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06 19:23최종 업데이트 26.06.06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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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과 2월, 전국 곳곳에서 김일성·김정일을 찬양하는 유인물이 살포됐다. 그해 2월 23일 자 <조선일보>는 "유인물들은 대부분 남도주체사상연구회와 반제청년동맹 등 2개 조직의 명의"라며 "마창 지역과 부산·울산 등 경남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으나, 반제청년동맹 명의의 유인물은 경남 이외에도 전국에서 비교적 광범위하게 등장"했다고 보도했다.

이 선전전을 통해 상대적으로 더 부각된 쪽은 김일성이 아니라 김정일이다. 김정일의 경우에는 생일 축하 플래카드까지 게시됐다. 이 플래카드는 김정일 생일 다음 날 마산 시내 번화가에 등장했다.


위 신문의 그달 21일 자에 따르면, 17일 저녁 마산 고속버스터미널 인근 3층 건물에 "경축 주체사상 위업의 위대한 계승자 김정일 동지 48돌"이라는 길이 4.52미터, 폭 0.52미터의 대형 현수막이 걸렸다. 이 건물은 마산동부경찰서 양덕파출소와 약 50미터 거리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선전전 참여자들이 김정일 홍보에 좀 더 신경을 썼음을 보여준다.

서른두 살 때인 1974년에 북한 내부적으로 후계자 지위를 인정받고 1980년에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김정일이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된 것은 1990년 5월이다. 김정일의 2인자 지위를 명실상부하게 공고히 하는 이 일이 있기 3개월 전, 남한에서 김일성보다 김정일을 부각시키는 선전활동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유인물은 학생운동권 유인물과 달랐다. 위 <조선일보>는 "경찰은 이들 유인물들이 기존의 주사파 계열 운동권 학생이나 좌경 지하운동단체들의 유인물과 용어나 문체 등에서 뚜렷이 구별되며, 노골적으로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 일색인 점을 중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길거리·주택가·술집·지하철역·기업체·공중전화박스·대학가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살포됐다. 자금력은 물론이고 전국적인 조직력과 시스템이 필요한 이 유인물 살포는 운동권 학생들이 벌였다고 보기는 힘든 일이었다. 이 시기 운동권 학생들에게 그만한 역량이 확보됐다면, 그들은 김일성·김정일 찬양보다는 전두환·노태우 처벌을 촉구하는 선전 활동에 좀더 신경을 썼을 것이다.

당시 언론보도에도 나타난 것처럼, 경찰 역시 학생운동권이 뿌린 유인물로 보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수사 과정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공안기관은 별 고민 없이 학생운동권 출신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20대 후반의 경상대학교 의과대학 제적생(민주화운동 했다는 이유로 유급·제적)인 진홍근은 이런 수사 방식의 피해자였다.

누명 씌우고 80여일간 불법 구금

진홍근 (사)경남유월민주항쟁정신계승시민연대 이사뉴스사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25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34권 진홍근 편은 "진주경찰서는 1990. 1.~2.경 경상대학교 학생회관과 진주 지역에서 남도주체사상연구회 명의의 김일성 찬양 유인물이 발견되자, 과거 학생운동을 주도한 적이 있던 신청인을 용의자로 지목하고 수사를 시작하였다"고 기술한다.

이 사건에는 증거물이 많았다. 당시로서는 '신기술'인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으로 작성된 유인물들이 있었고, 위에 언급된 대형 현수막도 있었다. 그런데 공안기관이 진홍근을 용의자로 지목한 것은 이런 증거물들이 그를 가리켰기 때문이 아니다. 과거에 그가 이 지역 학생운동 리더였다는 것이 이유였다. 증거를 따라가는 수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위 보고서에 인용된 1990년 3월 16일 자 진주경찰서 수사보고에는 1983년에 입학한 진홍근이 1986년 10월 16일에 경상대 민중민주화투쟁위원회 결성을 조종했고, 1987년에 9차례의 교내 시위를 주도하거나 조종했으며, 진주시 주약동 자취방에 진주민주청년회 회원과 운동권 학생 서너 명이 출입했고, 주거지에 이적표현물이 많다는 첩보가 있다는 점 등이 적혀 있다.

공안기관은 유인물 살포와 무관한 위와 같은 사항들을 근거로 1990년 3월 19일 새벽 1시 5분부터 40분간 진홍근의 주거지를 압수수색하고 그를 남도주체사상연구회 수괴로 연행했다. 이렇게 시작된 불법 구금은 80여 일간 이어졌다.

진홍근의 과거 경력과 유인물 살포를 곧바로 연결할 수 없다는 점을 공안기관도 인식하고 있었다. 공안기관이 그를 용의자로 지목한 뒤에 혐의점을 찾고자 잠복 수사를 벌인 것은 그 때문이다. 혐의점을 찾은 뒤에 용의자로 지목한 게 아니라 일단 지목한 뒤에 혐의점이 있나 없나를 조사했던 것이다. 경찰은 그의 혐의점을 찾아내기 위해 밀정의 일종인 망원(網員)도 동원했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인용된 당시의 수사 기록에 따르면, 공안기관은 2월 28일에는 "단서 포착이 되지 않아 계속 수사 중"이라고 보고했다. 3월 9일에도 "특이 동향 없었음"이라고 보고했다. 경찰과 망원이 참여한 이 수사에서 확인된 것은 진홍근이 자취방이 아닌 친구 집에서 잠자는 일이 많고 통일다방 같은 데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다는 점이었다.

혐의점이 나오지 않았다면 수사가 종결됐어야 하는데도, 수사는 계속됐다. 공안기관은 '단서 포착 안 됨', '특이 동향 없음' 같은 내부 보고가 나온 뒤인 3월 19일에 그를 연행했다.

이 사건은 전국적 조직력과 자금력을 갖춘 집단이라야 벌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수사기관은 아무 증거도 없이 진홍근을 수괴로 지목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연행 당시 진홍근은 자신이 과거의 학생운동 때문에 잡혀가는 줄로 생각했다. 김일성·김정일 찬양 유인물과 엮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막상 진주경찰서 대공과에 갔더니, 제가 남도주체사상연구회의 수괴라는 혐의를 씌우고 자백하라면서 수사관 3명이 각목 구타, 비녀 꽂기, 잠 안 재우기 등의 고문을 하였다"고 진술했다.

그해 7월 29일 자 <한겨레>는 당시 진주 동쪽의 마산 지역에서 자행된 비녀꽂기 고문에 관해 "두 손에 채운 수갑과 두 발에 채운 수갑끼리 등 뒤로 돌려 포승으로 묶어 등이 활처럼 휘게 해 고통을 주는 고문"이라고 설명했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 시기 마산교도소에서 시국사건 재소자에게 자행한 비녀꽂기 방식은 그러했다.

해괴한 지하단체의 수괴로 몰리며 견디기 힘은 고문을 당한 진홍근은 잠시나마 극단적 생각을 품었다. 그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고문을 견디기 힘들어 수사관에게 바람 쐬러 가자고 한 다음, 경찰서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했지만 수사관이 제지"했다고 진술했다.

고문과 가혹행위... 혐의는 고작 '불온서적 구입'

공안기관은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극단적인 고문과 가혹행위를 자행했다. 그렇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자 슬그머니 혐의를 바꿨다. 진홍근은 "검찰에선 남도주체사상연구회의 수괴 혐의가 아닌 불온서적 구입으로 조사받았"다고 회고했다. 혐의 입증이 어렵다고 판단되자, 자취방에 있었던 서적들을 문제 삼기 시작했던 것이다.

검찰이 문제 삼은 책들은 <민주주의 혁명론>을 비롯한 7권이다. 당시의 일반 서점에서 판매되는 책들이었다. 혐의 입증에 실패했으면 사과하고 석방해야 하는데도, 이런 식으로 계속 붙들어두고 재판에 넘겼던 것이다.

진홍근에 관한 경찰·검찰의 수사 과정을 기록을 통해 모두 확인한 마산지방법원 진주지원은 국가보안법이 금지하는 이적표현물을 소지했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및 자격정지 10월을 선고했다. 혐의없음이 확인된 피고인을 무죄선고로 풀어주지 않고 집행유예선고로 풀어준 것이다. 국가의 '곤조'를 보여주는 판결이었다. 이 판결은 그해 9월 26일 마산지방법원의 항소기각으로 확정됐다.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윤성효

경찰·검찰·법원이 모두 개입된 이 국가범죄의 실체는 35년 뒤인 2025년 11월 12일의 재심 재판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이날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은 진홍근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0월 15일에 검찰이 무죄를 구형했기 때문에 이 재심은 진주지원 판결로써 확정됐다.

진홍근 사건은 냉전·반공체제 하의 공안사건 수사가 얼마나 허술하고 엉터리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공안사건 수사는 국가안보를 위한 수사다. 이런 수사를 올바로 해야 진정한 의미의 안보를 기약할 수 있다. 그처럼 허술하고 엉터리 같은 방식으로 공안사건이 처리됐다는 것은 대부분의 공안사건 담당자들이 실제로는 국가안보에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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