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호균과 최동원대학시절 18이닝 완투맞대결의 맞수였고 국가대표팀에서는 절친한 선후배였던 임호균과 최동원이 1983년 어느 날 인천 도원야구장 앞에 세워진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 버스 앞에서 만나 포즈를 취했다. 둘은 이듬해 롯데 자이언츠에서 다시 만났고, 함께 부산 야구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임호균
두 차례의 노히트노런 경기가 그랬듯, 인천고는 임호균이 상대 타선을 완벽히 봉쇄할 때 한두 점을 내서 승리했고, 그래서 임호균이 등판할 수 없는 다음 경기에 대패하며 탈락하기를 반복했다. 임호균은 어떤 상대든 마음만 먹으면 완벽히 막아낼 수 있는 투수였지만, 결국 전국대회 우승컵을 만져보지 못한 채 고교 시절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어려웠던 가정 형편 때문에 곧바로 철도청으로 취업해 실업야구를 잠시 맛본 뒤, 뒤늦게 역시 신생팀으로 약체였던 동아대로 진학해, 그곳에서도 홀로 마운드를 지켜내는 고단한 처지를 이어갔다. 동아대 시절, 연세대와의 경기에서 두 살 아래 최동원과 18이닝 완투맞대결을 벌인 끝에 김봉연에게 1점 홈런을 맞으며 패전투수가 됐던 일은 대학야구사에 역사적인 명투수전으로 길이 남아 있다.
그래서 뒤늦게 진학한 대학을 마칠 무렵, 한국에도 프로야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지역연고제로 설계된 그 무대에서 인천팀에 속할 선수의 이름으로 많은 이들은 우선 '임호균'을 떠올린 다음, 한참 침묵에 잠기곤 했다. 그만큼 인천 야구의 침체는 길었고, 세상 사람들이 다 알 만한 인천 출신 선수의 이름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정작 임호균의 생각은 달랐다.
"사실, 프로에 갈 생각이 없었어. 프로에 가면 큰 돈을 벌 수 있다고는 하지만, 안정적인 게 아니잖아. 리그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고. 하지만 한전은 안정된 직장이잖아. 게다가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경력들을 인정받아서 계장으로 특진을 했는데, 한전 전체에서 최연소 계장이었단 말이야. 그래서 안 가겠다고 했는데…"
하지만 그는 인천야구의 황태자였고, 따라서 인천야구의 상왕, 태상왕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게 내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 박현식 감독님, 김진영 감독님, 또 인천야구 원로분들, 이런 어르신들이 '야 인마, 인천에 누가 있다고 니가 안 간다는 거야?' 하고 불호령을 내리시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거역하겠어?"
프로야구가 창설된 1982년, 그는 국가대표팀에 강제 차출되어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그사이 변변한 선발투수 한 명 없이 급조된 인천 연고의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설적인 연패의 기록들을 거듭 써 내려가며 꼴찌의 대명사가 되어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임호균은 대표팀에서 전천후 구원투수로 활약하며 최동원이, 또 김시진이 의외의 난조에 빠지는 위기마다 투입돼 불을 껐다. 4경기 15.1이닝 자책점 0. 그 대회의 '방어율왕' 타이틀이 그의 것이었다.
그래서 1983년, 그의 합류는 인천 팬들이 '올해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호언하는 가장 큰 이유였고, 실제로 해 삼미 슈퍼스타즈가 인천 앞바다의 돌고래처럼 솟구치며 우승경쟁에 뛰어들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물론 그보다도 더 거대한 변수 '장명부'의 상상하지도 못했던 위력이 한국야구를 강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 해 427.1이닝을 던져 30승을 거둔 장명부와 232.1이닝을 던져 12승을 올린 임호균, 두 명의 투수가 슈퍼스타즈를 이끌었다. 그리고 인천 야구는, 비록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그 해 가장 강했던 팀으로 기억되었다. 그래서 다음 해라면, '제2의 임호균'이라 불리던 최계훈이 합류하고 2년차를 맞는 인하대 시절 대학야구 최고의 강속구 투수였던 김상기가 제 실력을 회복하면 우승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꿈이 인천 팬들의 가슴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게 했다.
그런데 1983년 10월 27일, 임호균이 롯데로 간다는 뉴스가 터져 나왔다. 롯데의 선수 4명(권두조, 박정후, 김정수, 우경하)과의 맞트레이드였다. 인천 팬들이 모두 충격에 빠진 가운데,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임호균 자신이었다.
"실내연습장에서 운동을 하다가, TV로 봤어. 저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했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한 채 구단주에게 쫓아가는 그를, 김진영 감독이 따라나섰지만 차마 막아서지도 못한 사나운 기세였다. 그리고 팀을 위한 결정이라고만 둘러대는 구단주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일임을 깨달은 임호균은 소리쳤다.
"누가 정말 이 팀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누가 정말 이 팀에 필요한 사람이었는지 똑똑히 알게 해드리겠습니다."
결국 '인천 팬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임호균은, 특히 삼미를 만나면 이를 갈고 덤볐다. 이듬해 4월 11일, 부산에서 삼미전 선발투수로 나선 임호균은 2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친정 팀을 4연패의 늪으로 밀어 넣었고 다음 달인 5월 2일엔 인천 원정에서 이번에는 장명부를 상대로 연장 10회까지 완투한 끝에 다시 한 번 4대 2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인천야구장 귀빈석에 앉아 있던 삼미그룹 김현철 회장 앞으로 달려가 자신의 가슴을 쾅쾅 쳤다. 그러게, 내가 뭐랬냐는 듯이. 그해 임호균은 삼미전에서만 3번의 완투승을 거두었다.
트레이드, 그 쓰라린 역사

▲임호균 트레이드임호균의 트레이드를 다룬 당시의 신문 기사. 임호균이 '당장 야구를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라고 토로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1983년 10월 28일자 경향신문)
경향신문
임호균은 그해 최동원과 함께 롯데를 왕좌로 이끌었다. 하지만 삼미 슈퍼스타즈는 거짓말처럼 2년 전으로 돌아가 꼴찌로 전락했고, 믿었던 장명부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삼미 타선을 초토화시킨 끝에 우승컵을 안고 웃는 임호균을 바라보는, 인천팬의 마음은 복잡했다.
임호균 이전에도 한국 프로야구에서 다섯 번의 트레이드가 있었다. 1982년 시즌 중 스타군단 삼성에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던 서정환이 직접 조르고 졸라 해태로 건너간 것이 첫 번째 사례였고, 1983년에도 삼성의 정구왕이 삼미로 갔고, MBC의 정영기와 롯데의 차동렬이 자리를 바꾸었으며 해태의 김우근과 신태중이 역시 삼미로 갔다. 하지만 그 네 번의 사례는 모두 각 팀에서 주전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을, 선수가 부족한 팀으로 보내 활용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각 구단에게는 물론이고 선수들 본인에게도, 팬들에게도 아쉬울 것이 없는 이벤트였다.
하지만 임호균에게 일어난 일은 달랐다. 그는 팀의 핵심전력이었고, 그 이전에 팀이 근거한 연고지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는 고향팀과 운명을 함께할 각오가 되어 있었고, 팬들 역시 그 사실에 대한 조금의 이견도 의심도 없었다. 그런 그가 들어내지고, 옮겨져, 오히려 서로 칼끝을 겨누게 되는 현실은 아직 그 모든 이들의 상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것이었다.
인천의 야구팬들에게 임호균이란, 어느 한 시절 자신들을 대표하고 상징하고 꿈과 희망을 주었던 가물가물한 추억 속의 이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이젠 잊어버린 기억 속 깊은 곳에선, 프로야구에서 어느 팀 어느 선수를 응원한다는 것은 나른한 낭만과 차가운 현실을 오가며 꿈꾸고 각성하고 질주하되 어느 순간 멈춰 서야만 하는 현실임을 깨달은, 서글펐던 한 순간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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