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 계봉우 지사계봉우 지사는 국권 회복에 몸을 바친 독립운동가이자 우리 역사와 국어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국가보훈부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역사학자가 여럿 있다. 신채호와 박은식이 대표적이고 정인보, 김준엽, 장도빈 등도 들 수 있다. 주시경,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이병기, 이극로, 김두봉 등 국어학자도 적지 않다. 우리 역사를 바로 보고 널리 알리는 일과 우리말을 지키는 일이 국권을 회복하는 투쟁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계봉우(桂奉瑀)는 국사와 국어 두 분야에서 모두 빼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것도 망명과 강제이주로 4개국을 전전하며 이뤄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우리에게 알려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분단과 냉전으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모국과 단절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글 저작물에는 발음하기 쉽도록 성을 '게'라고 썼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의 묘비에도 '게봉우'라고 새겨져 있었다. '북쪽의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으로 북우(北愚)를 호로 삼았는데, 한글로는 뒤바보라고 했다. 사방자(四方子), 단선(檀仙)이라는 필명도 사용했고 하근(河瑾)이란 성명을 쓰기도 했다.
'시일야방성대곡' 읽고 구국운동 결심
계봉우는 1880년 8월 1일 함경도 영흥(현 함경남도 금야군)에서 태어났다. 관노 집안인 데다 희성(稀姓)이어서 가계는 물론 아버지 이름조차 전하지 않는다. 어머니도 장씨라는 것만 알려져 있다. 집안 형편은 어려웠으나 외아들을 공부시키려는 부모의 일념 덕분에 7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고 사립 양사학교와 낙인중학교를 졸업했다.
1887년 여동생에 이어 1891년 아버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어머니는 아들을 뒷바라지하느라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1894년 과거제가 폐지되자 계봉우는 서당 공부를 중단했다. 동학에 입교하는가 하면 정감록에 빠져 도인을 찾아나서기도 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비판한 장지연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읽고 구국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의 자서전 '꿈속의 꿈'에는 당시에 쓴 시 "살아도 구차히 살면 사는 것이 또한 욕이요, 마땅히 죽을 때에 죽는 것이 오히려 영광이로다"가 실려 있다. 다만 "나는 20세기 초 낙후된 봉건적 조선에는 일본 식민 압제에 저항할 실질적 힘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라면서 "전면적 무장투쟁을 촉구하는 어떠한 호소도 모험이었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1906년 10월 김정규·권영호 등과 함께 고향에 홍명학교를 설립해 한문, 역사, 지리 등을 가르치다가 1909년 함흥의 영생중학교 교사로 옮겨갔다. 1907년에는 이동휘의 권유로 대한자강회와 서북학회에 가입하고 비밀결사 신민회에서도 활동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계봉우는 12월 북간도로 망명했다. 이듬해 연길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 소영자(小營子)에 이동휘가 세운 길동기독학당(일명 광성학교)에서 조선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다. 애국계몽단체 청년친목회, 대동협신회 등과 항일비밀결사 광복단에도 가입했다. 월간지 '대진'의 책임 주필을 겸하며 '우리의 원수를 잊지 말자'는 뜻의 '오수불망(吾讐不忘)'을 비롯해 '조선역사', '신한독립사' 등 역사 교과서를 집필했다.
1912년에는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갔다. 권업회에 참여해 권업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안중근 동생 안정근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만고의사(萬古義士) 안중근전'을 신문에 연재했다. 1913년 이상설과 이동휘 등이 조직한 대한광복군 정부 책임비서로도 활약했다.

▲권업신문에 연재한 안중근 전기계봉우 지사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던 권업신문에 1914년 6월 28일부터 10여 회에 걸쳐 단선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한 ‘만고의사 안중근전’.
독립기념관
1919년 경찰 감시 따돌리고 두 번째 망명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 압력을 받은 러시아 정부는 한인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추방령과 체포령을 내렸다. 이동휘와 함께 북간도 왕청현(汪淸縣)으로 대피했다가 1916년 11월 일본 형사들에게 체포돼 국내로 압송됐다. 인천 영종도에서 1년간 유배된 뒤 3년간 영흥을 떠나지 못하는 처분을 받았다.
연금 기간에도 '최신동국사'를 펴낸 데 이어 3·1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1919년 3월 3일 고종의 인산(因山·국장)에 맞춰 거사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 신학교 입학 수속을 핑계로 2월 27일 서울로 올라왔다. 3·1운동 2차 시위 책임자인 강기덕의 부탁을 받고 선언서 초안을 작성해 건네준 뒤 3월 3일 인산을 보고 평양을 거쳐 귀향했다.
그해 8월 경찰의 감시를 따돌리고 러시아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철혈광복단 단장으로 추대됐으나 북간도를 대표하는 상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돼 상해로 떠났다.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 '아령실기(俄領實記)', '김알렉산드라 소전(小傳)', '의병전' 등을 기고했다.
1920년 계봉우는 김립의 권유로 이동휘가 이끄는 한인사회당에 입당했다. 한인사회당은 한인공산당을 거쳐 고려공산당으로 개편됐다. 그는 기관지 '자유종' 주필로 활동하다가 원동(遠東)공화국 수도 치타로 파견됐다.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원동부 산하 한인부 위원으로 선출되고 출판부장으로도 임명돼 노동신문을 발간했다.
당시 고려공산당은 러시아 한인 2세가 주축인 이르쿠츠크파와 민족주의 계열의 상해파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었다.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는 일국일당 원칙을 내세워 이르쿠츠크파에 힘을 실어주고 상해파를 탄압했다. 1921년 5월 계봉우도 반혁명분자로 몰려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홍범도 계봉우 기념관홍범도 장군과 계봉우 지사 묘소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홍범도 계봉우 기념관 외관(왼쪽)과 전시실 내부.
국가보훈부
자유시 참변 겪고 교육과 연구에만 몰두
한 달 뒤 볼셰비키군을 등에 업은 이르쿠츠크파가 상해파 부대를 무장해제하는 과정에서 독립군 수천 명이 희생되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이르쿠츠크파는 비판의 화살을 받아 궁지에 몰렸다. 상해파의 이동휘가 모스크바까지 가서 항의한 덕분에 계봉우도 석방됐다. 이때부터 그는 이념 대결이나 정치 투쟁에서 발을 빼고 교육과 연구·저술에만 몰두했다.
조선인 청년회 잡지 '새 사람' 주필로 일하면서 소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고 아동들을 위한 조선어 교과서를 집필했다. '신찬주신사'도 펴냈는데, 신채호처럼 조선을 주신이라고 표기한 것이 눈길을 끈다. 오성묵과 함께 무신(無信) 동맹을 조직해 한글신문 '선봉'에 반종교 운동과 관련한 글을 기고하는가 하면 '과학의 원수', '고려인의 구력(舊曆)과 명절의 미신'을 집필하기도 했다.
연해주 고려인을 위한 문법서 '고려문전' 감수 작업에도 참여해 저자 오창환과 논쟁을 벌였다. 계봉우는 ▲자음과 모음이란 명칭 대신 초성·중성·종성이라고 부를 것 ▲'ㅂ' 받침이 '우'로 변하는 것을 불규칙동사나 불규칙형용사로 규정할 것 ▲초성 'ㅇ'과 종성 'ㆁ'을 구별해 쓸 것 ▲'놀애(노래)', '달이(다리)', '남우(나무)'처럼 어근의 형태를 밝혀 적을 것 등을 주장했다.
1937년 10월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17만여 명에 이르는 연해주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됐다. 그에 앞서 지도자 2500여 명을 간첩 혐의로 처형했다. 계봉우는 이를 예견이라도 한 듯 동지들과 연락을 끊고 이들과 찍은 사진까지 없애며 시골학교 교사로 눈에 띄지 않게 지낸 덕분에 처형은 면했지만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6500㎞ 떨어진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가야 했다.
크질오르다에서 한글신문 '레닌기치' 편집진을 교육하고 훗날 저명한 러시아 한국학자가 되는 박미하일도 가르쳤다. 그는 고려인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동학당 폭동', '조선역사', '꿈속의 꿈', '조선말의 되어진 법', '조선문법', '이두집해', '조선문학사' 등의 역작을 쏟아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가운데 독립군 대장 출신의 홍범도가 무(武)의 상징적 존재라면 계봉우는 문(文)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만했다.
계봉우는 마르크스 엥겔스의 유물사관과 계급투쟁론을 따르면서도 서양 중심의 기계적인 시대 구분을 거부했다. 공산사회의 원형으로 간주하는 원시사회를 별도 편으로 구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삼국시대를 고대 노예제 사회가 아닌 조기 봉건제 사회로 봤다. 식민지 시기도 이식자본주의 시대로 설명하는 대신 반일 투쟁 중심으로 서술했다.
그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를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일신라 시기도 발해를 우리 역사에 넣어 남북국 시대라고 명명했다. 통일신라와 조선에서 일어난 민란을 별도 항목으로 나눠 농민운동 관점에서 상세히 다뤘으며, 동학농민운동도 농민전쟁이자 사회혁명으로 인식했다.
고국 떠난 지 100년 만에 유골함에 담겨 귀향

▲카자흐스탄에 안장돼 있던 독립유공자 계봉우 지사의 유해가 2019년 4월 22일 오전 서울공항에 도착, 공군2호기에서 운구되고 있다. 계봉우 지사는 함경남도 영흥 출신으로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북간도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고, 독립신문에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뒤에도 민족교육에 전념해 '조선문법', '조선역사' 등을 집필, 정부로부터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연합뉴스
계봉우는 1959년 7월 5일 세상을 떠나 홍범도 장군 묘소가 있는 크질오르다 공동묘지에 묻혔다. 올해로 67주기를 맞는다. 강제이주 이후의 행적과 저작은 철의 장막에 가려져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잊혀갔다.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방) 정책, 한소 수교, 소련 해체, 한국-카자흐스탄 수교를 거치며 양국 간 교류가 이뤄지고 연구도 진행됐다.
1993년 4월 1일 자 동아일보 기사는 그를 "오늘날 러시아 한인 사회의 원로급 인사들을 거의 길러내기도 한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라고 소개한 뒤 "사방자 또는 뒤바보란 필명으로 독립신문에 연재한 주인공을 두고 그동안 박은식이라는 설이 유력했으나 자서전을 통해 계봉우였음이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그의 저술이 공개되면서 독립운동사의 빈칸 중 일부가 메워지고 몇 가지 수수께끼도 풀렸다. 국어학과 국사학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김영삼 정부는 1995년 8월 광복 50주년을 맞아 계봉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때 이동휘, 박차정, 신언진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처음 서훈됐다. 계봉우의 4남 계학림 씨도 모국을 방문해 훈장을 대신 받고 그동안 보관하고 있던 부친의 육필 원고 등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2019년 4월 21일 카자흐스탄 누르술탄 국제공항에서는 문재인 대통령 주관으로 계봉우·황운정 지사와 부인 김야간·장해금 여사의 유해 봉환식이 열렸다. 4위의 유해는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 2호기에 실려 이튿날 고국으로 돌아온 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계봉우가 고국을 떠난 지 100년, 카자흐스탄에서 타계한 지 60년 만이었다.
▲유해 봉환식 주관하는 문재인 대통령2019년 4월 21일 문재인 대통령이 카자흐스탄 누르술탄 국제공항에서 계봉우·황운정 지사 부부의 유해 봉환식을 주관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에 묻혀 있던 독립유공자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는 것도, 대통령이 해외 애국지사 유해 봉환식을 주관한 것도 처음이었다.
연합뉴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