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20 17:30최종 업데이트 26.06.20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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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팀의 북중미 월드컵 1차전과 2차전이 치러진 과달라하라는 태평양 쪽인 멕시코 서해안의 중간쯤이다. 이에 비해, 오는 25일 남아공과의 3차전이 열릴 몬테레이는 멕시코만(트럼프에 따르면 아메리카만) 및 대서양 쪽인 멕시코 동북부에 있다.

몬테레이가 멕시코 동해안의 북부에 있다면, 그 동해안의 남부에 있는 것이 쿠바 쪽으로 튀어 나간 유카탄반도다. 이곳은 한국과의 인연이 꽤 깊은 지방이다. 1905년에 이곳으로 집단 이주해 애니깽(에네켄·선인장) 농장에서 일했던 한국인들의 피땀과 한이 그곳에 서려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재외동포사총서 제6권: 중남미 한인의 역사>는 "중남미 지역에서 한국인들이 최초로 이주한 나라는 멕시코"라며 이런 설명을 한다.


"1903년 하와이 이민에 이어 1905년 1033명의 한인들이 계약노동자로서 멕시코 유카탄반도에 갔다. 이 이민은 일회성으로 끝나고 말았고, 중남미에 다시 한국인들이 들어간 것은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중남미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1960년대이다."

을사늑약이 있었던 1905년의 멕시코 이민이 일회성으로 끝난 근본적 이유에 관해 위 책은 "당시 한국과 멕시코와의 사이에 경제적 교류가 적어서 한국인이 멕시코를 좋은 이민 대상으로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한다. 최초 이민자들이 들어간 뒤에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기고 중남미 국가들과 교류할 수 없게 된 것이 멕시코 이민이 단절된 최대 요인이었다는 설명이다.

<재외동포사총서 제2권: 재외동포사회의 역사적 고찰과 연구방법론 모색>은 최초의 한국인 이민자들을 초빙한 쪽은 "유카탄 에네켄 농장주협회"였다고 한 뒤, 한국인 이민자 중에는 전직 군인이 가장 많았다고 알려준다. 그 숫자가 2백을 넘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지원자들은 소작농, 노동자, 전직 하급관리, 몰락 양반, 무당, 내시, 기독교도, 건달과 거지 등 각약각색"이었다고 이 책은 기술한다.

멕시코에서 독립운동한 김익주의 삶

독립운동가 김익주
독립운동가 김익주국가보훈부

이때의 몰락 양반 중에 김익주(金益周)라는 사람이 있었다. 스물한 살 된 고종 임금이 실권자인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기 위해 최후의 분투를 벌이던 1873년에 태어난 인물이다. 출생지는 황해도 재령군 남률면이고, 본적지는 지금의 서울 마포구 공덕동인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신공덕동이다. 2005년 2월 22일 자 <중앙일보> '멕시코 이민 100년' 중편은 "고 김일성 주석과 사촌간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한다.

부인 및 아들과 함께 태평양을 건넌 김익주는 혹독한 농장일을 견디기 힘든 사람이었다. 양반 출신이었던 그는 육체노동에 적응돼 있지 않았다. 1999년 광복절 전날 발행된 <조선일보> 31면은 그런 김익주 역시 하루 16시간씩 노동하고 토굴과 다름없는 데서 잠자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고 말한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상황 변화가 있었다. 그는 가혹한 노동에서 '열외' 혜택을 받게 됐다. 위 <중앙일보>는 농장주가 그의 그림 실력에 매료돼 농장 건물에 벽화 그리기 등을 시켰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멕시코 생활에 좀 더 쉽게 적응하게 된 김익주는 뒤이어 사업 경영에서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1910년대에 멕시코 동해안을 따라 탐피코라는 해안도시로 북상했다. 몬테레이와 유카탄반도의 중간쯤인 곳이다. 이곳에서 빙수 가게를 운영하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한국식 정자 모양의 2층 식당을 지었다. 또 쿠바로도 가서 장사를 했다. 거기에는 인삼을 팔았다.

그렇게 축적한 인맥과 금전은 그와 그의 가족보다는 고국을 위해 더 많이 사용됐다. 머나먼 멕시코까지 가서 힘겹게 모은 자산들을 그렇게 사용하면서, 그의 이름이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공훈록>에 실리게 됐다.

이 책 제14권 김익주 편은 "1917년부터 대한인국민회 탐피코 지방의 파출(派出)위원과 지방회장을 역임하면서 수차에 걸쳐 대한인국민회와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으며 재(在)멕시코 동포들의 독립의식 고취에 앞장섰다"고 기술한다.

그의 독립운동자금 기부는 납세 형식으로 이뤄졌다. 위의 <중남미 한인의 역사>에는 그가 1923년에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부터 받은 소득세 영수증의 사진이 실려 있다. 일본 정부가 아닌 한민족 정부가 한민족이 납부하는 소득세의 정당한 수령자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린 일이었다.

본문에 인용된 기부 영수증. 사진 출처: <중남미 한인의 역사>
본문에 인용된 기부 영수증. 사진 출처: <중남미 한인의 역사>국사편찬위원회

자신의 인생을 고국의 독립을 위해 바친 사람

김도형 독립기념관 국외사적지팀장은 2019년 8월 13일 자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각종 명목으로 걷은 돈을 다 합치면, 멕시코의 한인들은 수입의 약 20% 이상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멕시코 교민들이 십일조가 아니라 '십이조'를 고국에 바친 셈이다. 국세청 같은 공권력이 없는데도 20% 이상을 고국에 바친 것은 그들의 고국 사랑이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증명한다.

김익주는 '납세' 방식에 그치지 않고, 사업 활동으로 바쁜 그 와중에도 독립운동 현장에 뛰어들었다.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025년 제124권에 수록된 역사학자 박환(고려학술문화재단 이사장)의 논문 '멕시코 한인 적십자 지도자 김익주'는 1919년 3·1운동 당시의 김익주가 항일투쟁 소식을 북중미에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기술한다. 이 논문에 따르면, 이토 게이치 주(駐)멕시코 일본임시대리공사가 외무성에 보낸 그해 10월 15일자 보고서에 이런 내용이 있다.

"1919년 3월 조선독립운동 개시 전후부터 매일 밤 자택에 조선인들을 모아서 집회를 하였다. (중략) 항상 미국의 조선인과 소통하고 미국에서 온 영문 소책자를 스페인어로 번역하였고, 번역은 김익주의 아들이나 개신교 목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익주는 한국에서 일본을 거쳐 미국에 유입되는 독립운동 뉴스를 재미교포들로부터 제공받아 멕시코 현지에 전파했다. 이런 일을 아들과 함께했으니, 고국 독립에 대한 열의가 얼마나 절절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김익주는 독립운동에 '완전히 미친' 사람이었다. 사업하면서 독립운동을 병행한 것만으로도, 독립운동에 미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집안의 기둥뿌리까지 뽑아내는 사람이었다.

그의 손자인 아벨 김공씨는 위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안창호 선생에게 돈을 드리고 나서 10년 후에도 또 다른 독립운동가의 다급한 지원 요청을 받고 재산을 처분해 돈을 보내드려 결국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빈털터리가 됐다고 할 정도로 재산 대부분이 독립운동단체와 독립운동가들에게 바쳐졌던 것이다.

1999년에 대한민국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익주에게 추서했다. 그해 8월 14일 자 <조선일보> 31면에 따르면, 당시의 국가보훈처는 김익주의 행적을 4개월간 추적한 끝에 훈장 추서를 결정했다. 이 기사는 그 조사 결과를 토대로 이렇게 보도했다.

"김 선생은 한국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인 1900년대 초 서울과 평양에서 반일 정치활동을 하다가 일본 군경에 쫓겨 부인과 제주도로 피신했다. 김씨 부부는 중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실패, 1905년 멕시코 유카탄행 배를 탔다."

그렇게 해서 한국을 떠난 김익주는 멕시코로 이민 가서 식당 사업으로 돈을 벌고, 그 돈과 더불어 자신 및 가족의 인생을 고국 사랑에 바쳤다. 이 때문에 빈털터리가 되다시피 했을 정도로 그는 이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꺼내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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