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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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문득 다른 새 한 마리가 떠올랐다. 뻐꾸기다.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직접 품지 않고, 다른 새에게 자기 새끼를 키우게 한다. 뻐꾸기의 번식과 생존에 그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얄밉다면 얄미운 새다.
그리고 연이어 든 섬뜩한 생각 하나. 혹시 다른 사람들의 눈엔 내가 뻐꾸기로 보이는 건 아닐까?
네 자식 키우는 데 왜 우리의 둥지가 필요하냐는 시선. 나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허락된 제도를 쓰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간접적으로 피해를 본다고 느끼는 동료들의 눈에는, 내가 뻐꾸기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나는 물까치를 바라고 있었다. 함께 키우고, 함께 지키는 그 공동체를. 그런데 내가 바라는 모습과, 누군가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 사이의 간극이 생각보다 클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제대로 마주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에 다다른다. 공동육아는커녕, 최소한 민폐를 끼치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제도육아'라도 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이해받는 것도, 함께 무언가를 하는 것도 바라지 않게 된다. 그냥 조용히, 허락된 만큼만.
그 쓸쓸한 체념을 품은 채로 수목원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물까치를 다시 찾아봤다.
해설사 선생님 말대로였다. 물까치는 번식 쌍 외에 '도우미(helper)'가 육아에 참여하는 협력 번식 체계를 가진다. 관찰된 둥지의 절반 이상에서 도우미가 확인되었고, 이들은 먹이를 공급하고 포식자를 막는다. 놀라운 건 이 도우미들이 꼭 혈연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번식에 실패한 개체, 이웃 개체들까지 육아에 합류한다. 도우미가 많은 둥지일수록 새끼의 체중이 무겁고, 면역력도 높았다. 공동육아는 감성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 물까치의 도우미들도 결국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움직인다. 혈연이든 이웃이든, 함께 새끼를 키우는 것이 자신의 생존에도 유리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그 이해관계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한번 따져볼 일이다.
프랑스가 29년 걸린 일을 우리는 7년 4개월 만에 해냈다. 한강의 기적 이야기가 아니다.
고령사회에서 초고령사회로 이행하는 속도다. 2025년,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어서며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고령화 추세가 가파른 것으로 알려진 일본조차 10년이 걸렸고, 이탈리아 20년, 스페인 30년, 덴마크 42년이었다. 우리는 그 절반도 안 되는 시간에 같은 문턱을 넘었다.(인구전략위원회)
출산율은 2023년 0.72명으로 역대 최저를 찍은 뒤 2025년 0.80명(잠정)으로 2년 연속 반등했지만(국가데이터처, 출생·사망통계), 현재 인구 규모를 유지하기 위한 인구대체출산율(2.1명)에는 여전히 한참 못 미친다.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2025년 연금개혁으로 국민연금기금 소진 시점이 기존 2056년에서 2064년으로 8년 연장됐다. 여기에 기금투자수익률 목표를 높여 달성하면 최대 2071년까지 늘어나지만, 전문가들은 고갈을 막은 게 아니라 유예한 것이라고 말한다. 2052년이면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지금보다 약 870만 명 줄어 전체 인구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국가데이터처, 장래인구추계)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이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
밉상 VS 일상, 시선의 온도
▲ 우리가 모르는 미래세대가 낼 세금이 우리의 노후를 떠받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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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매달 내는 세금과 보험료는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의 혜택이 된다. 우리가 모르는 미래세대가 낼 세금이 우리의 노후를 떠받친다. 그 미래세대는 지금 누군가의 단축근무 덕분에 조금 더 안정된 시간 속에서 자라고 있을지 모른다. 누군가의 육아에 내가 신경 쓸 것도, 관여할 것도, 피해받을 것도 없다는 생각. 어쩌면 그게 더 무지한 게 아닐까.
우리가 물까치처럼 직접 먹이를 물어다 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옆 부서 사내부부의 단축근무를 흘겨보는 시선이, 워킹맘을 무리 밖으로 밀어내는 구조가, 결국 우리 모두의 미래를 좁히는 일과 이어져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수목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내가 처음 품었던 불편함은 제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나의 시선에 대한 문제였다. 직장 안에서는 죄책감을 느끼고, 직장 밖에서는 피해의식을 느끼면서, 정작 내가 놓치고 있었던 건 더 큰 그림이었다. 나 역시 그 시선을 받으며 살아온 워킹맘이었고, 동시에 누군가에게 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공동육아가 농경사회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생존 전략이라면, 그 첫걸음은 제도보다 먼저 시선을 바꾸는 일일지 모른다.
물까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한 마을이 새끼를 키운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마을은 혈연도 아니고, 같은 무리도 아니었다. 뻐꾸기가 되지 않으려면, 먼저 내가 물까치가 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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