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22 07:00최종 업데이트 26.06.2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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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투수 최동원때로는 무너졌던 투수. 하지만 꼭 이겨야 한다고 마음먹으면, 누구를 상대로든 며칠 동안이든 홀로 마운드를 지키며 수십 개의 삼진을 빼앗아낸 뜨거운 투수. 그래서 그는 한국 야구사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으로 남는다.연합뉴스

1980년 말, 연세대 졸업을 앞둔 최동원이 실업팀 롯데 자이언트로부터 계약금 5천만 원을 받기로 했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이전까지 가장 많은 계약금을 받은 야구선수는 1978년 말에 한양대 졸업을 앞두고 포항제철에서 1200만원을 받은 장효조였다. 불과 2년 만에 4배 이상 불어난 액수였다.

비교 대상을 전체 스포츠로 넓혀 보면 더욱 놀라운 점이 있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와 농구, 배구였고 야구는 그 다음이었다.


그중에서도 축구에 대한 관심이 예나 지금이나 국가대표 팀에만 집중되었고 야구의 인기가 고교 무대를 중심으로 확산되는 추세였다면, 국내 성인리그로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여자배구와 여자농구였다. 따라서 한국에서 가장 많은 계약금을 받는 것은 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배구와 농구의 여자 선수들이었다. 야구선수가 그해 스포츠를 통틀어 최고액의 계약금을 받은 것은 1980년 겨울의 최동원이 해방 이후 처음이었다.

최고 종목의 최고 선수, 최동원

선수의 몸값은 그 선수의 능력 이전에, 그가 속한 종목과 리그가 그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경제적 위상을 가지느냐에 의해 먼저 결정된다. 한국에서 야구는 1960년대 실업리그가 본격적으로 시작돼 '야구를 직업으로 삼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토대를 놓았고 1970년대 고교야구가 지역대결의식의 대리전으로 자리잡으며 대중화했다. 그 사이 급격히 성장한 국민경제는 홍보효과를 노린 기업들이 야구에 보다 많은 투자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

야구선수라는 직업을 얻기 위해 '밥만 먹고 야구만 했던' 소년들의 첫 세대를 대표하는 이름이 김재박과 이선희라면, 그 바로 다음 세대에 최동원이 있었다. 그들이 방과후 활동을 통해 배출된 영재들이었던 윗세대와 차원이 다른 기술을 습득하고 숙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들이 성장해서 국가대표 명단에 오르면서 한국 야구는 놀라운 성과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한국이 처음 세계대회에 출전한 것은 1975년 캐나다 멍크턴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였고, 이듬해인 1976년에는 한 단계 높은 권위의 세계선수권대회에 첫선을 보였다. 두 대회에서 한국은 비록 조별 예선을 통과하지는 못했지만 3승 4패와 5승 5패로 선전하며 자신감을 얻었고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에서 마침내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한국 단체 구기종목 역사상 처음으로 경험하는 세계 정상이었다.

그 세 번의 대회에서 한국대표팀을 이끈 기둥투수는 프로 원년 삼성 라이온즈 소속으로 개막전과 한국시리즈에서 역전 만루홈런을 맞으며 '비운의 투수'로 불리게 되는 이선희였다. 그리고 첫 우승을 달성했던 1977년 대회에 처음 대표팀에 발탁돼 실업팀 선배들에 밀리지 않는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이며 한몫 거든 19살 막내 투수가 최동원이었다. 그 최동원이 국가대표팀에서 조금씩 이선희의 몫을 나누어 맡고 또 대체해 가는 동안 야구는 세계무대에서 꾸준히 정상권에 오르며 입지를 다졌고, 고교무대로부터 확산한 인기와 상승 작용하며 드디어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새로이 떠오른 최고의 인기종목 야구에서, 이미 대학생으로서 국내 최고의 선수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선수에게 최고의 몸값이 주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야구가 기술적 성장과 대중적 인기를 동시에 모으기 시작하던 1970년대에 한국은 가파른 경제성장까지 이루었고, 그 모든 상승 흐름의 정점에서 잭팟을 터뜨린 것이 최동원이었던 셈이다.

그라운드의, 압도적 지배자

롯데의 최동원부산 야구의 심장. 한국 야구의 얼굴. 결국 이어지지 못한 기다림의 끈. 최동원. *사진은 영화 <1984 최동원> 스틸컷㈜트리플픽쳐스

하지만 그저 시대적 행운에 올라탄 선수로만 기억되지 않는 것은, 그가 빛났던 그 세대 안에서도 유독 도드라진 화려한 빛을 뿜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남고 2학년이었던 1975년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에서 그 해 3관왕에 도전하던 최강팀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고, 3학년이 된 1976년 청룡기 대회에서는 4강전에서 만난 선린상고, 그리고 승자결승과 최종결승에서 두 번 싸운 군산상고를 상대로 각각 11개, 20개, 12개의 삼진을 뽑아내며 거의 혼자 힘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고교야구 정상의 무대에서, 최강팀 간의 경기를, 한 명의 투수가, 세 번 연속으로, 그렇게 압도적으로 지배한 사례는 없었다.

물론 최동원은 완벽한 투수가 아니었고, 꽤 기복도 있었다. 그는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서 콜롬비아와의 두 차례 중요한 대결에 투입돼 완봉승과 1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기여했지만 정작 대표팀 우완 에이스의 입지에서 출전한 1980년과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뜻밖의 순간 난타당하며 이선희나 임호균의 구원에 의지해야 했다. 하지만 '이겨야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상대가 누구든, 혹은 몇 경기든 몇 회든 완투했고 수십 개의 삼진을 쓸어담는 것이 최동원이었다.

1981년 실업야구 코리언시리즈에서 최동원은 6경기에서 42.1이닝을 던져 2승과 2세이브를 얻어내 먼저 육군 경리단에 2패를 당하며 패색이 짙던 롯데 자이언트의 멱살을 잡고 우승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3년 뒤인 1984년, 이젠 프로팀이 된 롯데 자이언츠 소속의 그는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당시 절대강자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또다시 5경기에 나서 40이닝을 던지며 혼자 4승을 거두며 프로 첫 우승을 맛보았다. 경남고 시절에나 실업 시절에나, 또 프로에서도 최동원은 우승에 큰 기여를 하는 정도를 넘어 거의 혼자 힘으로 우승을 만들어내는 투수였다.

그래서 1988년 11월 23일, 신문 1면을 뒤덮은 트레이드 기사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롯데의 최동원, 오명록, 김성현이 삼성으로 가고 삼성의 김시진, 오대석, 허규옥, 전용권이 롯데로 온다는 발표. 입단 때부터 시작해 겨울마다, 계약을 둘러싼 길고 지루한 줄다리기와 감정싸움들이 쌓이고 쌓인 데 더해 최동원이 앞장섰던 선수회 결성 시도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사정은 물론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미 5년 전 삼미가 핵심투수 임호균을 롯데로 보낸 대형 트레이드를 지켜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최동원은 아무래도 또 달랐다. 삼미의 임호균이 팀을 꼴찌에서 탈출시킨 구원자라면 롯데의 최동원은 최하위권의 롯데를 우승으로 끌어올린 영웅이었다. 그리고 삼미의 임호균이 인천 야구의 상징이었다면 최동원은 한국 야구의 얼굴이었다. 팀보다 뛰어난 선수는 없는 법이라지만, 확실히 팀보다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 최동원을 떠나보내는 일이 가능하다는 상상을 해본 부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충격의 트레이드, 한과 깨달음을 남기다

사직야구장 앞 최동원최동원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유일하게 야구장 앞에 동상으로 남겨진 선수다.연합뉴스

하지만 어쨌거나 트레이드는 돌이킬 수 없었고, 최동원은 삼성 유니폼을 입고 두 시즌을 버티다가 떠났다. 롯데에서 6년 동안 218경기에 등판해 79번 완투한 것을 비롯해 1292.2이닝을 던지며 96승과 25세이브를 남긴 최동원은 삼성에서의 2년 동안 30경기, 122이닝을 던져 7승 7패 1세이브라는 평범한 성적을 추가했을 뿐이었다.

삼성의 유니폼을 벗으면서 야구장을 떠나버렸던 그는 연예인과 정치인의 삶을 잠시 거쳐 지도자로 돌아왔지만 끝내 롯데의 유니폼을 다시 입을 수는 없었다. 선수로서는 끝나버렸지만 지도자로는 다시 만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던 부산 팬들의 기나긴 기대는 결국 그가 2011년 5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이어졌고, 영영 끊어졌다.

최동원을 떠나보낸 부산의 야구팬들이 깨달은 것이 있다면,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선수를 향한 사랑과 팀을 향한 사랑, 구단을 향한 사랑이 늘 한 방향일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선수를 향한 사랑이 아무리 절절해도 그를 보내거나 붙잡을 수 있는 힘이 결국 팬들에게 있지는 않다는 것. 그래서 어느 야구팀을 사랑하고 그 팀에 속한 선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끝내 무력해질 수 있는 순간까지 각오하고 끌어안아야 하는 가슴 아픈 일이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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