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16 06:48최종 업데이트 26.06.16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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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도서관을 여행합니다. 도서관 노동자가 낯선 도시에서 발견한 도서관의 매력, 그 안에 깃든 웃음과 감동, 삶의 온기를 캐리어에 차곡차곡 담았습니다. 책과 사람을 잇는 여행이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기자말]
나이가 들수록 외모나 목소리는 친정엄마를 닮아가지만, 구부정한 어깨와 술 취향 만큼은 아버지를 닮아간다. 우리 부녀에게는 와인부터 막걸리까지 주종을 가리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끔 저녁 반찬이 근사한 안주로 변신하는 날이면, 한 잔 하자는 아버지의 제안이 나는 무척 반갑다. 새파랗던 시절에는 감히 나눌 수 없었던, 시시콜콜하고 정겨운 이야기들이 부녀의 술잔 사이를 다정하게 오가기 때문이다.

백 번을 들어도 가슴 뭉클한 이야기

바야흐로 호국 보훈의 달, 6월이다. 친정엄마의 손맛이 담긴 도토리묵 무침이 저녁 밥상에 오른 날, 막걸리 한 병을 나눠 마시며 우리 가족의 6.25전쟁 피난사를 다시 들었다. 백 번 쯤 들은 이야기, 그러나 백 번을 들어도 매번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이야기였다.


그 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언제나 같다. 1951년 5월 27일, 할머니가 둘째 고모를 낳은 날이다. 만삭이었던 할머니는 피난 온 다음 날, 천호동 산등성이에서 둘째 고모를 낳았다. 곧 돌아가리라 믿었기에 이불 홑청 하나만 급하게 뜯어 들고 국군이 내어 준 군용 덤프 트럭에 올랐다. 피난 물품의 전부였던 그 홑청이 전쟁 속에서 태어난 아기의 배냇 이불이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먹먹한 기억 때문이었을까. 6월이 되면 꼭 가보리라 마음먹은 도서관이 있었다. 서울시 용산구 전쟁기념관 안에 있는 '6.25전쟁 아카이브센터(KWAC) 도서자료실'이다. 시원한 통창 너머로 남산뷰가 펼쳐진다는 그곳에서, 잠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지난 5일, 마침내 전쟁기념관으로 향했다. 유독 좋은 날씨 덕분이었을까, 모처럼 여행의 동행자가 있어서였을까. 마음이 헬륨 풍선처럼 가볍게 떠올랐다.

그러나 전쟁기념관 입구에 도착해 드넓은 광장에 우뚝 선 '형제의 상'과 마주하는 순간, 풍선 같던 마음은 순식간에 레고 블록처럼 납작해졌다. 6.25전쟁 당시 국군과 북한군으로 갈라져 전투 중 극적으로 재회했다는 형제의 실화. 서로를 부둥켜안은 그 비극적인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잊고 있던 전쟁의 처참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통창 너머로 펼쳐진 초록빛 남산 풍경

전쟁기념관 도서자료실통창뷰가 아름다운 도서관이인자

묵직한 여운과 묘한 긴장감을 안고, 도서자료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전투기 모형 너머로 'LIBRARY 도서자료실'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낮은 서가 덕분인지 멀리서도 통창 너머의 초록빛이 한눈에 들어왔다. 과연 남산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빨라졌다.

다행히 남산뷰를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에 짐을 풀 수 있었다. 여행지에서 숙소 체크인을 마치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대자로 누워 버렸을 때처럼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제 천천히 이 낯선 공간을 둘러볼 시간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공중에 매달린 알파벳 'K·W·A·C·O'였다. 이곳은 우리가 흔히 아는 한국십진분류법(KDC)으로 서가를 구성한 도서관이 아니었다. 6.25전쟁(K), 세계의기록(W), 세월의 기록(A), 교양(C), 어린이도서(O)라는 독자적인 주제별로 공간을 구분하고 있었다. 특히 6.25전쟁 서가에는 국내외 참전국에서 수집한 귀한 자료들이 빼곡했다. 이곳의 특별함은 초록빛 통창뷰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가슴 아픈 전쟁의 기록을 한데 모아둔 '아카이브'라는 본질에 있음을 명확하게 느끼게 했다.

일반도서와 진중문고이인자

서가를 거닐다 '진중문고'라는 낯선 단어를 발견했다. 순간, '충일', '승리', '화랑' 같은 군인아파트 이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찾아보니 군부대에 보급되는 도서를 뜻했다. 일반 도서보다 작은 판형도 눈길을 끌었다. 군용 배낭에 넣고 다니기 쉽게 만든 책이라고 했다. 스마트폰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대지만, 어딘가에서 이 작은 책을 펼쳐 읽는 장병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치킨 쿠폰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서가의 '질서'를 보며 떠오른 것

이곳이 전쟁기념관의 도서자료실이라는 사실은 서가의 정렬 상태만 봐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뒤늦은 나이에 도서관 일을 시작하면서 내가 가장 애를 먹었던 것은 다름 아닌 '서가의 질서'였다. 어느덧 6년 차에 접어들고 보니 이제는 딸아이 문제집을 사러 서점에 가서도 책등을 나란히 맞추고 싶어 손이 근질거린다. 도서관 노동자의 숨길 수 없는 직업병이다.

그런 내 눈에 비친 이곳의 서가는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지금까지 다녀본 수많은 도서관 중 책들의 정렬이 가장 질서 정연했다. 마치 국군의 날 행사에서 칼군무를 선보이는 군인들의 일사불란한 행렬을 보는 듯했다.

한쪽에 마련된 계단식 어린이 도서 코너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친절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런데 정작 시선을 강탈한 것은 책이 아니라 빨간색 글씨로 적힌 '성인 취침 금지'라는 안내문이었다. 도서관에서 잠든 어른들이 얼마나 많으면 이런 문구까지 붙였을까.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놓친 공간은 없는지 이리저리 둘러보며 자리로 오는데, 파란색 소파에 앉아 슬그머니 졸고 있는 외국인 여성이 보였다. 취침은 금지할 수 있어도 밀려오는 졸음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문득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머릿속에 한 단어가 선명하게 스쳤다.

'평화(Peace).'

참혹했던 전쟁의 기록과 안온한 평화가 공존하는 곳

6.25전쟁 서가전쟁의 참혹함이 기록된 아카이브이인자

아무런 위협도, 격동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안락한 현재는 가끔 달콤한 잠을 불러온다. 불안은 결코 잠을 부르지 않는 법이니까. 저 외국인에게 전쟁기념관의 이 공간은 타지에서의 긴장을 내려놓고 잠시 단잠을 청해도 좋을 평화의 공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전투기 모형을 볼 때면 전쟁이라는 서늘한 공포가 밀려 오다가도, 서가의 책들을 바라보면 어느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과거의 참혹했던 전쟁과 현재의 안온한 평화를 한 공간 안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내가 발견한 전쟁기념관 도서자료실의 가장 큰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통창뷰구름 멍 때리고 있는 중이인자

다시 통창 앞 의자에 앉아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 창밖의 남산뷰는 언뜻 정지된 화면 같지만, 부지런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 지금, 이 순간도 멈춤 없이 재생되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 흐르는 시간 위로, 천호동 산등성이에서 이불 홑청을 깔고 둘째 고모를 낳아야 했던 할머니의 시간을 헤아려 본다. 비록 이곳의 거대한 'K(6·25전쟁)' 서가에 기록되진 않아도, 할머니가 사랑하던 큰 손녀의 아카이브에 온전히 저장되어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전쟁기념관 도서자료실을 나서는 길, 한 무리의 군인들 뒤로 견학 온 유치원생 몇 명이 신기한 듯 졸랑졸랑 뒤따른다. 초저녁, 늙으신 아버지의 술잔과 내 술잔이 다정하게 부딪치며 채워지던 그 따사로운 순간처럼, 더없이 평화로운 감정이 목젖으로, 늑골 정중앙 3cm 아래로, 그리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아늑하게 스며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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