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렘> (베르나르 렌스, 1710년 / 리처드 뉴턴, 1794년)
퍼블릭 도메인
앞의 광인을 보면 손과 발이 쇠사슬로 묶여 있다. 광인으로 지목된 사람에게 쇠사슬을 채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광인들은 이 그림처럼 삭발을 당했다. 베들렘은 끔찍한 감금과 치료로 악명이 높았다. 치료 기록에 의하면 환자를 의자에 묶어 사슬에 매단 후 빠른 속도로 돌렸다. 회전 속도 증가, 급작스러운 정지와 반전이 반복되면 환자들은 배설물을 쏟아냈다.
리처드 뉴턴(1777~1798)의 <베들렘>은 환자들을 구경하는 관람객들을 보여준다. 한 환자는 변기를 모자처럼 쓰고 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상당수 정신병원은 귀족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환자들의 행동을 구경시켰다. 광인 수용소 구경은 상류층의 오락거리 중 하나였다. 관람객들이 손가락질하며 환자를 자극해서 놀리고, 작은 창을 던져 묶여 있는 환자의 발가락 사이를 맞추며 손재주를 뽐내기도 했다.
광기의 인정을 통한 공존과 자유
광기는 극소수 특별한 사람들만의 비정상적 현상일까? 혹시 본래 대다수 사람에게 내재해 있는, 어느 한 극단의 감정과 행위가 아닐까? 단지 워낙 거칠고 평소에는 마음속에 숨어 있어서 마치 외부의 무엇처럼 느끼는 게 아닐까?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이 <팡세>에서 언급한 다음 내용은 이러한 의문에 다가설 단서를 마련해준다.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미쳐 있다. 그래서 미치지 않은 것도 또 다른 형태의 광기라는 점에서 미친 것과 같다. (…) 인간의 이중성은 너무나 명백해서 우리에게 영혼이 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다. 단일한 주체라면 터무니없는 오만에서 끔찍한 절망으로 갑작스럽게 변화할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파스칼에 따르면 광기는 외부의 영향으로 소수의 특별한 사람에게 생겨난 이상 증상이 아니다. 본질상 모든 인간은 내부에 광기를 갖고 있다. 다만 발현되는 정도가 사람에 따라 다를 뿐이다. 광기라고 규정짓는 상태와 정상적 상태는 동전의 양면, 혹은 간발의 차이에 해당한다는 문제의식이다.
왜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 미쳤다는 것의 또 다른 형태일 수 있다고 할까? 자신이 완전히 이성적이고 정상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이성과 정상의 기준으로 삼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모든 상태를 비이성과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이성과 비이성, 정상과 비정상으로 분리하고 전자에 문명을 후자에 야만을 배치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스스로가 이성과 정상의 기준이라고 확신하는 쪽에서 다른 사람이나 지역을 박해하거나 침략하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중세 후반에 유럽을 휩쓴 마녀사냥, 2백 년에 걸친 참혹한 십자군 전쟁, 근대 이후 현대 초반까지 이어진 식민지 전쟁과 지배처럼 극단적·집단적인 광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성이 비이성을, 정상이 비정상을, 문명이 야만을 제거하고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문제는 이러한 사건들에서 나타나는 대규모적·폭발적인 광기다. 그러므로 "불행하게도 천사가 되려는 자가 짐승이 된다"라는 파스칼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자신이 완전히 이성적이고 정상이라는 사람이나 집단일수록 광기에 휩싸일 가능성이 대폭 증가한다.
영혼이 둘이 있다고 생각할 만큼 '인간의 이중성'을 인정할 때 인간 내부의 다양성을 받아들인다. 이성과 정념, 의식과 무의식 등 이질적인 요소를 정상과 비정상이 아니라 '다름'으로 이해하는 순간 포용이 생겨난다. 본래 상반된 특성을 가졌기에 내적인 싸움이 불가피하고, 그래서 파스칼은 "인간은 항상 분열되고 자기 자신을 거역한다"라고 한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주장한 다음 내용은 파스칼의 문제의식과 비슷하다.
"스위프트의 광기, 루소의 정신착란은 각자의 작품 속에 포함되어 있다. 마치 작품 자체가 작가에게 포함된 것처럼. 그들의 작품과 삶에서는 똑같은 폭력이 말하고 있고 똑같은 통렬함이 포함되어 있다. 확실히 양자 간에는 전망의 교환이 일어난다. (…) 니체와 고흐의 광기는 똑같이 근원적으로, 그러나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각 작품에 속해 있다."
푸코에 의하면 이성에 기초한 합리주의적 인간관을 넘어설 때 진정한 인간 이해가 가능하다. 인간은 이성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사유는 객관적이기보다는 스스로에 의해 언제나 휩쓸릴 수 있고, 비이성 요소에서 자신을 상기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몰이해의 장소다. 즉 사유는 신화나 무의식, 혹은 광기처럼 흔히 비사유'라고 말하는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다.
과연 고흐의 광기를 배제하고 그의 작품을 논할 수 있을까? 보다 근본적으로 광기 없이 그의 작품이 가능하기는 했을까?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느끼는 전율 안에는 이미 광기가 떼려야 뗄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광기가 예술작품에 도전하여 작품이 가진 상상의 지평을 환각이라는 병리학적 세계로 만들어 버리는 영역이 존재한다. 이를 통해 통념적 사고와 평균적 표현 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망을 열 수 있다.
광기와 관련하여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을 비롯한 타인의 광기와 자기 안에 숨겨져 왔던 광기를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사고, 더욱 현명한 삶을 실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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