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성악 앙상블한중일 성악가가 한국 가곡을 함께 부르고 인사하고 있다. 다시 보기 힘든 장면.
BAMF; NA
서로의 소리를 듣는 순간 비로소 하나의 음악이 완성된다는 진리를 전달하는 무대였고 각자의 목소리만 크게 내지르는 오늘의 세계에 던지는 날카로운 메시지였다. 아시아를 하나의 획일적인 색채로 묶지 않고, 각 나라의 역사와 언어, 리듬이 무대 위에서 만나고 겹치게 만든 이번 기획은, 이 음악제가 문화 교류나 민속 행사를 넘어 고도의 예술적 철학 위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소극장을 채운 독일 관객들은 낯선 몽골의 전통 배음 창법 '흐미(Khoomei)'와 한국 가야금과 장구의 여백에 숨을 죽였고, 공연이 끝난 뒤에는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베를린 일간지 <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와 <타츠>도 이 축제를 주목했고 찬사를 보냈다. 독일-이탈리아 문화 잡지 <비비자르 ViviSaar>에서도 "조화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특집 기사를 내고 "지평을 넓히는 밤이었다"고 평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음악 애호가들의 지평을 넓히는 밤을 마련하기 위해 공연장의 대관료부터 피아노 임차비, 인쇄물 제작비, 그리고 현지의 값비싼 촬영 허가 비용까지 공공의 지원 없이 기획사의 비용으로 고스란히 치렀으니 스트레스 지수가 천장을 뚫은 것은 당연했다. 어찌 보면 한국인들만이 해낼 수 있는 무모함일 수도 있다. 이런 무모함이 종종 혁신을 이끌어낸다.
이번 BAMF를 기획한 "온;아티스트(on;Artist)" 기획실장 이정일과의 인터뷰는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닫게 했다. 독일 음악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한국 음악가들에게 무조건 갈채를 보냈던 내게 이정일은 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25년 동안 베를린 한국문화원에서 숱한 행사를 기획하며 한국 문화 전달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키웠다.
관제 홍보의 그늘과 '이름 없는 가능성'의 소외
해외에서 접하는 문화 홍보 행사는 주로 공공기관에서 연출한다. 이때 이미 국내외에서 명성을 떨친 유명 예술가들이 초청되어 화려한 무대를 꾸민다. 공공기관과 지원 단체의 관점에선 당연한 선택이다. 인지도가 높고 검증된 예술가들을 초대해야 행정적 부담과 결과에 대한 위험도가 낮다.
하지만 이 구조 속에서 소외되는 이들이 있다. 아직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신만의 뚜렷한 색깔과 예술적 방향성을 가진 젊고 역량 있는 예술가들이다. 정보와 네트워크가 부족한 이들에게 국제 무대의 문턱은 높기만 하다. 이정일과 최정원 부부는 그동안 쌓아 올린 그들의 가장 소중한 자산, 즉 '유럽 문화계의 인적 네트워크'를 청년들과 나누기 위해 문화예술법인 온;아티스트 on;Artist를 설립했다. 공공이 외면한 '가능성'에 무대를 열어주겠다는 선언이었다.

▲김대성작품 다랑쉬 공연김대성 작품 다랑쉬 공연 장면. 앙상블 눙크NUNC의 연주와 무용가 박은애의 환성적인 춤사위
BAMF; NA
실제로 이번에 참여한 한국의 '4jIT', '사나래', 그리고 'Ensemble NUNC' 등은 대중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은 오직 투명한 공모 과정을 통해 실력과 예술성만으로 이번 베를린 무대를 쟁취했다. 이들에게 세계적인 콘체르트하우스 무대 경험은 좋은 이력 추가를 넘어, 음악적 자부심과 성장의 동력을 얻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K-클래식'이라는 환상, 우리는 무엇을 수출하고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음악제가 던진 가장 묵직한 화두는 'K-클래식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다. 한국 연주자들이 세계적인 콩쿠르를 휩쓸고 오케스트라들이 유럽 투어를 다니는 것을 보며, 언론과 정부는 앞다투어 'K-클래식'의 쾌거를 부르짖는다. 그러나 "한국의 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의 고향인 독일에 가서 베토벤을 연주하고, 프랑스에 가서 드뷔시를 연주하는 것이 과연 '한국 클래식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일인가?"라는 이정일의 질문은 매우 타당하다.
유럽인들이 만든 음악을 그들 못지않게, 혹은 더 뛰어나게 연주하는 것은 물론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같은 눈높이에서 문화적 대화가 이루어진다고 볼 수 없다. 참된 의미의 K-클래식이라면, 한국 음악가들만의 독창적인 해석, 우리의 소리와 정서, 그리고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예술가들의 '동시대적 창작 언어'가 살아 숨 쉬어야 한다.
이번 BAMF에선 전통 악기를 현대적 어법으로 해체하고 재조립한 창작 국악을 선보였고, 서양 현대음악의 정교한 틀 속에 아시아의 정서를 녹여낸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다. 관객들에게 이국적인 '민속'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의 클래식 콘서트 문화와의 진정한 '음악적 대화'를 꾀했다. 우리가 진짜 세계 무대에 내놓아야 할 K-클래식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 사설 음악제가 보여준 셈이다.

▲몽골음악 연주몽골음악가의 연주 장면. 몽골 평원의 푸르디 푸른 하늘을 묘사한 곡.
BAMF; NA
지속 불가능한 '열정 페이' 구조, 이제 공공과 기업이 답해야 할 때
그러나 이번 음악제의 위태로운 재정 구조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취지가 좋고 예술성이 높다 한들, 기획자의 사비와 스태프들의 초인적인 희생, 그리고 참여 예술가들의 자비 부담으로 성사된 축제는 결코 오래갈 수 없다. 물론 해외 공연의 기회를 얻기 위해 예술가 스스로가 지원자를 찾고 투자하는 과정 역시 국제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는 논리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 독일의 수많은 페스티벌이 모두 공공비용으로 치러지지 않는다는 현실론도 맞다.
그러나 예술가와 민간 기획자가 모든 재정적 위험과 부담을 떠안는 구조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핵심 인력 단 4명이 하루 15시간씩 일하며 무대 조율부터 짐 나르기까지 감당해야 했던 열악한 현실은 이번 음악제뿐 아니라 K-문화의 화려한 외양에 가려진 문화예술계의 고질적인 구조를 또 한 번 보여주었다.
문화도 결국 일하는 사람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산업'이 되어야 한다. 다행히 이번 1회 BAMF 음악제에서 현지 언론의 관심과 찬사, 그리고 관객의 반응이라는 확실한 '실증적 성과'를 얻어냈다. 말로만 필요성을 주장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이미 성공시켰고 가능성을 증명했다는 강력한 카드를 쥐게 된 것이다.
2026년 5월 25일 밤,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객석에서 낯선 아시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을 열던 독일 관객들의 표정들이야말로 이 무모한 음악제가 계속되어야만 하는 살아있는 증거다.
이제 막 첫걸음을 뗀 BAMF가 5년 뒤 베를린의 주요 음악 행사 달력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까지 아우르는 진정한 아시아의 축제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해마다 음악회 방문 계획을 짜는 베를린 음악 애호가들이 달력에 BAMF라고 써넣기를 바란다. 이제 사회의 지원 사격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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