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최근 출간한 책 <극우시대가 온다-햇볕정치와 공화적 민주시민교육>에서 보수와 진보의 고착된 경계를 해동하는 정치를 ‘햇볕정치’라고 불렀다.
한울아카데미
나는 최근 출간한 <극우시대가 온다 - 햇볕정치와 공화적 민주시민교육>에서 보수와 진보의 고착된 경계를 해동하는 정치를 '햇볕정치'라고 불렀다. 햇볕정치는 적에게 굴복하는 정치가 아니다. 상대를 악마화하는 방식만으로는 더 이상 사회를 통합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는 정치이다. 민주주의의 방향성을 유지하면서도 상대가 품고 있는 불안과 분노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햇볕정치의 출발점이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보수와 진보의 존재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그 경계가 너무 단단하게 굳어졌다는 데 있다. 경계가 고착될수록 작은 실수 하나가 거대한 정치적 반작용을 낳는다. 이번 선거는 바로 그러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변화한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역지사지형 성찰성'이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극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오류뿐 아니라 그들이 동원하는 감정의 구조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정치적 자기성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원칙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를 더욱 확장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적 감수성의 문제이다. 정의를 향한 방향성은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은 변화된 현실에 맞게 새롭게 성찰되어야 한다.
강고하게 얼어붙은 사회심리적 경계를 녹이고, 적대의 정치에서 설득의 정치로 한 걸음 나아가려는 노력.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민주진보세력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이며,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시대적 과제다. 물론 나는 현장에 있지 않기 때문에 햇볕정치적 시각과 방향이 구체적인 정치와 사회적 갈등의 맥락에서 어떻게 발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단정적으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할 수 없다. 단지 이런 새로운 시선과 상상력을 결합해서 정의를 향한 투쟁의 행진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기본적으로 민주진보 진영은 '정의(justice)'라는 가치 목표를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 상대를 제압하는 일종의 '돌진적 전투주의'를 주요한 방법론으로 삼아 투쟁해 왔다. 이러한 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필요조건으로서 유효하다.
그러나 변화된 현실의 맥락, 2030세대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감수성, 그리고 민주화의 '그늘'로 인해 형성된 사회적·정치적 '강퍅함'을 함께 고려한다면, 기존의 투쟁의 정치와 내가 말하는 햇볕정치적 실천을 사안에 따라 적절히 배합하는 유연한 복합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초당적 지지가 필요한 사안에서는 과감한 협치 전략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송파 사태와 같은 경우에는 젊은 세대의 참정권 요구를 그 자체로 진지하고 강력하게 수용하는 접근이 필요할 수 있다. 또한 '내로남불' 논란이 반복되는 사안에서는 스스로의 기득권 일부를 내려놓으면서까지 모두에게 적용될 공통의 규칙을 만드는 노력이 요구될 수 있다. 때로는 민주화세대가 기득권자의 위선처럼 보이는 사안에 대해서는, 민주화운동이 지녔던 자기희생의 정신을 되살리는 노무현식 접근법을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탱크데이'와 같은 사안에서는 국가 행정권력이 과도하게 개입하는 '과유불급'을 경계하고 절제하는 태도로 나타날 수도 있다(물론 나는 이른바 '87년 체제'의 사회경제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예컨대 고용, 주거 등을 둘러싼 더 근본적인 대안적 사회경제적 정책을 내는 문제는 당연히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정치 '양식'에 대해 집중한다).
결국 햇볕정치란 기존의 원칙과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시대적 조건 속에서 그것을 보완하고 확장하는 정치적 상상력이며 실천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고착된 경계를 해동(解凍)하는 전략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기존의 투쟁의 전략과 배합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선거는 우리에게 이러한 새로운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조희연 전 서울시 교육감
본인
필자 소개 : 조희연은 성공회대 교수 시절 정치사회학자로서 연구하며 민교협 의장, 비판사회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2014년부터 2024년까지 3선 서울시 교육감으로 재직하며 교육혁신 정책을 이끌었습니다. <투트랙민주주의>, <병든사회와 아픈 교육>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으며, 최근에는 10년간의 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와 교육의 혁신 방향을 제시하는 <극우시대가 온다>를 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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