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12 07:05최종 업데이트 26.06.1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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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1980 사북, 늦은 메아리'는 박봉남 감독의 영화 <1980 사북> 전국 상영을 계기로 공론화한 사북 사건을 단지 과거사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국가의 대응, 공동체와 시민 사회의 변화 과정을 추적 기록해 국가 폭력의 기억과 치유 과정을 시민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기자말]
사건의 의미는 고사하고, 그 사건의 발생 자체를 알기 힘든 시대가 있었다. 언론이 계엄 당국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되던 1980년이 그랬다. 그해 4월 23일 <동아일보> 사회면의 한 구석에 짧은 기사가 실렸다.

강원도경은 22일 장성경찰서장 홍응수 총경과 정선경찰서장 홍문섭 총경을 대기 발령하고 장성경찰서장엔 인제경찰서장 김일권 총경을, 정선경찰서장엔 횡성경찰서장 권근호 총경을 각각 발령했다.

이 기사를 읽고 강원도 정선의 작은 탄광 마을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장성경찰서장 홍응수는 그해 4월 21일 밤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뒷편 객실(안가)에서 보안부대장, 중앙정보부 조정관, 정선경찰서 정보과장 등과 모여 있다가 광부들에게 붙들려 폭행을 당하고 권총까지 잃어버렸던 인물이다. 같은 날 <경향신문> 1면 하단에 또 하나의 기사가 실렸다.

정부는 23일 상오 중앙청 후생관에서 신현확 국무총리 주재로 관계각료간담회를 열고 현안 문제를 논의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총리와 진의종 보사부 장관, 주영복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각 부처 장관과,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 권력 실세들이 모두 참석했다.

전두환을 비롯한 당시 권력의 실세들과 국가 핵심 각료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는 그 '현안 문제'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추측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사북 광부 집단난동" 등의 자극적인 제목이 거의 모든 조간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당일 새벽 극적인 노사정 합의로 모든 것이 종료된 시점에서, 이미 3일이나 지나버린 싸움의 이유와 동기에는 아랑곳없이, 이유 없는 난동과 가학적 이미지로 덧칠된 '사북'은 굶주린 자들을 위한 먹잇감처럼 세상에 던져졌다.

하나의 사건, 여러 개의 시각

영화 <1980 사북> 스틸컷엣나인필름

한 달 후 광주 시민들에게 그랬듯, 당시 신군부가 장악한 언론은 사북 광부들을 '폭도'로 규정했다. 오랫동안 광주라는 이름 뒤에도 따라붙었던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사북이라는 이름 뒤에 '사태'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을 더 자연스럽게 여겼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두고 이런저런 논평을 쏟아냈다. 1980년 4월 24일자 <경향신문>에는 "사북 '동원탄좌' 집단 난동… 각계의 소리"라는 제목으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실렸다.

"광부들의 동기는 이해하지만 폭력은 잘못이다. 특히 당사자도 아닌 지부장 부인에게 사적인 형벌을 가한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김덕성, 원증산업 대표)

"이제까지 노동3권을 억압해 왔고 기업은 정부 비호 아래 노동자 권익을 무시해왔다는 반성이 필요하다."(김춘봉, 변호사)


"여자를 상대로 린치를 가한 민중 저변층의 난동, 사태를 그렇게 몰고 갈 줄 밖에 모르는 졸렬한 당국, 두 계층에 대한 불신은 내일의 기대를 어둡게 한다." (이상일 성균관대학교 교수)

그러나 신군부의 의도나 사람들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사북에서 일어난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여러 면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북'이라는 충격파

가장 먼저 사북사건의 의미를 알아 본 것은 존재감 없던 광부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듯 큰 충격을 받았던 언론인들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사북사건에서 평화시장(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 항거 이후 촉발된 청계피복노조의 노동 운동) 못지 않은 시대적 상징을 보았다.

<평화시장 농성>이나 <사북의 소요사태>는 이미 노사문제가 어떤 한계에 도달해 있음을 뜻한다. 이들 사태는 국지적인 직장 범위에서 일어난 '사건적' 차원을 벗어난 전환기 산업 사회의 심각한 진통 현상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한계점 이른 노사문제 심층분석", <경향신문> 경제부, 1980년 4월 24일자)

적지 않은 지식인들은 사북 사건을 통해 사회적 모순을 깨닫고 그 근본적인 해결의 필요성을 느꼈다. 특히 사북 사건은 1980년대 학생 운동이 민중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계엄령 해제' 등을 요구하는 일부 대학의 '시국 및 정치 성토'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1일에 이어 2일에도 계속된 서울대 성균관대 등의 교내 시위에선 정치적인 구호 뿐 아니라 사북 광부 소요 사태의 진상 발표 등 사회 고발적인 측면도 들고나와 그 범위가 넓어졌고 그 방법도 과격해졌다. (<경향신문>, 1980년 5월 3일자 사회면 기사)

무엇보다 당시 부당한 노동탄압 구조와 어용노조에 질식 당하던 노동자들은 사북 사건을 통해서 큰 용기를 얻었다.

올 들어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각종 노사분규는 28일 현재 전국 각 사업장에서 모두 719건이나 된다. 이를 원인별로 보면 체임지불요구 534건, 임금인상요구 26건, 휴폐업반대 25건, 부당해고항의 9건, 어용노조반대 33건 등이다. (<경향신문> 사회면, "사북사태 이후 임금농성·파업 잇달아, 28일 현재 전국 분쟁 719건", 1980년 4월 28일)

사북 사건은 1980년대 이후 활발히 전개된 우리나라 대중적 노동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사북 광부들의 유혈난동의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부산시 동국제강 종업원 1천여명이 임금인상 등을 내걸고 농성을 벌이던 끝에 사무실 집기를 부수는 등 난동화했다는 것은 앞으로 점점 늘어날 노사분규를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동아일보> 사설, 1980년 5월 1일자)

사북사건의 여파는 강고해 보이던 정부의 노동 정책도 변화시켰다.

정부는 사북 동원탄좌 광부 소요사태 이후 근로자들의 불만이 집단행동으로 나타나고 그들의 불만이 점차 정부의 노동정책에 쏠릴 것에 대비, 노사분쟁 조정업무를 감독 관청인 노동청의 관할에서 민간기구인 중앙노동위원회로 넘겨 최종조정토록 하는 등 노사분규 조정업무의 자율화를 적극 펴나가기로 했다. (<경향신문> 사회면, "노사분규 조정업무 자율로, 노동청 주도서 중앙노동위로 넘겨", 1980년 4월 28일)

잊힌 산업전사들

영화 <1980 사북> 스틸컷엣나인필름

사북의 광부들은 한 때 '산업전사'로 불렸다. '산업전사'라는 말은 중의적이다. 국가는 이를 광부들에 대한 영예로운 칭호로 여긴 듯하지만, 이 말은 당시 광부들이 마치 '전쟁을 치르듯' 석탄증산에 '동원되었음'을 반증 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1979년 한 해 동안 각종 사고로 숨진 광부는 2백21명이나 됐고 5천2백여명이 다쳐 산재율 최고를 기록했다. 석탄 1백만톤을 캘 때마다 12명이 숨지고 3백20여명이 다치는 세계 제일의 위험 속에서 광부들이 일한 셈이다.(<경향신문>, 1980년 4월 28일)

이 나라의 아랫목의 온기를 지켜주었던 사람들을 당시 권력자들과 경찰들은 마치 눈 먼 두더지처럼 여기며 함부로 대했다. 사건 이전에 광부들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왔다는 사실은 당시 정부 당국의 공식 발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정부 합동 조사 결과 회사 측은 ▲임금인상 기준이 되는 직전 3개월 분 임금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려 인상 기준을 낮추었고 ▲징계자에 대하여 상여금을 40~60% 삭감하여 이중 처벌을 했고 ▲목욕시설 부족, 식수난, 열악한 주거 여건 등 광부들의 임금 복지 후생문제를 등한히 해 왔고 ▲광부 사이에 정보원들을 배치하여 동태를 살피도록 한 것 등도 이번 사태를 불씨가 되었다. ("정부 종합발표 사북사태 원인 기업주 노조간부 횡포", <동아일보> 1면, 1980년 5월 3일)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사북 광부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 "사람 대접도 제대로 안 해주면서 성인 군자의 거동을 기대한다는 것은 염치없는 과욕"이라고 변호했다. 아무도 이들을 살펴주지 않았기에 그들은 자기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혹독했다. 사건 이후 그들의 삶은 좋지 않은 의미에서 완전히 달라졌다.

사건 밖의 사람들의 삶도 달라졌다. 고문과 아비규환의 현장에 울려 퍼졌던 비명과 애원이 지나간 자리에서, 그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모든 것이 다시 자리를 잡았다. 광업소에 처음으로 목욕탕이 생겼고, 봉급이 크게 올랐고, 광산촌의 살림도 조금 나아졌다.

지역사회 및 주민들과 이 나라의 노동자들이 그나마 권리를 되찾고 평온한 삶에 이르기까지, 1980년 사북의 수많은 광부들과 여성들이 인권과 삶을 박탈 당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1980년 사북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한 장면으로 그 후로도 언뜻언뜻 되살아 났다. 1997년 사북을 다녀간 작가 방현석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사북을 찾는 이 겨울, 당신은 어디를 걷더라도 함부로 힘주어 걷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딛고 선 그 땅 지하 7백m 아래 어디선가는 한 달에 80만 원, 많아야 120만 원을 벌기 위해 탄가루를 마시며 채탄 작업을 벌이고 있을 광산 노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저항 : 방현석의 노동운동사 산책>, 도서출판 작은책, 1999년)

실제로 아직 광산이 문을 닫기 전의 사북 땅에서는 함부로 힘을 주어 걷다가는 시커먼 진창에 깨끗한 신발을 더럽히는 낭패를 겪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사북은 카지노 도시로 변했고, 사북의 거리에는 발걸음을 삼가지 않고 마구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북의 이야기가 잊힌 데는 탄광업이 하나의 산업으로서 국가에 의해 폐기되고 광부들의 역사 무대가 폐광으로 소멸된 것도 큰 몫을 차지한다. 한 때 큰 세력을 자랑했던 광산노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광부들은 자신들의 일터를 떠나 전국으로 흩어졌다. '산업전사'라는 애매한 헌사 이후 그들을 위한 영웅 서사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북 광부들의 4월 항쟁은 폭도 낙인과 논란 속에 노동운동으로서도 크게 부각되지 못했고, 5월에 겪었던 그들의 처절한 고난도 광주 시민 학생들의 거대 수난사에 가려졌다. 1980년대 이후 한국 노동 운동의 상징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남은 것은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을 통해서 널리 알려진 1970년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이야기였다. 평화시장에서 죽어간 어느 청년노동자의 이름은 그의 대학생 친구를 통해 알려졌지만,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서 쓰러진 어느 광부의 이름은 아무에게도 회자되지 않았다.

강원도의 광부 이원갑은 2005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은 직후 이런 말을 남겼다.

처음부터 이 사건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정리해서 공론화해줘야 하는데 공론화해 줄 후원자도 없었고, 우리는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소리도 질러봤고 많은 사람들에게 손도 내밀어 봤습니다. 그런데 광부들 손은 새까매서 그런지 아무도 잡아주는 사람이 없었고 광부들은 암만 소리를 크게 질러도 이것은 허공에 사라지고 없습니다.(이원갑, 2005년 8월 18일 KBS제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중에서)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들

2008년 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사북 사건에 대한 국가 사과를 권고하면서 국가의 책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한 바 있다.

국가는 사회적 합의에 대한 신뢰를 보호하고 증진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사북 사건 당시 계엄당국은 과도한 공권력으로 노사정 합의를 일방적으로 무시함으로써 지역공동체를 파괴하고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였다. 사북 사건의 교훈을 통해 국가는 사회적 합의를 존중하고 사회집단들의 이해충돌과정이 민주적이며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여야 한다.

국가의 존재 이유를 준엄하게 꾸짖었던 18년 전의 문서는 이미 빛이 바랬다. 대한민국은 지속되고 있지만, 국가 운영을 책임진 사람들은 사북 지역 공동체가 겪고 있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국가의 책무와 사북을 둘러싼 역사의 아이러니가 하나 더 있다.

1980년 10월 5일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사북을 방문했다. 이 일정에는 내무부장관, 국방부장관, 농수산부장관, 동력자원부장관과 비서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수석비서관들, 강원도지사 등이 대거 동행했다. 사북을 찾은 전두환은 광부 옷으로 갈아 입고 650 갱도를 시찰한 데 이어, 지장산 사택과 동원국민학교에 들러 광부와 그 가족들을 만났다. 또 동원보건원을 방문, 채탄 작업 중 부상을 입은 광부들을 위로하고 중환자들에게 위문금을 전달했다. 보름 후 사북에 있는 3개 국민학교에는 대통령이 약속했던 대로 학생1인당 노트5권, 연필 1다스, 크레파스 1통씩 모두 4130세트가 전달됐다. 처음으로 국가 최고위급의 방문과 위로를 받았던 사북사람들은 그해 지장산 사택 앞에 "대통령 오신 우리 마을"이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광부 사택 자리에는 강원랜드 메인카지노 호텔이 들어섰지만, 광산촌 사람들의 자랑이던 기념비는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영화 <1980 사북> 스틸컷엣나인필름

한편, 2000년대 과거사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된 이래,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 등 대통령이 여섯 번 바뀌었지만, 이들 중 아무도 재임 중 사북 사건을 거론하거나 사북 광부들을 찾은 대통령은 없었다.

이것을 거창하게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민주 정부에 야박하게 외면 당한 민초들의 설움이라고 해야 할까?

고통스러운 '기다림'으로 변한 '희망'을 품는 일

그런 점에서 "국가폭력으로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전범 처리 하듯 끝까지 처벌하겠다"는 대통령의 등장은 사북사건 피해자들에게 특별하게 보였다. 많은 이들은 국가폭력에 관한 대통령의 강력한 메시지가 나올 때마다 그것이 사북에 관한 국가 사과 실행의 전조가 아닐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다시는 국가 폭력으로 인해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대통령으로서 모든 조치를 다할 것을 약속합니다. 2021년 제정된 여순 사건 특별법에 따라 신속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 있는 조치를 하겠습니다.(이재명 대통령, 여수·순천 10·19사건 제77주년 추념사에서, 2025년 12월 19일)

2025년 말, 많은 사람들에게 좌익 폭동으로 알려진 여수순천사건 추념일에도 "다시는 국가폭력으로 인해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대통령으로서 모든 조치를 다할 것을 약속한다"는 메시지가 발표되는 것을 보고, 사북 사건 해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2026년을 기대한 것은 당연했다.

제주 4.3희생자추념일을 닷새 앞두고 이재명 대통령이 제주를 찾아 희생자 유족들과 간담회를 가진 것은 이러한 기대감을 더욱 키웠다. "제주 4.3을 기억하며 국가폭력의 재발을 막기위해 민형사 시효제도를 폐기하겠습니다"라고 적은 대통령의 4·3평화공원 참배 문구는 사북사건 관련자들을 한껏 고무 시켰다.

사북항쟁 46주년이 되던 2026년 4월 21일, MBC <PD수첩>은 '1980 사북' 특집을 방송했고, 이틀 후 대한민국 국회는 여야 국회의원 73명이 발의한 '1980 사북사건 국가 사과 이행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사북사건에 대한 국가사과 이행을 촉구해 온 시민사회는 이제 대통령의 응답만 남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때 대통령은 인도와 베트남을 방문 중이었고, 해외 순방에서 돌아와서도 '사북'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사북사건을 상징하는 4월이 그냥 지나갔고, 다시 사북은 5월 광주를 위해 열린 공간에서 잠시 물러서야 했다. '희망'을 품는 일은 '고통스러운 기다림'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대통령은 5월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 직후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다시 한 번 국가 폭력에 관한 메시지를 냈다.

국가폭력은 국민의 안전과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주권자가 위임한 권한으로 도리어 국민의 인권과 생명을 짓밟는 반인륜적이고 반사회적인 중대범죄입니다. 우리 공동체에 미치는 해악과 지속성을 고려해 볼 때 다른 범죄들과 동일선상에서 취급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합니다.(이재명 대통령, 제34차 수석·보좌관 회의 발언, 2026년 5월 21일)

'희망 고문'은 계속된다. 영화 <1980사북>을 통해 국가폭력 사건으로서 사북사건이 갖는 특별한 의미를 공감한 99개 시민단체는, 대통령실에 보낸 공문을 통해 국가 사과의 이행을 촉구하면서 이 영화를 대통령이 함께 볼 것을 제안했다. 그 사이 대통령 부부가 다른 영화를 관람했다는 뉴스는 몇 번 나왔지만, 영화 <1980사북>을 관람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사북 사건과 피해자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국가폭력 근절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가진 대통령의 시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사북'이라는 역사 앞에서

영화 <1980 사북> 스틸컷엣나인필름

누군가는 현 대통령의 거듭된 사과가 국정에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국가폭력의 가해자는 국가이며, 국정의 최고 책임자는 당연히 그에 대해 당사자로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위정자는 바뀌지만 국가는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가장 소외된 지역과 계층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임하는 지를 보면 정치인들의 진정성을 알 수 있다. 사북이 계속 외면 당하는 한, 국가 폭력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역사적 책무의 이행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 행위로 의심 받게 될 것이다. 46년 전 사북 광부 김제순의 하소연은 허공에 흩어진 채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

"회사도 그동안 광부들이 흘린 피땀으로 돈을 벌었으면 좀 내놓을 줄도 알고 정부도 버린 자식 취급만 하지 말고 근본적인 지원책을 마련해 줘야 할 것 아닙니까?"

(사북광업소 710갱 선탄부 38세 김제순, "광부의 24시-불만 터진 검은 마을의 실태", <동아일보> 특별취재반, 1980년 4월 26일)

이제는 87세가 된 사북 사람 이원갑은 이 외침이 메아리로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며 46년을 견뎌 내고 있다.

사북항쟁 시기 국가폭력에 대한 공식 사과 이행 촉구 사북사건 피해자 및 유가족 기자회견사북항쟁 제46주년을 1주일 앞둔 14일 오전 사북민주항쟁동지회 주최로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에서 '사북항쟁 시기 국가폭력에 대한 공식 사과 이행을 촉구하는 사북사건 피해자 및 유가족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이정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정선지역사회연구소의 1980사북 특별페이지(www.jcrc.kr)에도 실립니다. 저자는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사북항쟁과 국가폭력>(지식공작소, 2021)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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