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08 13:56최종 업데이트 26.06.08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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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광복절을 전후해 연세대학교에서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있었다. 그해 8월 13일부터 15일까지 거행된 한총련의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 통일대축전에 대한 초강경 진압이 빚어낸 사태였다.

그달 21일 자 <한겨레> '한총련사태 전말'은 "대학생 5천여 명은 13일 오후 7시께부터 연세대 진입을 시도하며 지하철 신촌역 등에서 시위를 벌였다"라며 "연세대 안 학생들은 북쪽 대표를 마중하기 위한 판문점 진출이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자, 14일 0시 30분께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약식으로 통일대축전 전야제를 갖고 밤샘농성에 돌입했다"고 기술한다.


한총련은 14일 오전 연세대 대강당에서 남북해외청년학생 연석회의 및 범청학련 제1차 총회를 열었다. 그러자 "경찰은 오후 2시 45분께 전경 51개 중대 6천여 명과 헬기 11대 등을 연세대 안으로 투입"했다.

경찰은 돌과 화염병에 밀려 철수했다가, 15일 오전과 오후에 재차 진입했다. 이때도 철수한 경찰은 16일에 연세대 외곽을 봉쇄하고, 17일에 다시 진입해 학생들을 과학관과 종합관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 뒤 음식물 반입을 차단했다. 학생 대부분이 탈진하기를 기다린 경찰은 20일 새벽에 진입해 지친 학생들을 끌고 나왔다.

가장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연세대 사건으로 5848명이 연행되고 그중 462명이 구속됐으며 3341명이 불구속입건됐다. 재판에 넘겨진 110명 중에서 51명이 징역 8개월에서 5년의 실형을 받았다. 연행자 수로만 보면, 1986년 10월 28일의 건대 항쟁(1525명)을 능가하는 초대형 사건이다.

30년 전에 발생한 이 사건 당시의 인권침해를 규명하기 위한 움직임이 지금 전개되고 있다. '96년 8월 통일행사 당시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진정신청대행위원회(가칭)'를 이끄는 김종욱 당시 경희대 총학생회장은 포스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3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출범에 따라 1996년 8월 통일축전 당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의 길이 열렸습니다"라며 피해자들의 신청을 받고 있다. 300~500명의 신청인단이 꾸려지고 8월 초에 신청서가 제출될 것으로 보인다는 7일 자 언론보도가 있었다.

1996년 8월 연세대학교 통일축전 참여자를 찾는 안내문김종욱 페이스북

군사정권보다도 한술 더 뜨는 강경 진압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는 것도 모자라 헬기를 11대나 진입시킨 것은 그 당시에도 이례적이었다. 그해 8월 17일 자 <한겨레>는 "5공 정권 시절에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라는 표현을 썼다. 그 같은 초강경 진압은 초강경 저항을 초래했다. 보수 언론이 볼 때는 저항 수준 역시 사상 초유였다. 그달 20일 자 <조선일보>는 "이번 연세대 폭력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관 7백 6명이 부상당하고 1백 72명이 중상을 입어 사상 최대 규모의 인명피해를 입었다"라며 박일용 경찰청장이 총기 사용 가능성을 시사한 일을 보도했다.

문민정부를 자처하던 김영삼 정권은 군사정권보다도 한술 더 뜨는 강경 진압을 불사했다. 이는 전망이 불투명했던 1997년 대선에 대비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위 <한겨레>는 "내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보수층 유권자의 지지도 확보 차원에서" 그렇게 한 측면도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배경은 대북정책에 있었다. 북핵위기라는 초유의 이슈가 한반도 정세를 지배하게 된 1990년대 초중반 상황도 연세대 통일축전에 대한 강경 진압과 무관치 않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저는 역사와 민족이 저에게 맡겨준 책무를 다하여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전심전력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한 뒤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역설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러나 유효기간은 딱 보름이었다. 3월 12일에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제1차 북핵 위기가 터짐에 따라 한반도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남한의 대북 여론이 악화된 것은 물론이고, 한국 정부가 발언권을 행사하기 힘든 상황이 출현했다.

핵 문제는 핵을 가지려는 자와 핵을 가진 자의 문제다. 핵을 갖지도 않고 핵을 가지려고도 하지 않는 김영삼 정부는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었다. 이는 북한과 미국의 발언권을 상대적으로 더욱 높여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남북고위급회담을 열고 남북기본합의서(1991.12.13.)를 산출하던 노태우 정부 때보다도 못한 상황이 이로 인해 나타났다.

위 취임사에는 "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 협력할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호소하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핵 개발 카드를 손에 쥔 이 시기 북한의 대남정책은 통미봉남이었다. 미국과는 소통하고 남한은 봉쇄하는 이 전략을 김영삼은 극복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전쟁 위기설이 유행하고 남북실무회담에서 북측 대표의 '서울 불바다 발언'(1994.3.19.)이 나왔다. 이로 인해 한반도 긴장이 끝 모르게 고조되던 와중에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이 상황을 진정시켰다. 카터의 방북은 남북이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하는 역사적인 상황으로 이어졌다.

독일 통일(1990)과 구소련 붕괴(1991)를 계기로 세계 역사가 소용돌이치던 때였다. 이런 시기에 김영삼-김일성 회담이 성사돼 한민족도 탈냉전의 흐름을 탔다면 한반도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수도 있다. 회담이 성사됐다면 적어도 한동안은 평화로웠을 것이므로, 1996년 8월에 김영삼 정부가 연세대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82세 된 김일성이 1994년 7월 8일에 숨을 거두면서 카터 방북의 성과는 물거품이 됐다. 이 일은 '김일성 조문을 해야 하느냐 마느냐'라는 20세기판 예송논쟁을 초래하면서 한국의 대북 여론을 냉각시켰다.

대규모 병력과 헬기 부대를 연세대에 투입

이 분위기를 바꿀 기회가 이듬해에 있었다. 북한의 식량 사정은 남북이 쌀 회담을 여는 명분을 제공했다. 그해 6월 25일 쌀 지원에 관한 남북합의서가 체결되고 그날 저녁 한국 선박이 쌀을 싣고 떠났다.

그러나 북쪽의 현장 관계자들이 그 선박에 게양된 태극기를 문제 삼았고, 이 배는 일단 하역부터 할 목적으로 인공기만 게양한 채 청진항에 들어갔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한국 내의 대북 여론은 다시 악화됐다.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의 <70년의 대화: 새로 읽는 남북관계사>는 "남측 쌀 수송선이 북측 항구 입항 시 쌍방 국기 모두를 게양하지 않는다"라는 구두 합의가 있었다고 알려준다. 그런 사항이 양측 실무진에 신속히 전달되지 않아 불필요한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쌀은 쌀대로 주고 욕은 욕대로 먹은 김영삼 정부는 그 뒤에도 이 문제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잔여분의 쌀 수송에 참여한 또 다른 선박의 항해사가 북한에서 몰래 사진을 찍다가 간첩으로 몰리는 일이 그해 8월에 발생했다. 이 때문에 김영삼 정부는 대북 사과문을 보내야 했다. 위 책은 당시의 쌀 수송이 아래와 같이 끝났다고 알려준다.

"10월 7일 코렉스부산호의 동해항 출항을 계기로 대북 쌀 수송은 마무리되었다. 15일 김영삼 대통령은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더 이상 남북대화는 없다'고 밝혔다. 임기 말까지 그 말은 지켜졌다."

김영삼 정권은 핵 문제로 판이 커진 한반도 상황을 감당할 길이 없어 취임 2년 반 만에 대화 중단을 선언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총련이 이듬해 8월에 대규모 통일 행사를 열었다. 이는 강경 기조를 띠던 당시 정부의 대북정책과 충돌할 뿐 아니라, 남북 관계에 관한 한국 정부의 입지를 더욱 축소시킬 수 있는 일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통미봉남 정책에 걸려 북한의 외면을 받고, 핵 문제라는 이유로 미국으로부터도 소외 당했다. 이 와중에 일어난 연세대 통일축전은 학생운동권에도 밀릴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정권이 느끼게 만들었다.

위 <한겨레>는 한총련의 독자적인 대북 접촉으로 정부의 대북정책이 교란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정권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김영삼 정권은 대규모 병력과 헬기 부대를 연세대에 투입해 대규모 인권침해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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