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를 포함해 클래어런스 J. 캐리어 교수의 제자들이 함께 2001년에 출판한 <변명의 여지 없는 누락: 클래어런스 캐리어와 교육사 연구의 비평적 전통>의 표지. 캐리어 교수의 사상을 바탕으로 미국 교육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탐구한 책이다.
Peter Lang Inc.
지도교수의 도움으로 4년 만에 '점령지 한국에서의 미국 교육정책의 이념적 배경, 1945~1948'이란 제목의 논문을 제출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을 하루 앞두고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간 날 작은 이벤트가 벌어졌다. 커피 이벤트였다.
첫날 만나서 나눈 맥스웰하우스 커피 이야기를 꺼냈다. 그날 그 커피 이야기 덕분에 내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온전히 이해하고 논문을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캐리어 교수는 나를 학과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머그잔을 꺼내서 나에게 커피를 따라주었다. 4년 동안 나를 도왔던 캐리어 교수와 바바라, 그리고 나는 함께 미국에서의 마지막 커피를 마셨다. 여전히 썼다.
생각해 보면 유학 4년 동안 커피를 볼 때마다, 나는 '이 커피를 마셔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달고 살았다. 지도교수가 제자인 나에게 준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도덕적 불편함'을 상징하는 질문이었다. 지식인은 도덕적으로 너무 편안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였는지도 모른다.
귀국 후 나는 어렵지 않게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남과 북이 함께 유엔에 가입하고,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섰던 1990년대 중반에 지도교수에게 편지를 썼다. 한국에 초청하고자 하는데 오실 수 있는지를 물었다. 한국에서 함께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얘기도 담았다. 그런데 지도교수는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긴 답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고 싶은 나라는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2년을 보냈던 한국, 사랑하는 제자 길상이 있는 한국이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 가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헤아려보면, 그것은 마치 범죄자가 범행 현장을 궁금해하는 그런 것에 가깝다고 느낀다. 나의 이런 죄의식은 남과 북이 통일이 되던가, 적어도 남한이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날 사라질 것 같다. 그날이 빨리 와서 서울이나 춘천에서 함께 커피를 마시고 싶다. 아직은 아닌 것 같다.
안타깝게도 지도교수는 나와 이런 편지를 주고받은 얼마 후 큰 심장 수술을 받고, 교수직을 은퇴하였다. 끝내 한국에서 함께 커피를 마시지는 못한 채, 2013년 11월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의 부고와 함께 그의 생애가 지역 신문에 실렸다. 기사에는 "그는 제자들의 존경을 받았고, 그래서 그가 은퇴하였을 때 18명의 제자가 그의 업적을 기리는 논문집을 출판한 바 있다"고 씌어 있다. 그 18명 중 한 명이 한국에서 그와 커피를 마시며, 그가 지고 있던 한국을 향한 마음의 짐을 내려주고 싶었던 제자 이길상이다.
('커피 한잔에 담긴 문화사' 저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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