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19일, 들것에 실린 환자를 옮기는 미국 평화봉사단원 팀 원버그(Tim Warnberg, 체크무늬 셔츠)와 광주 시민들. 전일빌딩에 있던 나경택 당시 <전남매일> 사진기자가 건너편 당시 광주관광호텔(현 무등빌딩)을 지나는 이들을 촬영했다.
나경택 제공
기씨가 그간 팀을 애타게 찾은 이유는 대학가 시위가 한창이던 1982년 어느 날 때문이다. "대통령은 곧 왕"이라고 배운 스무살 군인은 우연히 팀에게 1980년 5월 광주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부산 범어사로 답사를 가려던 팀은 기씨의 진해 자택에서 하루를 묵었고 다음날 함께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기씨는 나란히 앉은 팀에게 "사회가 너무 시끄럽다"고 운을 뗐다. 전두환 정권에서의 '땡전뉴스'만 듣고 믿었던 기씨는 슬며시 팀에게 "대학생들에게 데모 좀 그만하라고 전해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돌아온 팀의 말은 기씨로선 뜻밖이었다.
단호함과 부드러움 그 사이 어딘가의 말투로, 팀은 "데모할 만해서 한다"고 대답했다.
팀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본인이 목격한 5·18로 이어졌다. 1978년부터 평화봉사단원으로 광주에 머물던 팀은 5·18을 목격한 것을 넘어 계엄군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고 부상자를 들것에 실어 나르는 등 직접 항쟁에 참여했다. 고 위르겐 힌츠페터(2016년 작고) 등 여러 외신기자의 통역을 맡았고 그들과 인터뷰하기도 했으며 5·18 직후 본인이 수집한 자료를 동료에게 건네 북유럽 지역 외신 보도를 이끌기도 했다.
기씨는 당시 1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팀에게 들었던 이야기 덕분에
"스무 살짜리의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강조했다. "나 같은 군인에 의해 우리 국민이 희생됐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면서
그날 버스 안 팀 옆에서 펑펑 울었던 때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는 취재팀 앞에서 이 말을 하면서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는 연신 가슴을 치며 북받치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목이 멘 그는 44년 전 팀이 전했던 광주의 진실을 이렇게 더듬었다.
"팀은 '내 눈으로 봤다'고 했어요. '군인에 의해 죽고 다친 수많은 사람들을 내 눈으로 봤다'고 했죠. '어린 아이까지 군을 향한 적개심 때문에 군복 위에 침을 뱉고 지나갔다'는 이야기도 들려줬습니다. 그러면서 팀은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자행한 '의도된 일'이라고 했죠."

▲5·18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4일 전남대병원 옥상에서의 위르겐 힌츠페터(왼쪽 카메라를 든 인물)와 미국 평화봉사단원 팀 원버그(가운데 체크무늬 셔츠)의 모습. 그의 뒤편에 또다른 단원 폴 코트라이트와 데이비드 돌린저가 서 있다.
위르겐 힌츠페터, 5·18기념재단 제공
기씨는
"고립된 광주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다른 시민들은 <쇼쇼쇼>(당시 KBS 예능 프로그램)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는 점이 믿기지 않았다"며 "그때 군에서는 '폭도들을 제압했다'며 군인들에게 국난극복기장을 나눠줬다. 그런데 실상은 군인이 보호해야 할 대상인 자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눴다는 것이었고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팀의 이야기를 듣고 전두환 정권은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며
"그때부터 군사독재 정권을 물러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털어놨다.
"열이 뻗쳐 펑펑 울었다"는 기씨는 정작 그 이야기를 한 팀은 침착했다고 전했다. 기씨는 "사정이 어려워 중학교만 마치고 18살에 바로 입대했다. 오로지 먹고 사는 것에만 몰두했다"라며 "워낙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니 팀이 조금이라도 더 진실을 알려주고 싶어 (최대한 침착하게, 객관적으로) 말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팀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주변에 전파하던 사람이었다"며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광주의 진실에 대해 진솔하게 전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라고 강조했다.
팀과의 이 대화 이후로 "학교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기씨는 1985년 한남대 영어영문학과에 합격했고 군에서 제대했다. 그는 대여섯 살이 어린 동기들에게 "군대에서 충분히 교육받은 형이 왜 그렇게 나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학생운동에 앞장섰다.
졸업 이후 기씨는 여러 사람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 소방관이란 직업을 택했다. 그는 25년 간 수많은 이들을 구하고 소방장비 개발(2009년 전국소방장비개발대회 최우수상)에도 힘썼다.
기씨는 자신의 이러한 삶을 "팀의 영향"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하와이대 동문이 기억하는 팀...자랑스레 보여준 '첫 광주 논문'

▲1987년 하와이대학 한국학 학술지에 실린 팀 원버그의 논문의 원본. 2026. 03. 04.
이희훈
팀과 맺은 인연을 여전히 기억하는 이는 기씨뿐만이 아니었다. <내 이름은 원덕기> 제작 소식을 접한 오태훈(64, 전 한국관광대 교수)씨 역시 자신의 사연을 전해왔다. 그는 취재팀과의 지난 11일, 15일 전화통화에서 "평소 즐겨보던 <오마이뉴스>에서 오랜 인연인 '원덕기'에 관한 보도를 이어가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반가웠다"며 입을 뗐다.
오씨는 팀을 하와이대학 유학 시절 만났다. 팀은 5·18을 겪은 뒤 원래 목표했던 의사의 길 대신 한국학을 연구하기로 마음 먹고 1986년부터 하와이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오씨는 1년 앞서 같은 대학에 입학해 교육학 석사 과정 중이었다.
오씨는 팀이 자신이 1987년 쓴 논문(The Kwangju Uprisng: An Inside View)을 자주 거론했다고 떠올렸다. 그는
"(팀이) 광주항쟁에 관한 최초의 영어 논문일 것이라며 강한 자부심과 애정을 갖고 내게 보여주던 모습이 생생하다"며
"팀은 광주에서 자신이 무엇을 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광주에 있으며 5·18을 겪고 많은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고 설명했다. 더해 "(팀이) 역사적인 책임의식"을 갖고 이 논문을 썼다고 강조했다.
"팀이 '하와이로 오니 비로소 논문을 쓸 수 있었다'고 말했어요. '한국에 머무를 당시에는 광주에서의 일이 트라우마였기 때문에 글로 쓰려고 해도 쓸 수 없었다'고 했죠. 그 논문을 제게 보여주며 '썼다', '해냈다'고 말하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목격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인 책무를 '글로서 조금이나마 덜었다'고 말했고, 한국을 사랑하는 한 이방인으로서 '역사에 증언을 남긴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오씨는 팀을 "용감하고 물러서지 않는 성격"이라고 되새겼다. 또 기씨의 증언처럼 "외국 사람이 우리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전라도 사람이 우리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추억했다. 그러면서 "팀이 '광주 사람들과 섞여 한몸으로 울고 웃으며 산 게 광주 사투리를 완벽히 쓸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이야기했다"며
"그런 팀을 보면서 '우리 민족의 비극을 몸소 체험하며 완전히 한국 사람과 하나가 됐다'고 느꼈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일 줄 몰랐던 마지막

▲팀 원버그(왼쪽)과 오태훈씨. 1986년 하와이 호놀룰루 알리모아나 해변에서의 외국인 학생 환영 파티에서 찍은 사진.
오태훈 제공
오씨는 "팀이 세상을 떠나기 약 1년 전 우연히 그를 미국 하와이에서 마주했는데 그때가 마지막 만남이었다"며 "그때 제대로 이별하지 못한 게 아직도 슬프고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팀(지병을 앓던 팀은 치료차 잠시 고향 미네소타에 갔다가 다시 하와이로 옴 - 기자 말)이 비쩍 마른 모습으로 서핑 보드를 옆에 둔 채 트럭에 타 있는 모습을 봤다"며 "그 모습을 멀리서 봤지만 달려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탄식했다.
이어 "내가 겁이 많은 사람이라 너무나 아파보이는 모습에 주저했다"며 "팀 이름을 크게 부르며 달려갔다면 분명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악수나 포옹이라도 하고 헤어질 수 있었을 텐데... 그저 말 없이 멀리서 손만 흔든 게 마지막이었다"고 한참을 되뇌었다.
기창도씨 역시 1988년 대학 3학년 때 팀과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리며 아쉬움을 전했다.
기씨는 "인연은 인연"이라며 "한남대 영문과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편지로 부친 뒤 한동안 연락하지 못했는데 팀이 그걸 기억하고 나를 보러 학교로 찾아왔더라"라고 떠올렸다. 그는 "문과대로 향하는 길에서 영락없는 팀의 뒷모습을 보고 '팀!'이라고 소리쳤는데 그가 맞았다"라며 "그땐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 아닌가. 연락도 없이 찾아온 그를 내가 우연히 발견한 것도 참 신기했다"고 말했다.
기씨는 "그때 캠퍼스 커플이었던 지금의 아내까지 함께 점심으로 삼겹살을 먹었다. 그때 한참 대화를 나눈 게 마지막 만남이었다"며
"그때 한국인처럼 고추를 된장과 쌈장에 푹 찍어먹는 팀의 모습을 보고 아내도 깜짝 놀랐다"고 웃음을 내보였다.
"팀 덕분에 삶의 기준점을 잘 잡고 살 수 있었다, 고맙다"

▲미국 평화봉사단원 자격으로 1978년부터 광주에 머문 팀 원버그가 나주 호혜원(한센인 정착지)에서 의료 봉사를 하는 모습.
폴 코트라이트 제공
기씨는 "이후로도 팀을 게속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며 "취직하고 가정을 꾸린 후 삶이 안정되자마자 팀을 찾았는데 행적을 알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러다가 6년 전 팀의 사망 소식을 처음 알린 <오마이뉴스> 보도로 그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됐다"며 "아쉽고 안타까웠다"라고 말끝을 흐렸다.
(관련기사 : 계엄군 곤봉에 맞은 미국인, 그가 광주를 위해 남긴 선물 https://omn.kr/1nj2u)
기씨는 "(2017년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면서도 '팀은 이런 이야기를 더 많이 해줄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다"며
"팀이 이 땅에 살며 행한 그 많은 행적들이 묻힐 뻔 했는데 (<오마이뉴스>의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으로) 다시 깨어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전했다. 더해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만나는지가 참 중요한 것 같다. 아무리 짧은 만남이라도 이상하게 팀과 보낸 시간을 생각하면 눈물이 이렇게 솟구친다"며 앨범 속 팀의 사진을 한참 바라봤다.
"이것저것 보여주고 알려줬어요. 마치 진짜 형처럼... 참 순하고 착했어요. 지금 만약 팀이 제 앞에 있다면 그냥 '고맙다, 덕분에 삶의 기준점을 참 잘 잡고 살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전하고 싶어요."
▲기창도씨가 12일 오후 전북 완주의 자택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던 중 팀 원버그(Tim Warnberg, 한국 이름 원덕기)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소중한
| <내 이름은 원덕기> 제작을 위한 펀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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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소중한 취재 소중한·전선정·김화빈·이진민·유지영
촬영 강상우·이희훈 편집 콘텐츠팜 호미
CG 김수연 타이틀 김소설 음향 DMC 사운드 비전 내래이션 이승준
펀딩 기획 장유정·이기종·봉주영
영상 제공 5·18기념재단·루먼 형제(Ben&Sam Luhmann)
영상 번역 자문 로버트 그라찬
사진·자료 제공 고진석·나경택·서나래·유경남·변재원·안영주·록산 원버그 윌슨·데이비드 돌린저·폴 코트라이트·캐롤린 투르비필·케빈 페어뱅크스·로버트 그라찬·5·18기념재단·5·18민주화운동기록관·외교사료관·박지원 의원실
촬영 협조 5·18기념재단·5·18민주화운동기록관·전남대병원·전일빌딩245·국가보훈부·별밭·필로스팅하우스
제작 지원 광주광역시·광주광역시 동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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