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도서와 진중문고
이인자
서가를 거닐다 '진중문고'라는 낯선 단어를 발견했다. 순간, '충일', '승리', '화랑' 같은 군인아파트 이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찾아보니 군부대에 보급되는 도서를 뜻했다. 일반 도서보다 작은 판형도 눈길을 끌었다. 군용 배낭에 넣고 다니기 쉽게 만든 책이라고 했다. 스마트폰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대지만, 어딘가에서 이 작은 책을 펼쳐 읽는 장병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치킨 쿠폰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서가의 '질서'를 보며 떠오른 것
이곳이 전쟁기념관의 도서자료실이라는 사실은 서가의 정렬 상태만 봐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뒤늦은 나이에 도서관 일을 시작하면서 내가 가장 애를 먹었던 것은 다름 아닌 '서가의 질서'였다. 어느덧 6년 차에 접어들고 보니 이제는 딸아이 문제집을 사러 서점에 가서도 책등을 나란히 맞추고 싶어 손이 근질거린다. 도서관 노동자의 숨길 수 없는 직업병이다.
그런 내 눈에 비친 이곳의 서가는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지금까지 다녀본 수많은 도서관 중 책들의 정렬이 가장 질서 정연했다. 마치 국군의 날 행사에서 칼군무를 선보이는 군인들의 일사불란한 행렬을 보는 듯했다.
한쪽에 마련된 계단식 어린이 도서 코너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친절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런데 정작 시선을 강탈한 것은 책이 아니라 빨간색 글씨로 적힌 '성인 취침 금지'라는 안내문이었다. 도서관에서 잠든 어른들이 얼마나 많으면 이런 문구까지 붙였을까.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놓친 공간은 없는지 이리저리 둘러보며 자리로 오는데, 파란색 소파에 앉아 슬그머니 졸고 있는 외국인 여성이 보였다. 취침은 금지할 수 있어도 밀려오는 졸음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문득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머릿속에 한 단어가 선명하게 스쳤다.
'평화(Peace).'
참혹했던 전쟁의 기록과 안온한 평화가 공존하는 곳
▲6.25전쟁 서가전쟁의 참혹함이 기록된 아카이브
이인자
아무런 위협도, 격동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안락한 현재는 가끔 달콤한 잠을 불러온다. 불안은 결코 잠을 부르지 않는 법이니까. 저 외국인에게 전쟁기념관의 이 공간은 타지에서의 긴장을 내려놓고 잠시 단잠을 청해도 좋을 평화의 공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전투기 모형을 볼 때면 전쟁이라는 서늘한 공포가 밀려 오다가도, 서가의 책들을 바라보면 어느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과거의 참혹했던 전쟁과 현재의 안온한 평화를 한 공간 안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내가 발견한 전쟁기념관 도서자료실의 가장 큰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통창뷰구름 멍 때리고 있는 중
이인자
다시 통창 앞 의자에 앉아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 창밖의 남산뷰는 언뜻 정지된 화면 같지만, 부지런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 지금, 이 순간도 멈춤 없이 재생되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 흐르는 시간 위로, 천호동 산등성이에서 이불 홑청을 깔고 둘째 고모를 낳아야 했던 할머니의 시간을 헤아려 본다. 비록 이곳의 거대한 'K(6·25전쟁)' 서가에 기록되진 않아도, 할머니가 사랑하던 큰 손녀의 아카이브에 온전히 저장되어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전쟁기념관 도서자료실을 나서는 길, 한 무리의 군인들 뒤로 견학 온 유치원생 몇 명이 신기한 듯 졸랑졸랑 뒤따른다. 초저녁, 늙으신 아버지의 술잔과 내 술잔이 다정하게 부딪치며 채워지던 그 따사로운 순간처럼, 더없이 평화로운 감정이 목젖으로, 늑골 정중앙 3cm 아래로, 그리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아늑하게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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