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15 11:57최종 업데이트 26.06.15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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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의 위치에 박스를 놓아 정확한 스트라이크 존을 만든 다음, 직구와 슬라이더, 싱커의 위치에 불붙인 담배를 한 개비씩 세워두었다. 마운드에 선 임호균은 침착한 눈빛으로 담배를 응시했고 차례차례, 바깥쪽과 가운데, 몸 안쪽의 순으로 공을 던졌다. 샤악, 위익, 스윽. 놀랍게도 침을 발라 세워둔 담배는 쓰러지지 않고, 끄트머리 담뱃불만 모두 꺼져 있었다."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임호균이라는 투수를 묘사하는 대목이다. 인천의 오랜 야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일종의 도시전설에 소설가가 약간 덧칠을 한 문장, 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사자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엉뚱한 질문을 마주한 임호균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나도 얘기를 들었어. 소설엔 그렇게까지는 안 쓴 것 같은데, 옛날에 인천에서는 별 이야기가 다 있었어. 누가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걸 내가 공을 던져서 불만 껐다는 얘기도 있었고. 또 성냥을 세워놓고 공을 던져서 불을 붙였다는 얘기도 있었고. 사실은 뭐 … 불까지 붙인 건 아니고, 선배들이 해보라니까 하긴 했었지. 허허."

"예? 그럼 실제로 해보긴 하셨어요? 담배 맞히기를요?"

"선배들이, 홈 플레이트 위에 양쪽 끝에 담배를 세워놓고 맞혀보라고 해서 해본 적이 있어. 뭐 그건 장난이었지만, 연습으로 비슷하게 하기도 했지. 홈 플레이트 위에 가로로 나란히 공을 올려놓으면 6개가 들어가는데, 양쪽 끝에 반 개씩 걸쳐놓으면 7개가 되지. 그렇게 세워놓고 마운드에서 공을 던져서 한쪽 끝부터 차례로 맞혀서 쳐내는 거야. 그렇게 스트라이크 존을 익히는 연습을 했지."

인천야구의 상징 임호균인천야구의 적자였지만 부산야구의 우승 청부사 역할을 했던 임호균은, 훗날 인천으로 돌아와 다시 73개의 공만 던져 경기를 끝내는 최소투구수 완봉승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임호균

제구의 달인

1974년 8월 2일. 부산에서 열린 화랑기 고교야구대회 8강전에서 인천고가 휘문고를 1대 0으로 누르고 승리했다. 그날 인천고 투수는 볼넷 하나를 내주었을 뿐 단 하나의 안타도 맞지 않았다. 그리고 10월 4일에는 대구에서 열린 국회의장배 고교야구대회 준결승에서 대구상고를 상대로 인천고는 다시 한번 1대 0의 승리를 거두었고, 그날도 투수가 볼넷 두 개만을 내주고 27명의 타자를 잡아낸 덕이었다. 두 달 사이에 작성된 두 번의 노히트노런. 그것도 당대 최강팀 휘문고와 대구상고를 상대로 한 완벽투. 그 주인공이 바로 임호균이었다.

"밤에, 혼자 눈을 감고 공을 던지는 연습을 많이 했어.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스트라이크존을 그리고, 그중에서도 내가 공을 넣고 싶은 지점을 떠올리면서 공을 던졌어. 처음에는 말도 안 되게 빗나갔지만, 계속하다 보니 스트라이크존의 경계가 그려지더라고.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마음먹은 대로 그 경계선상에 넣을 수 있게 됐지."

임호균이 던지는 경기에서 중반이 넘어갈 때쯤, 심판은 자신이 설정한 스트라이크존이 지나치게 넓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하곤 했다. 임호균은 심판이 설정한 경계선상을 끊임없이 공략하며 확인하고, 또 모호한 경계를 조금씩 잡아 늘렸기 때문이다.

"중반쯤 되면, 더그아웃으로 들어갈 때 주심이 슬쩍 다가와서 그래. '야 이 녀석아, 그만 좀 해라' 라고. 자기 눈을 그만 좀 현혹시키라는 얘기였지."

1950년대는 인천야구의 전성기였다. 인천고와 동산고가 맞붙는 경인지역예선은 전국대회 본선보다도 경쟁이 치열했고, 그 관문을 뚫은 학교가 가볍게 전국대회 우승컵을 챙기곤 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짙은 암흑기가 시작됐고, 전국대회 4강에 진입하는 것도 쉽지 않은 세월이 이어졌다. 중국과의 교역로가 막힌 인천이 국제항으로서의 매력을 잃으며 경제적으로 뒷걸음질 치게 된 것과 동시에 간간이 발굴되는 유망주들도 전철로 연결되어 하나의 생활권으로 통합된 서울로 유출되곤 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서울의 학교들이 야구에서도 중심적 지위를 확고히 했고, 섬유산업 등을 중심으로 한 경제성장과 정치적 배경을 등에 업고 급성장하던 대구 지역의 학교들이 다른 한 축을 형성했다.

하지만 야구협회의 고위직들과 실업 및 고교팀의 지도자들은 상당수가 과거 전성기에 인천이 배출한 인물들이었고, 그들에게 선배들의 명성을 이어가지 못하는 후배들은 늘 안타깝고 아쉬운 존재였다. 그런 마당에 인천에서 전국적인 수준의 투수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말하자면 자손이 없어 대가 끊어질 위기에 처했던 명문대가에 태어난 옥동자의 울음소리와도 같았다.

쇠락한 야구도시, 인천의 옥동자

임호균과 최동원대학시절 18이닝 완투맞대결의 맞수였고 국가대표팀에서는 절친한 선후배였던 임호균과 최동원이 1983년 어느 날 인천 도원야구장 앞에 세워진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 버스 앞에서 만나 포즈를 취했다. 둘은 이듬해 롯데 자이언츠에서 다시 만났고, 함께 부산 야구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임호균

두 차례의 노히트노런 경기가 그랬듯, 인천고는 임호균이 상대 타선을 완벽히 봉쇄할 때 한두 점을 내서 승리했고, 그래서 임호균이 등판할 수 없는 다음 경기에 대패하며 탈락하기를 반복했다. 임호균은 어떤 상대든 마음만 먹으면 완벽히 막아낼 수 있는 투수였지만, 결국 전국대회 우승컵을 만져보지 못한 채 고교 시절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어려웠던 가정 형편 때문에 곧바로 철도청으로 취업해 실업야구를 잠시 맛본 뒤, 뒤늦게 역시 신생팀으로 약체였던 동아대로 진학해, 그곳에서도 홀로 마운드를 지켜내는 고단한 처지를 이어갔다. 동아대 시절, 연세대와의 경기에서 두 살 아래 최동원과 18이닝 완투맞대결을 벌인 끝에 김봉연에게 1점 홈런을 맞으며 패전투수가 됐던 일은 대학야구사에 역사적인 명투수전으로 길이 남아 있다.

그래서 뒤늦게 진학한 대학을 마칠 무렵, 한국에도 프로야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지역연고제로 설계된 그 무대에서 인천팀에 속할 선수의 이름으로 많은 이들은 우선 '임호균'을 떠올린 다음, 한참 침묵에 잠기곤 했다. 그만큼 인천 야구의 침체는 길었고, 세상 사람들이 다 알 만한 인천 출신 선수의 이름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정작 임호균의 생각은 달랐다.

"사실, 프로에 갈 생각이 없었어. 프로에 가면 큰 돈을 벌 수 있다고는 하지만, 안정적인 게 아니잖아. 리그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고. 하지만 한전은 안정된 직장이잖아. 게다가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경력들을 인정받아서 계장으로 특진을 했는데, 한전 전체에서 최연소 계장이었단 말이야. 그래서 안 가겠다고 했는데…"

하지만 그는 인천야구의 황태자였고, 따라서 인천야구의 상왕, 태상왕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게 내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 박현식 감독님, 김진영 감독님, 또 인천야구 원로분들, 이런 어르신들이 '야 인마, 인천에 누가 있다고 니가 안 간다는 거야?' 하고 불호령을 내리시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거역하겠어?"

프로야구가 창설된 1982년, 그는 국가대표팀에 강제 차출되어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그사이 변변한 선발투수 한 명 없이 급조된 인천 연고의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설적인 연패의 기록들을 거듭 써 내려가며 꼴찌의 대명사가 되어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임호균은 대표팀에서 전천후 구원투수로 활약하며 최동원이, 또 김시진이 의외의 난조에 빠지는 위기마다 투입돼 불을 껐다. 4경기 15.1이닝 자책점 0. 그 대회의 '방어율왕' 타이틀이 그의 것이었다.

그래서 1983년, 그의 합류는 인천 팬들이 '올해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호언하는 가장 큰 이유였고, 실제로 해 삼미 슈퍼스타즈가 인천 앞바다의 돌고래처럼 솟구치며 우승경쟁에 뛰어들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물론 그보다도 더 거대한 변수 '장명부'의 상상하지도 못했던 위력이 한국야구를 강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 해 427.1이닝을 던져 30승을 거둔 장명부와 232.1이닝을 던져 12승을 올린 임호균, 두 명의 투수가 슈퍼스타즈를 이끌었다. 그리고 인천 야구는, 비록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그 해 가장 강했던 팀으로 기억되었다. 그래서 다음 해라면, '제2의 임호균'이라 불리던 최계훈이 합류하고 2년차를 맞는 인하대 시절 대학야구 최고의 강속구 투수였던 김상기가 제 실력을 회복하면 우승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꿈이 인천 팬들의 가슴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게 했다.

그런데 1983년 10월 27일, 임호균이 롯데로 간다는 뉴스가 터져 나왔다. 롯데의 선수 4명(권두조, 박정후, 김정수, 우경하)과의 맞트레이드였다. 인천 팬들이 모두 충격에 빠진 가운데,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임호균 자신이었다.

"실내연습장에서 운동을 하다가, TV로 봤어. 저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했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한 채 구단주에게 쫓아가는 그를, 김진영 감독이 따라나섰지만 차마 막아서지도 못한 사나운 기세였다. 그리고 팀을 위한 결정이라고만 둘러대는 구단주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일임을 깨달은 임호균은 소리쳤다.

"누가 정말 이 팀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누가 정말 이 팀에 필요한 사람이었는지 똑똑히 알게 해드리겠습니다."

결국 '인천 팬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임호균은, 특히 삼미를 만나면 이를 갈고 덤볐다. 이듬해 4월 11일, 부산에서 삼미전 선발투수로 나선 임호균은 2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친정 팀을 4연패의 늪으로 밀어 넣었고 다음 달인 5월 2일엔 인천 원정에서 이번에는 장명부를 상대로 연장 10회까지 완투한 끝에 다시 한 번 4대 2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인천야구장 귀빈석에 앉아 있던 삼미그룹 김현철 회장 앞으로 달려가 자신의 가슴을 쾅쾅 쳤다. 그러게, 내가 뭐랬냐는 듯이. 그해 임호균은 삼미전에서만 3번의 완투승을 거두었다.

트레이드, 그 쓰라린 역사

임호균 트레이드임호균의 트레이드를 다룬 당시의 신문 기사. 임호균이 '당장 야구를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라고 토로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1983년 10월 28일자 경향신문)경향신문

임호균은 그해 최동원과 함께 롯데를 왕좌로 이끌었다. 하지만 삼미 슈퍼스타즈는 거짓말처럼 2년 전으로 돌아가 꼴찌로 전락했고, 믿었던 장명부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삼미 타선을 초토화시킨 끝에 우승컵을 안고 웃는 임호균을 바라보는, 인천팬의 마음은 복잡했다.

임호균 이전에도 한국 프로야구에서 다섯 번의 트레이드가 있었다. 1982년 시즌 중 스타군단 삼성에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던 서정환이 직접 조르고 졸라 해태로 건너간 것이 첫 번째 사례였고, 1983년에도 삼성의 정구왕이 삼미로 갔고, MBC의 정영기와 롯데의 차동렬이 자리를 바꾸었으며 해태의 김우근과 신태중이 역시 삼미로 갔다. 하지만 그 네 번의 사례는 모두 각 팀에서 주전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을, 선수가 부족한 팀으로 보내 활용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각 구단에게는 물론이고 선수들 본인에게도, 팬들에게도 아쉬울 것이 없는 이벤트였다.

하지만 임호균에게 일어난 일은 달랐다. 그는 팀의 핵심전력이었고, 그 이전에 팀이 근거한 연고지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는 고향팀과 운명을 함께할 각오가 되어 있었고, 팬들 역시 그 사실에 대한 조금의 이견도 의심도 없었다. 그런 그가 들어내지고, 옮겨져, 오히려 서로 칼끝을 겨누게 되는 현실은 아직 그 모든 이들의 상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것이었다.

인천의 야구팬들에게 임호균이란, 어느 한 시절 자신들을 대표하고 상징하고 꿈과 희망을 주었던 가물가물한 추억 속의 이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이젠 잊어버린 기억 속 깊은 곳에선, 프로야구에서 어느 팀 어느 선수를 응원한다는 것은 나른한 낭만과 차가운 현실을 오가며 꿈꾸고 각성하고 질주하되 어느 순간 멈춰 서야만 하는 현실임을 깨달은, 서글펐던 한 순간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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