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 인용된 기부 영수증. 사진 출처: <중남미 한인의 역사>
국사편찬위원회
자신의 인생을 고국의 독립을 위해 바친 사람
김도형 독립기념관 국외사적지팀장은 2019년 8월 13일 자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각종 명목으로 걷은 돈을 다 합치면, 멕시코의 한인들은 수입의 약 20% 이상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멕시코 교민들이 십일조가 아니라 '십이조'를 고국에 바친 셈이다. 국세청 같은 공권력이 없는데도 20% 이상을 고국에 바친 것은 그들의 고국 사랑이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증명한다.
김익주는 '납세' 방식에 그치지 않고, 사업 활동으로 바쁜 그 와중에도 독립운동 현장에 뛰어들었다.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025년 제124권에 수록된 역사학자 박환(고려학술문화재단 이사장)의 논문 '멕시코 한인 적십자 지도자 김익주'는 1919년 3·1운동 당시의 김익주가 항일투쟁 소식을 북중미에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기술한다. 이 논문에 따르면, 이토 게이치 주(駐)멕시코 일본임시대리공사가 외무성에 보낸 그해 10월 15일자 보고서에 이런 내용이 있다.
"1919년 3월 조선독립운동 개시 전후부터 매일 밤 자택에 조선인들을 모아서 집회를 하였다. (중략) 항상 미국의 조선인과 소통하고 미국에서 온 영문 소책자를 스페인어로 번역하였고, 번역은 김익주의 아들이나 개신교 목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익주는 한국에서 일본을 거쳐 미국에 유입되는 독립운동 뉴스를 재미교포들로부터 제공받아 멕시코 현지에 전파했다. 이런 일을 아들과 함께했으니, 고국 독립에 대한 열의가 얼마나 절절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김익주는 독립운동에 '완전히 미친' 사람이었다. 사업하면서 독립운동을 병행한 것만으로도, 독립운동에 미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집안의 기둥뿌리까지 뽑아내는 사람이었다.
그의 손자인 아벨 김공씨는 위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안창호 선생에게 돈을 드리고 나서 10년 후에도 또 다른 독립운동가의 다급한 지원 요청을 받고 재산을 처분해 돈을 보내드려 결국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빈털터리가 됐다고 할 정도로 재산 대부분이 독립운동단체와 독립운동가들에게 바쳐졌던 것이다.
1999년에 대한민국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익주에게 추서했다. 그해 8월 14일 자 <조선일보> 31면에 따르면, 당시의 국가보훈처는 김익주의 행적을 4개월간 추적한 끝에 훈장 추서를 결정했다. 이 기사는 그 조사 결과를 토대로 이렇게 보도했다.
"김 선생은 한국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인 1900년대 초 서울과 평양에서 반일 정치활동을 하다가 일본 군경에 쫓겨 부인과 제주도로 피신했다. 김씨 부부는 중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실패, 1905년 멕시코 유카탄행 배를 탔다."
그렇게 해서 한국을 떠난 김익주는 멕시코로 이민 가서 식당 사업으로 돈을 벌고, 그 돈과 더불어 자신 및 가족의 인생을 고국 사랑에 바쳤다. 이 때문에 빈털터리가 되다시피 했을 정도로 그는 이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꺼내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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