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6월 11일 자 <경향신문> 기사 "혁명전후(1) 효창공원 - 선열묘소 밀어버린 독재정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효창공원을 체육시설로 탈바꿈시키려는 시도는 제1회 아시안컵 이전에도 있었다. 이승만이 망명한 지 13일 뒤에 발행된 1960년 6월 11일 자 <경향신문>은 "4년 전 5월 중순, 효창공원에는 실로 경천동지할 사건이 벌어졌다"라며 불도저 등이 효창공원에 출현한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군용 부루도자가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와 3의사(윤봉길·백정기·이봉창), 3열사(이동녕·차이석·조성환)의 묘소를 파헤칠 듯이 공원의 구릉을 밀어제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난데없이 군인들이 나타나서 도끼·톱·연장을 휘둘러 공원 일대의 아름드리 나무들을 마구 찍어냈다. 이어 며칠 후 서울시장은 청천벽력 같은 선언을 했다. '큰 운동장을 만들게 되어 효창공원의 선열묘지를 다른 데로 옮겨야겠다'는 것이었다."
<한국체육학회지> 2016년 제55권 제1호에 실린 이종성 한양대 교수의 논문 '1960년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개최와 효창운동장 건립'은 1956년 5월 1일의 위 사태와 관련해 "당시 계획은 효창공원 내에 근대적 설계로 육상경기장에 1만 평을 할애하고 관람소에 8천 평을 할당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묘역을 마구 밀어버리고 찍어내는 이 공사는 당연히 반발을 초래했다. 위 <경향신문>은 "여론은 발칵 들끓었고 만행에 반대하는 투쟁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위 논문은 "순국선열들의 유족을 비롯한 각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고 말한다.
논란이 국회로까지 번지며 반대 여론이 격해지자, 정부는 육상경기장 건설을 중단했다. 그러나 완전 포기는 아니었다. "효창공원 한복판에 작은 축구장을 만드는 계획으로 변경"됐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정부는 작은 축구장만 만들겠다며 여론 진화에 나섰다. 그랬다가 제2회 아시안컵을 1년 앞두고 국제급 축구장을 만들겠다며 태도를 바꿨던 것이다. 육상 경기장이든 축구장이든 효창공원을 대규모 스타디움으로 변모시키겠다는 집념이 대단했다.
효창공원은 '김구의 작품'이었다. 이곳을 독립운동가 묘역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그에게서 나왔다. 그는 <백범일지>에서 삼의사 묘지의 부지 선정과 관련해 "내가 친히 잡아 놓은 효창공원"이라는 표현을 썼다.
김구는 효창공원이라는 부지를 선정했을 뿐 아니라 누구를 안장할 것인가도 결정했다. 안중근의 가묘를 만들고 삼의사 안장지를 효창공원으로 정한 사람도 그였다.
1948년 8월 23일 자 <동아일보>는 이동녕·차이석의 묘소가 효창공원으로 결정된 과정을 설명하면서 "지난 19일 하오 4시 경교장에서 전체회의를 열고 사회장에 대한 준비와 절차를 토의"했다고 알려준다. 김구의 숙소에서 장례식에 관한 사안들이 논의됐다. 그해 10월 14일 자 <경향신문>은 조성환을 위한 봉안식이 효창공원에서 거행될 때 김구가 이승만과 함께 행사를 주관했다고 알려준다. 이처럼 효창공원은 '김구의 구역'이었다.
경쟁자 폄훼로 진행된 이승만 우상화

▲1956년 6월 3일 자 <경향신문> 사설 "선열묘소의 존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이승만은 그런 공간을 스포츠 시설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다. 김구와 독립운동가들을 폄훼하려는 의중이 없었다면 시도하기 힘든 일이었다. 당시 사람들도 그런 시선으로 바라봤다.
1956년 6월 3일 자 <경향신문>은 "단 하나의 종합운동장으로서 서울운동장에 대해서 협착을 느낀 바 이미 오래된 만큼, 새로운 운동장이 생긴다는 그 자체에 대하여서는 이의가 있을 리 없다"라며 "그러나 그러한 운동장의 후보지로서 하필 효창공원이 아니면 안 되었던가에 관해서는 석연치 못한 바 없지도 없다"고 비판했다.
무덤을 건드리는 일은 극히 조심스러운 일인데도 이승만 정권은 무덤을 건드리는 것도 모자라, 하필이면 독립운동가 묘역을 건드리려 했다. 이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승만의 불편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일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우남 이승만이 팔순이 되는 1955년부터 우상화를 본격화했다. 80세 생일을 8일 앞둔 그해 3월 18일에는 서울시가 우남기념회관(세종문화회관) 건립계획을 발표했고, '하필이면' 개천절인 그해 10월 3일에는 이승만 동상 기공식을 열었다. 우남기념회관 및 이승만 동상 건립 등이 이승만 본인을 띄우는 방법으로 진행된 이승만 우상화라면, 효창운동장 건설은 이승만의 경쟁자를 폄훼하는 방법으로 진행된 이승만 우상화였다.
제2회 아시안컵 개최를 빌미로 효창공원에 국제급 축구장을 건설하고 김구의 구역을 훼손한 이승만은 제2회 아시안컵 축구를 참관하지 못했다. 효창운동장은 그가 망명한 지 5개월 뒤인 1960년 10월 12일 개장했다. 이틀 뒤의 아시안컵 개막전에서 한국은 남베트남을 5-1로 대파했다.
이승만은 쫓겨났지만, 독립운동가 묘역은 상당한 훼손을 입었다. 위 논문은 "효창경기장 건설에 따라 선열 7명의 묘소 앞 연못이 메워졌고", 김구의 묘소에서 보면 경기장 스탠드가 시야를 방해하게 됐다고 기술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