜온 미식의 핵심적인 자신감이자 발효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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