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17 11:19최종 업데이트 26.06.17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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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엘로 클라우디아(Baelo Claudia) 유적지 바로 옆에 자리한 오테로 볼로니아(Otero Bolonia) 레스토랑. 고대 로마시대 가룸(Garum)과 염장 생선을 생산하던 수산 발효 유적지 와 바로 맞닿아 있다(왼쪽). / 오테로 볼로니아(Otero Bolonia) 레스토랑에서 맛본 생선구이. 올리브오일과 허브, 레몬, 굵은 소금이 어우러진 전형적인 카디스(Cadiz) 해안의 맛이었다. 그러나 바엘로 클라우디아가 한때 로마 가룸(Garum) 산업의 중심지였음에도, 오늘날 이 식탁에서 액젓의 흔적은 쉽게 찾기 어려웠다. 고대의 발효 소스는 유적으로 남았고, 현대 스페인의 식탁은 생선 발효의 감칠맛보다 올리브 오일과 소금, 레몬의 산뜻한 맛에 더 가까워져 있었다(오른쪽).
바엘로 클라우디아(Baelo Claudia) 유적지 바로 옆에 자리한 오테로 볼로니아(Otero Bolonia) 레스토랑. 고대 로마시대 가룸(Garum)과 염장 생선을 생산하던 수산 발효 유적지 와 바로 맞닿아 있다(왼쪽). / 오테로 볼로니아(Otero Bolonia) 레스토랑에서 맛본 생선구이. 올리브오일과 허브, 레몬, 굵은 소금이 어우러진 전형적인 카디스(Cadiz) 해안의 맛이었다. 그러나 바엘로 클라우디아가 한때 로마 가룸(Garum) 산업의 중심지였음에도, 오늘날 이 식탁에서 액젓의 흔적은 쉽게 찾기 어려웠다. 고대의 발효 소스는 유적으로 남았고, 현대 스페인의 식탁은 생선 발효의 감칠맛보다 올리브 오일과 소금, 레몬의 산뜻한 맛에 더 가까워져 있었다(오른쪽).이찬재

바엘로 클라우디아(Baelo Claudia)의 붉게 파괴된 석조 수조(케타리아에)를 본 뒤, 유적지 바로 옆 오테로 볼로니아(Otero Bolonia) 레스토랑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신선한 해산물과 전통 카디스(Cádiz)식 요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메뉴로 꽤 알려진 맛집이었다. 하지만 레스토랑 어느 메뉴에도 액젓을 사용한 음식은 보이지 않았다.

대서양과 지중해라는 두 거대한 바다를 끼고, 페니키아 이래 해상 교역과 어업의 전통을 품고, 로마 시대에는 대규모 염장 생선과 가룸 생산지로 번성했던 스페인이 왜 오늘날의 일상 밥상에서는 요리에 액젓을 거의 쓰지 않는 것일까.


한국의 어느 유적지라면, 온갖 역사적 사실을 들먹이며 '통영 이순신 장군 밥상', '영월 단종이 드시던 수랏상'처럼 관련 메뉴를 개발해 관광객에게 내놓을 법도 하지만, 정작 바엘로 클라우디아 유적 옆 식당의 메뉴에서는 2,000년 전 가룸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한국의 김치나 국물 요리에서 액젓이 차지하는 절대적인 위상을 생각할 때, 2000년 전 로마 세계의 식탁을 움직였던 생선 발효 소스가 오늘날 스페인 일상식에서 희미해진 사실은 기이하기까지 했다.

그 해답의 첫 번째 단추는 고대 로마의 가룸 산업은 상당 부분 제국의 물류망과 대규모 소비시장에 기대고 있었다는 점이다. 타리파의 공장들은 인근 어촌 마을의 생존을 위해 소규모로 액젓을 담그던 곳이 아니었다. 이들은 지역 소비만이 아니라, 제국의 주요 도시와 로마 군대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소비망을 배경으로 염장 생선과 가룸을 생산하던 대규모 산업시설에 가까웠다.

5세기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의 이동과 내분으로 몰락하면서, 지중해의 원재료 공급망 관리(Supply Chain Management) 능력과 대규모 산업·무역망은 점차 약화됐다. 로마 제국 시대에 가룸 산업이 유지될 수 있었던 기반 중 하나는 바로 소금의 안정적인 공급망이었다.

로마 제국의 도로망과 항구, 해상 치안, 광역 시장은 소금과 어류, 완제품의 이동을 가능하게 했다. 이를 통해 스페인 남부와 북아프리카의 대규모 가룸 공장들은 안정적으로 소금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이후 상황은 급격히 달라졌다. 군대와 대도시를 포함한 대규모 소비망이 약화되면서 수요 기반도 흔들렸다.

제국의 행정 체계와 도로망, 해상 치안이 무너지면서 지중해 무역 네트워크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제국의 해상 통제력이 사라지고 지중해에 해적이 창궐하면서, 이베리아반도의 변방인 카디스에서 이탈리아 본토까지 무거운 암포라를 운반하는 장거리 물류는 이전보다 위험하고 비용이 큰 일이 됐기 때문이다.

엄청난 소금과 어류, 암포라, 해상 운송, 소비시장을 결합해야 하는 가룸 산업은 제국 질서가 약화될수록 경제성을 잃어갔다. 거대 수출 시장을 잃고 고립된 바엘로 클라우디아의 대형 가룸 공장들은 지진과 도시의 쇠퇴, 제국 질서의 변화 속에서 더 이상 예전의 규모를 유지하지 못했고, 결국 유적으로 남았다. 가룸은 단순히 입맛이 바뀌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제국이 유지하던 물류·소금·무역·행정 시스템의 약화와 함께 쇠퇴한 식문화였다고 볼 수 있다.

피에 대한 금기와 달라진 식문화: 가룸은 어떻게 변했나

'피와 내장에 대한 금기와 달라진 식문화: 가룸은 어떻게 변했나'를 정리한 인포그래픽. 로마 제국의 물류망과 생산시설 붕괴, 기독교화와 이슬람 문화 확산 이후 피와 내장에 대한 인식 변화가 고대 로마식 가룸(Garum)의 쇠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준다. 반면 한국과 동남아시아에서는 통생선을 소금에 절여 장기간 발효시키는 액젓 문화가 이어졌고, 유럽에서는 안초비·콜라투라 등 일부 형태로 생선 발효의 기억이 남았다. 결국 액젓의 운명은 단순한 조미료의 변화가 아니라, 종교와 기후, 보존 기술, 자연을 바라보는 세계관의 차이에서 갈라졌음을 설명한다.
'피와 내장에 대한 금기와 달라진 식문화: 가룸은 어떻게 변했나'를 정리한 인포그래픽. 로마 제국의 물류망과 생산시설 붕괴, 기독교화와 이슬람 문화 확산 이후 피와 내장에 대한 인식 변화가 고대 로마식 가룸(Garum)의 쇠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준다. 반면 한국과 동남아시아에서는 통생선을 소금에 절여 장기간 발효시키는 액젓 문화가 이어졌고, 유럽에서는 안초비·콜라투라 등 일부 형태로 생선 발효의 기억이 남았다. 결국 액젓의 운명은 단순한 조미료의 변화가 아니라, 종교와 기후, 보존 기술, 자연을 바라보는 세계관의 차이에서 갈라졌음을 설명한다.이찬재

시스템의 붕괴로 치명상을 입은 스페인의 액젓 산업을 퇴화시킨 것은, 이후 밀어닥친 두 번의 거대한 종교적·문화적 격변이었다. 첫 번째는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였다. 고대 로마 엘리트 귀족들이 열광했던 최상급 가룸은 생선의 피와 내장을 이용해 삭힌 검붉은 고급 생선소스인 '하이마티온(haimation), 혹은 가룸 소치오룸(Garum sociorum)'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 잡으면서, 유대-기독교 전통의 동물이나 생선의 피 섭취 금기(Blood prohibition)는 생선의 피와 내장을 이용한 진한 가룸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8세기 초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한 이슬람 무어인들의 등장으로 이베리아반도에 이슬람 문화가 깊이 자리 잡으면서, 피와 내장에 대한 종교적·위생적 인식도 고대 로마식 가룸이 주류 식문화로 이어지는 데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이슬람 세력은 711년 이후 이베리아반도에 진출했고, 남부 안달루시아에는 1492년 그라나다 함락까지 이슬람 문화의 깊은 흔적이 남았다.

이슬람 식문화의 핵심은 율법에 따라 허용된 것만 먹는 '할랄(Halal)' 체계다. 이슬람 율법은 동물의 피를 섭취하는 것을 금지(Haram)한다. 고대 로마식 액젓은 필연적으로 멸치나 참치를 내장과 피째로 야외 수조에 쏟아붓고 삭히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이슬람 문화의 피와 내장, 야외 발효 냄새에 대한 종교적·위생적 인식은 고대 로마식 가룸이 중세 이베리아의 주류 식문화로 이어지는 데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로 인해 피와 내장을 강조한 진한 가룸보다, 더 맑고 옅은 염지액이나 리쿠아멘 계열로 바뀌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생선 내장의 자가분해효소가 배제되면서 생선 살과 기름이 녹아드는 정도와 단백질 함량이 떨어지고, 결국 감칠맛 대신 짠맛이 주를 이루는 형태로 변질되었다.

결국 이러한 종교적 금기와 거부감은 제국 붕괴에 따른 물류망 와해와 맞물려,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가룸이라는 화려한 '수산 발효 문화'가 약해지고 일부 지역의 파편화된 명맥(이탈리아 콜라투라 등)으로만 남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인간의 기억은 세대를 거치면 잊히기 마련이다. 80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지나면서, 한때의 제조 기술과 맛의 기억은 점차 희미해졌을 것이다. 스페인 사람들의 미식 DNA에서 가룸의 맛이 지워지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세월이었다.

반면,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전통 액젓 문화에서는 작은 생선을 통째로 소금에 절여 장기간 발효시키는 방식이 발달했다. 한반도에서는 생선의 살뿐만 아니라 내장까지 함께 발효시켜, 오랜 시간 동안 생선 내장 안의 미생물과 자가분해효소의 작용으로 생선 살과 기름이 자연스럽게 녹아내려 발효하도록 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피와 부패를 금기시하기보다는, 발효를 자연의 순환과 변화의 과정으로 이해했다. 전통 액젓 문화는 단순한 조미 기술을 넘어, 종교와 기후, 보존 기술, 그리고 세계관의 차이가 빚어낸 음식 문화의 한 형태로 발전했다.

무거운 암포라를 밀어낸 가루 향신료: 대항해시대의 물류 혁명

바엘로 클라우디아(Baelo Claudia) 유적지 전경. 석조 광장과 열주 뒤로 지브롤터 해협과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이 도시는 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염장하고 가룸(Garum)을 만들어 로마 제국 곳곳으로 보냈던 해양 교역 도시였다. 폐허가 된 도시와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이곳의 번영이 결국 바다와 소금, 발효의 시간 위에 세워졌음을 보여준다(왼쪽). / 바엘로 클라우디아(Baelo Claudia) 유적지에 남아 있는 고대 로마 도시의 중심 공간. 기둥과 석조 건축물, 조각상이 남아 있는 이곳은 단순한 수산 발효 공장을 넘어, 신전과 광장, 주거지와 상업시설을 갖춘 로마식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뒤편의 산과 흐린 하늘, 폐허가 된 석주들은 한때 가룸(Garum)과 염장 생선 산업으로 번성했던 도시의 시간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오른쪽).
바엘로 클라우디아(Baelo Claudia) 유적지 전경. 석조 광장과 열주 뒤로 지브롤터 해협과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이 도시는 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염장하고 가룸(Garum)을 만들어 로마 제국 곳곳으로 보냈던 해양 교역 도시였다. 폐허가 된 도시와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이곳의 번영이 결국 바다와 소금, 발효의 시간 위에 세워졌음을 보여준다(왼쪽). / 바엘로 클라우디아(Baelo Claudia) 유적지에 남아 있는 고대 로마 도시의 중심 공간. 기둥과 석조 건축물, 조각상이 남아 있는 이곳은 단순한 수산 발효 공장을 넘어, 신전과 광장, 주거지와 상업시설을 갖춘 로마식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뒤편의 산과 흐린 하늘, 폐허가 된 석주들은 한때 가룸(Garum)과 염장 생선 산업으로 번성했던 도시의 시간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오른쪽).이한기

스페인 중세사의 중요한 축은 레콩키스타, 즉 국토 회복 운동이었다.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던 이베리아반도를 북쪽의 가톨릭 왕국들이 800년에 걸쳐 되찾아 간 과정이었다. 그 긴 역사는 1492년 스페인 남부 도시 그라나다 함락으로 끝났다.

그라나다는 프란시스코 타레가의 기타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배경이 된 도시이기도 하다. 가룸이 사라진 뒤, 15세기 이후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스페인 식탁은 또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 가룸이 사라진 뒤, 15세기 이후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스페인 식탁은 또 다른 조미 문화로 이동했다.

또한, 고대 지중해 무역의 대표 포장재였던 암포라는, 변화한 장거리 유통 조건 속에서 가루 향신료에 비해 액체 소스를 담기에는 무겁고 취급이 까다로운 방식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라나다 함락 직후 출항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이후 16세기 스페인에는 아메리카 원산의 고추가 들어왔고, 훗날 피멘톤(Pimentón)이라는 향신료로 자리 잡았다.

이미 중세부터 유럽 식탁에 들어와 있던 후추와 사프란에 더해, 신대륙에서 건너온 고추까지 가세하면서 스페인 조미 문화는 새로운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 가루 향신료들은 가룸의 한계를 단번에 넘어섰다. 가루 향신료는 바짝 말려 자루나 가죽 주머니에 담으면 그만이었고, 액체 소스보다 가볍고 부피가 작으며, 장거리 운송과 보관이 훨씬 쉬웠다. 한 척의 무역선에 실을 수 있는 경제적 부가가치가 무거운 액젓 항아리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특히 붉은 파프리카 가루인 '피멘톤'의 보급은 스페인 염장육과 소시지 문화에 색과 향을 부여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었다. 이 변화는 훗날 피멘톤의 색과 향을 품은 스페인의 국민 소시지인 초리조(Chorizo) 문화로 이어졌다.

유통 혁명은 스페인 사람들의 미식 취향마저 바꾸어 놓았다. 스페인 식문화는 수개월 동안 소금 속에서 은근하게 단백질을 녹여내야만 얻을 수 있었던 가룸의 깊고 그윽한 '삭힌 감칠맛'에서, 입안을 즉각적이고 화려하게 타격하는 후추의 스파이시함과 피멘톤의 직관적인 훈연 향(Smoky Flavor)과 색채에 익숙해졌다.

시스템이 만든 단절(스페인) vs. 대를 잇는 무형의 성벽(한국 가내 발효)

송연실 진아에프앤씨 대표가 바엘로 클라우디아(Baelo Claudia)의 어류 염장·발효 수조를 가리키며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2,000년 전 로마인들이 가룸(Garum)을 만들던 석조 수조 너머로 지브롤터 해협과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바다에서 잡은 생선, 소금, 햇볕과 시간이 한데 모여 제국의 식탁을 움직인 감칠맛을 만들어냈던 현장이다(왼쪽). / 바엘로 클라우디아(Baelo Claudia) 유적지에 남아 있는 로마 시대 어류 염장·발효 수조 모습. 바다와 맞닿은 이 공간에서 로마인들은 생선과 소금을 층층이 넣어 가룸(Garum)과 염장 생선을 만들었다. 여러 개의 석조 수조가 질서 있게 배치된 모습은 이곳의 수산 발효가 단순한 가내 제조가 아니라, 도시 산업으로 운영됐음을 보여준다(오른쪽).
송연실 진아에프앤씨 대표가 바엘로 클라우디아(Baelo Claudia)의 어류 염장·발효 수조를 가리키며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2,000년 전 로마인들이 가룸(Garum)을 만들던 석조 수조 너머로 지브롤터 해협과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바다에서 잡은 생선, 소금, 햇볕과 시간이 한데 모여 제국의 식탁을 움직인 감칠맛을 만들어냈던 현장이다(왼쪽). / 바엘로 클라우디아(Baelo Claudia) 유적지에 남아 있는 로마 시대 어류 염장·발효 수조 모습. 바다와 맞닿은 이 공간에서 로마인들은 생선과 소금을 층층이 넣어 가룸(Garum)과 염장 생선을 만들었다. 여러 개의 석조 수조가 질서 있게 배치된 모습은 이곳의 수산 발효가 단순한 가내 제조가 아니라, 도시 산업으로 운영됐음을 보여준다(오른쪽).이찬재

레스칼라 엠푸리에스(Empúries)에서부터 지브롤터 해협의 바엘로 클라우디아로 이어진 1300km 거리의 고대 발효 여정은 우리에게 질문 하나를 남겼다. 왜 거대한 로마의 발효 산업은 흔적만 남기고 증발해 버렸는데, 동쪽 끝 작은 반도 국가 한국의 장(醬)과 액젓 문화는 숱한 전란 속에서도 수천 년을 끄떡없이 버텨냈는가?

스페인 액젓의 실종은 산업화가 지닌 태생적 한계이자 부작용이었다. 고대 로마의 가룸은 국가의 유통망과 원료 수급망과 소비처가 보장된 가운데, 자본과 산업이 주도한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어머니가 딸에게, 할머니가 며느리에게 손맛으로 전수하는 '공동체의 기억'이 아니었기에, 제국이 몰락하고 거대 공장이 사라지는 순간 그 기술도 유적지의 모래바람과 함께 실종을 맞이했다.

반면 한국의 발효는 산업화가 아닌 각 가정이라는 미시적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가내 발효' 시스템이었다. 수많은 왕조가 교체되고 전란으로 나라가 불타오르는 재앙 속에서도, 전국의 깊은 산골짜기와 여염집 장독대에서는 씨간장과 젓갈이 조용히 익어가고 있었다. 발효의 기술과 레시피가 특정 대기업의 독점 자산이 아니라 민초들의 항아리 속에 무한히 '분산 백업(Backup)'되어 있었기에, 그 어떤 역사적 풍파도 한국인의 끈질긴 감칠맛 유전자를 끝내 지워내지 못했다.

유적지를 나서며 고개를 돌려 볼로니아 해변의 영원한 상징, 30미터 높이의 거대한 황금빛 모래 사구 '두나 데 볼로니아'를 바라보았다. 거친 레반테 바람이 매일같이 형태를 바꾸어 놓는 저 거대한 자연의 모래 장벽 아래로, 한때 제국의 경제를 뒤흔들었던 붉은 벽돌의 발효 공장 터가 적막하게 엎드려 있다.

인간이 만든 거대한 발효 산업 시스템은 대자연과 역사의 격랑 앞에서 한 조각 허망한 폐허로 부서져 내렸다. 하지만 투박한 옹기 항아리를 조용히 품고,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수천 년의 시간을 오롯이 삭혀낸 한국 어머니들의 성벽은 여전히 굳건하다. 화려한 산업화를 넘어선 진정한 '시간의 발효'가 나아가야 할 길의 무게가 비로소 묵직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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