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22 17:35최종 업데이트 26.06.22 20:09
  • 본문듣기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세론(Seron)의 수제 산양유 치즈 공방 ‘퀘세리아 세로네스 아르테사노(Queseria Serones Artesano)’ 제조실에서 파블로(Pablo) 부장과 통역이 송연실 진아에프앤씨 대표(사진 가운데), 이찬재 실장(사진 오른쪽·서울대 푸드테크학과 석사과정)에게 치즈 제조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뒤편으로는 직원들이 산양유 치즈 성형 작업을 이어가고, 작업대 위에는 숙성을 앞둔 치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세론(Seron)의 수제 산양유 치즈 공방 ‘퀘세리아 세로네스 아르테사노(Queseria Serones Artesano)’ 제조실에서 파블로(Pablo) 부장과 통역이 송연실 진아에프앤씨 대표(사진 가운데), 이찬재 실장(사진 오른쪽·서울대 푸드테크학과 석사과정)에게 치즈 제조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뒤편으로는 직원들이 산양유 치즈 성형 작업을 이어가고, 작업대 위에는 숙성을 앞둔 치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이찬재

2026년 5월 7일 새벽, 스페인 남부 해안 도시 베라(Vera)에 머물던 우리는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각에 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안달루시아 알메리아 북부, 시에라 데 로스 필라브레스 산맥의 북쪽 사면에 자리한 작은 산악 마을 세론(Serón)이었다.

스페인을 운전하며 거칠고 황량한 지형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안달루시아(Andalusia) 알메리아(Almería) 주 북부로 향하는 산간 도로는 차원이 달랐다. 짙게 깔린 안개 속에서 굽이진 길을 한참 동안 오르며, '이토록 험준하고 고립된 산길 끝에 과연 마을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오전 8시경, 마침내 해발 800m대의 척박한 마을 세론(Serón)에 도착했다. 알만소라 계곡을 내려다보는 이 마을은 화려한 관광지라기보다 고립과 생존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곳에 가까웠다. 마을 초입에는 스페인 수제 산양유 치즈 공방, '퀘세리아 세로네스 아르테사노(Quesería Seronés Artesano)'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여러 박람회에서 오랜 인연을 맺은 안달루시아의 올리브오일 회사 마테오 몬테사노 대표가 "100% 핸드메이드라 물량이 부족해 스페인 내에서도 구하기가 쉽지 않다"면서 "스페인의 발효를 찾는다면 꼭 방문해야 한다"고 강력히 추천한 곳이었다.

퀘세리아 세로네스 아르테사노 치즈 공장 위로는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이어져 있었다. 아래에서는 치즈가 만들어지고, 위에서는 그 치즈를 지켜온 사람들이 살아가는 구조였다. 주차장으로 쓰는 마당은 넓고 깨끗했으며, 척박한 산악 풍경과 달리 공방 안팎에는 잘 정돈된 장인의 긴장감이 흘렀다.

차에서 내려 이 회사 Pablo 부장과 치즈 공장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발효 전문가인 나의 온몸 감각을 깨우는 향기가 덮쳐왔다. 마치 두껍고 거대한 '고소한 우유 냄새의 벽'을 통과하는 듯, 묵직하고 진한 유지방의 향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어서 그 진한 고소함 사이로 너무나도 익숙하고 쿰쿰한 '메주 발효 향기'가 코끝을 때렸다.

메주는 발효 후 소금물을 더해 간장이나 된장으로 변모하기에, 메주방에서만 맡을 수 있는 원초적인 발효 향을 일상에서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 스페인의 첩첩산중 산악 마을에서, 한국 경주 왕신의 메주방에서 매일 맡았던 바로 그 향기를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음식은 지역의 역사, 아픔, 기후, 토질 등 모든 것이 결합된 문화의 결정체다.

이 낯설고도 벅찬 감동은 이번 탐방이 단순한 미식 기행을 넘어, 오래 이어져 온 발효의 궤적과 근원을 추적하는 여정임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했다.

사막과 고산이 교차하는 천연 발효실, 세론의 지리적 축복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북부 산악지대에 자리한 세론(Seron) 마을 전경. 시에라 데 로스 필라브레스 산맥 자락의 구릉 사이로 흰 집들이 밀집해 있고, 멀리 알만소라 계곡과 건조한 산악 풍경이 펼쳐져 있다. 척박한 지형과 고립된 환경 속에서 세론은 산양유 치즈와 하몽 등 발효·숙성 식문화를 이어온 안달루시아 내륙의 대표적인 산악 마을이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북부 산악지대에 자리한 세론(Seron) 마을 전경. 시에라 데 로스 필라브레스 산맥 자락의 구릉 사이로 흰 집들이 밀집해 있고, 멀리 알만소라 계곡과 건조한 산악 풍경이 펼쳐져 있다. 척박한 지형과 고립된 환경 속에서 세론은 산양유 치즈와 하몽 등 발효·숙성 식문화를 이어온 안달루시아 내륙의 대표적인 산악 마을이다.이찬재

이 척박한 깊은 산골 마을이 어떻게 알메리아의 발효 및 숙성 식문화가 깊게 남은 곳이 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세론이라는 지역이 품고 있는 기묘한 지리적 떼루아(Terroir)에 숨어 있다. 알메리아 북부 산악지대에 위치한 세론은 2,000m급 고지를 품은 시에라 데 로스 필라브레스(Sierra de los Filabres) 산맥권의 자락과 경사면에 형성된 마을이다. 겨울에는 눈이 내리고, 산에서 내려오는 차고 건조한 바람이 마을을 훑고 지나간다.

세론을 향해 운전할 때 사막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곳은 유럽 대륙에서 보기 드문 사막기후 지대인 타베르나스 사막(Desierto de Tabernas) 및 척박한 배들랜드(Badlands) 지형과 멀지 않다. 스페인 남부의 높은 산맥들이 바다에서 오는 습한 비구름을 막아서는 '비그늘(Rain Shadow)' 효과 탓에, 이 일대는 강수량이 적고 건조한 기후를 띤다. 울창한 나무가 아니라 붉은색 흙과 바위가 그대로 노출되어, 마치 서부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황량하다.

이 '사막 같은 건조함'과 '고산의 서늘함'이 교차하는 이질적인 기후는 발효와 숙성에 유리한 조건이 된다. 치즈나 하몽 같은 발효 저장식품의 숙성 공정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은 과도한 수분 활성도로 인한 부패균과 유해 곰팡이의 증식이다. 세론 일대의 지중해성 건조 기후와 산맥에서 내려오는 서늘한 바람은 부패균과 유해 곰팡이의 증식을 억제하는 데 유리하다.

건조한 산바람은 치즈 겉면을 안정적으로 굳히며 천천히 내부 수분을 증발시켜 풍미를 고밀도로 농축시킨다. 비가 잦고 습한 기후에서는 쉽지 않은 자연 건조 숙성의 조건이 이곳 산악지대에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로마의 액젓 '가룸(Garum)'부터 이슬람의 '이목(移牧)'까지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세론(Seron)의 수제 산양유 치즈 공방 ‘퀘세리아 세로네스 아르테사노(Queseria Serones Artesano)’ 제조실에서 직원들이 치즈 성형 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대 위에는 몰드에 담긴 산양유 치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뒤편에서는 위생복을 착용한 장인들이 커드와 성형 상태를 살피며 수작업 공정을 이어가고 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세론(Seron)의 수제 산양유 치즈 공방 ‘퀘세리아 세로네스 아르테사노(Queseria Serones Artesano)’ 제조실에서 직원들이 치즈 성형 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대 위에는 몰드에 담긴 산양유 치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뒤편에서는 위생복을 착용한 장인들이 커드와 성형 상태를 살피며 수작업 공정을 이어가고 있다. 이찬재

세계의 발효를 찾은 이번 여정에서 여실하게 깨달은 사실은 지역의 식문화는 역사 및 지리와 떼려야 뗄 수 없다는 점이다. 세론도 마찬가지였다. 이곳 주변은 오래전부터 광물 자원과 산악 수로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정착해 살아온 지역이었다. 로마 시대 남부 스페인은 광산 개발과 목축, 염장·건조 저장식품 문화가 발달한 공간이었다. 세론 역시 이 넓은 산악·광물 문화권 안에서 목축과 저장식품의 전통을 키워왔다.

남부 스페인은 덥고 건조한 기후와 냉장 기술의 부재로 인해 자연스럽게 치즈 숙성과 하몽 염장 등 생존형 저장 음식 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인근 지중해 연안에서는 로마 시대 가룸(Garum) 산업이 번성했다. 해안의 액젓, 내륙의 치즈와 건조육은 서로 다른 재료를 썼지만, 모두 냉장 기술 이전의 세계가 만들어낸 발효·숙성 저장식품이라는 점에서 같은 식문화적 맥락에 놓여 있었다.

발효 문화가 고도로 진화한 또 하나의 배경은 이슬람 알안달루스(Al-Andalus)의 시간이었다. 711년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에 들어온 뒤 1492년 그라나다 왕국이 멸망하기까지, 알안달루스의 시간은 이베리아 남부의 농업과 물 관리, 목축 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물 관리에 탁월했던 무어인(Moors)들은 산악 관개 기술과 농업, 식재료 저장 기술, 염소 목축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세론의 좁고 하얀 골목과 산악형 집 구조에는 그 옛날 이슬람 시대의 흔적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중세 후반에 접어들며 세론은 알만소라 계곡을 내려다보는 방어적 위치에 자리한 산악 마을이자 성채 요새로 기능했다. 이 험준한 지형은 외부의 침입을 막는 천연 방패였고, 덕분에 그들만의 목축 및 발효 문화의 뼈대가 오래 이어질 수 있었다.

스페인 내전과 동굴집(Casas Cueva), 혹독한 고립이 지켜낸 전통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세론(Seron)의 수제 산양유 치즈 공방 ‘퀘세리아 세로네스 아르테사노(Queseria Serones Artesano)’ 숙성실에서 파블로(Pablo) 부장의 안내를 받으며 치즈 숙성 과정을 견학하고 있다. 숙성실 안에는 시간을 견디며 익어가는 산양유 치즈들이 줄지어 놓여 있고, 파블로 부장은 온도와 습도, 표면 관리, 숙성 기간에 따라 달라지는 치즈의 풍미를 설명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세론(Seron)의 수제 산양유 치즈 공방 ‘퀘세리아 세로네스 아르테사노(Queseria Serones Artesano)’ 숙성실에서 파블로(Pablo) 부장의 안내를 받으며 치즈 숙성 과정을 견학하고 있다. 숙성실 안에는 시간을 견디며 익어가는 산양유 치즈들이 줄지어 놓여 있고, 파블로 부장은 온도와 습도, 표면 관리, 숙성 기간에 따라 달라지는 치즈의 풍미를 설명했다.이찬재

현대에 이르러 세론의 발효 기술이 지금의 형태로 이어지게 된 배경에는 1930년대 발발한 비극적인 스페인 내전(1936~1939)과 기나긴 독재 정권이라는 뼈아픈 역사가 존재한다. 내전 전 안달루시아는 소수의 부유한 지주들이 토지를 독점하는 대토지 소유제(Latifundio)가 만연하여 불평등이 극심했고, 가난한 소작농들이 주축이 된 좌익 세력이 강했던 곳이었다. 이 때문에 안달루시아 여러 지역은 내전 초기부터 격렬한 충돌과 진압, 보복의 무대가 되었다.

1937년 민간인 피난민들이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알메리아로 도망치던 중 해안 도로에서 폭격을 당한 비극적인 사건, 이른바 '라 데스반다(La Desbandá)'는 안달루시아 현대사의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프랑코 독재 아래 남부 농촌의 빈곤과 정치적 억압은 오래 지속되었고, 많은 주민은 이주와 자급의 삶으로 내몰렸다.

그 결과, 세론과 같은 내륙 산악 지대는 20세기 중후반까지 빈곤과 고립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대규모 산업화와 도시적 기반에서 멀어진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자급자족에 가까운 삶을 이어가야 했다. 안달루시아 내륙 곳곳의 동굴집(Casas Cueva)은 그런 삶의 흔적이었다. 가난한 산악 주민들은 산기슭의 부드러운 점토질과 석회질 암벽을 곡괭이로 파내어 동굴집을 만들고 삶을 이어갔다.

하지만 가난의 산물이었던 이 보금자리는 놀라운 발효의 조건을 품고 있었다. 전기조차 귀했던 시절, 이 지하 동굴들은 사계절 내내 서늘한 온도와 비교적 안정된 습도를 유지하는 '천연 냉장고' 역할을 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이런 공간은 식재료를 보관하고 천천히 숙성시키기에 유리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유럽을 휩쓴 획일적인 대량 생산의 파도도 이 고립된 산골짜기 동굴의 두터운 암벽을 쉽게 넘지 못했다. 외부 세계와의 단절은 역설적이게도 이 지역을 식문화적 타임캡슐로 만들었고, 대량 생산을 위한 화학 첨가물이나 기계식 공장형 시스템의 유입을 늦추며 장인들의 수작업 발효 기술을 보존하게 만든 방패막이가 되었다.

실제로 세론 방문 전날, 안달루시아의 작은 산골 마을에 있는 동굴집을 에어비앤비로 예약해 숙박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절벽에 뚫린 하얀 문들이었다. 마치 산이 사람을 품고 있는 듯했다. 동굴집은 밖에서는 단순한 흰 벽처럼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공기의 온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뜨거운 바깥 햇살과 달리 내부는 놀라울 정도로 서늘했다. 흙과 돌이 오랜 시간 머금은 냉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절벽을 곡괭이로 파들어가다 보니,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은 점점 더 미로처럼 변했다. 벽은 현대 건물처럼 반듯하게 직선을 이루지 않았다. 사람 손으로 돌과 흙을 조금씩 파내며 만든 흔적 때문인지, 벽면은 물결처럼 굽어 있었고 천장도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곳은 갑자기 낮아져 수시로 머리를 부딪혔다.

통로는 두 사람이 동시에 지나가기 어려울 만큼 좁았다. 방과 방 사이에는 작은 계단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겨우 복도를 지나면 또 다른 좁은 통로가 나타났고, 그 끝에서 다시 몇 계단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마치 산속 동굴을 따라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두꺼운 흙벽 때문인지 방 깊숙한 곳에서는 와이파이조차 잡히지 않았다. 이곳은 단순한 호텔이라기보다, 수백 년 동안 안달루시아 내륙 사람들이 더위와 가난을 견디며 만들어온 동굴집 문화의 연장선에 있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밤이 깊어지자 동굴 벽은 외부의 소리를 완전히 삼켜버렸다. 그 적막 속에서 듣는 벽난로의 올리브나무 타는 소리와 와인 한 잔은, 현대 호텔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안달루시아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가난한 자의 소 '무르시아-그라나다' 염소와 극한의 떼루아

일행이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세론(Seron) 인근 산악 마을에 1박했던 동굴집 호텔 내부 모습. 흙과 돌을 파내 만든 벽난로에는 장작불이 타오르고, 굽은 벽면과 낮은 천장, 깊숙이 이어지는 실내 구조가 안달루시아 내륙의 독특한 동굴 주거 문화를 보여준다. 세론 일대의 고립된 산악 환경과 건조한 기후 속에서 이런 동굴집은 오래전부터 더위와 추위를 피하는 생활공간이자,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천연 저장 공간 역할을 해왔다. 냉장 기술이 부족했던 시절, 이 같은 공간은 치즈와 하몽 같은 식재료를 보관하고 천천히 숙성시키는 발효 문화의 배경이 되었다.
일행이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세론(Seron) 인근 산악 마을에 1박했던 동굴집 호텔 내부 모습. 흙과 돌을 파내 만든 벽난로에는 장작불이 타오르고, 굽은 벽면과 낮은 천장, 깊숙이 이어지는 실내 구조가 안달루시아 내륙의 독특한 동굴 주거 문화를 보여준다. 세론 일대의 고립된 산악 환경과 건조한 기후 속에서 이런 동굴집은 오래전부터 더위와 추위를 피하는 생활공간이자,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천연 저장 공간 역할을 해왔다. 냉장 기술이 부족했던 시절, 이 같은 공간은 치즈와 하몽 같은 식재료를 보관하고 천천히 숙성시키는 발효 문화의 배경이 되었다.이찬재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세론(Seron) 인근 동굴집 호텔에서 바라본 석양. 붉게 물든 하늘 아래로 낮은 산과 들판, 사이프러스 나무와 메마른 구릉이 이어지며 세론 일대의 고립된 산악 풍경을 보여준다. 사막 같은 건조함과 고산의 서늘함이 공존하는 이 지역의 자연환경은 치즈와 하몽 같은 저장식품을 천천히 말리고 숙성시키는 발효 문화의 배경이 되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세론(Seron) 인근 동굴집 호텔에서 바라본 석양. 붉게 물든 하늘 아래로 낮은 산과 들판, 사이프러스 나무와 메마른 구릉이 이어지며 세론 일대의 고립된 산악 풍경을 보여준다. 사막 같은 건조함과 고산의 서늘함이 공존하는 이 지역의 자연환경은 치즈와 하몽 같은 저장식품을 천천히 말리고 숙성시키는 발효 문화의 배경이 되었다.이한기

이 척박한 역사를 이겨낸 발효 문화의 중심에는 자연이 빚어낸 최고의 원재료가 있다. 안달루시아 내륙의 암벽 지대와 가파른 경사면은 덩치가 큰 소보다는 산악 지형에 강한 염소에게 더 알맞은 환경이었다.

덥고 건조하여 부드러운 풀조차 귀한 이곳에서, 산을 타는 능력이 탁월하고 거친 덤불마저 먹고 자라는 염소는 가난한 산악 주민들의 주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자 생존의 동반자였다. 특히 이 지역에 오랫동안 적응해 온 '무르시아-그라나다(Murciana-Granadina)' 염소는 스페인 남동부의 반건조 기후에서 발달한 대표적인 낙농 품종이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세론(Seron)의 수제 산양유 치즈 공방 ‘퀘세리아 세로네스 아르테사노(Queseria Serones Artesano)’ 숙성실에서 송연실 진아에프앤씨 대표와 이찬재 실장(서울대 푸드테크학과 석사과정)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뒤편으로는 숙성을 기다리는 산양유 치즈들이 선반과 작업대 위에 가지런히 쌓여 있다. 이곳은 온도와 습도를 관리하며 치즈가 천천히 익어가는 공간으로, 세론 장인들이 수작업과 시간의 힘으로 발효·숙성 식문화를 이어가는 현장이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메리아주 세론(Seron)의 수제 산양유 치즈 공방 ‘퀘세리아 세로네스 아르테사노(Queseria Serones Artesano)’ 숙성실에서 송연실 진아에프앤씨 대표와 이찬재 실장(서울대 푸드테크학과 석사과정)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뒤편으로는 숙성을 기다리는 산양유 치즈들이 선반과 작업대 위에 가지런히 쌓여 있다. 이곳은 온도와 습도를 관리하며 치즈가 천천히 익어가는 공간으로, 세론 장인들이 수작업과 시간의 힘으로 발효·숙성 식문화를 이어가는 현장이다.이찬재

이 염소들은 가파른 바위산을 누비며 야생 타임, 로즈마리 등 지중해성 허브가 섞인 산악 식생을 먹고 자란다. 무르시아-그라나다 염소의 젖은 지방과 단백질 함량이 높은 편으로 평가되며, 이런 성분은 치즈 발효와 숙성 과정에서 깊은 풍미를 만드는 중요한 바탕이 된다.

공방은 대량 생산 업체처럼 불특정 다수의 젖을 섞어 쓰는 대신, 인근 농가와 협력해 이 품종의 산양유를 엄선해 사용한다. 건조한 산악 환경에 적응한 염소들의 젖에는 산지의 야생적인 향과 풍토가 은은하게 스며 있다.

"좋은 치즈는 좋은 우유에서 나온다"는 자연의 절대 명제 아래, 세로네스 아르테사노 장인들은 원유가 가진 본연의 떼루아를 해치지 않는 길을 택했다. 철저히 자연의 속도에 미각을 내어주며 획일화된 대량 공정을 거부하고, 가장 자연에 가까운 상태의 원료를 다루는 이 고집이야말로 이 산악 마을이 오랜 시간 지켜온 미식의 핵심적인 자신감이자 발효의 근원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