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혁 국민의힘 상임선거대책위원장등 지도부가 3일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 마련된 개표상황실에서 방송사 출구조사 발표 뒤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집과 길의 선거, 30만 호 숫자보다 중요한 질문
서울시장 선거의 핵심 쟁점은 집과 길이었다. 주요 후보들은 2031년까지 30만 호 이상 주택 공급을 약속했다. 정원오 후보는 정비사업 기간 단축을 통해 36만 호 착공을 말했고, 오세훈 후보는 인허가와 규제 개선을 통해 31만 호 공급 물량을 확보하겠다고 했다.
두 후보 모두 청년 주거와 교통사각지대 해소를 앞세웠다. 유권자가 이 공약에 귀를 기울인 이유는 단순하다. 집값과 전세, 출퇴근 시간은 이념이 아니라 매일 겪는 생활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30만 호'라는 숫자는 질문의 시작일 뿐이다. 어디에 지을 것인가.
정비사업 속도를 높이면 세입자 보호는 어떻게 할 것인가. 철도와 도로를 늘리면 공사 기간의 안전과 소음, 지하 공간의 위험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집과 길은 개발 공약이면서 동시에 안전 공약이다.
공항·철도·산단, 지방경제의 약속어음인가
비수도권에서는 대형 사회간접자본 공약이 선거판을 달궜다. 부산은 가덕도신공항과 항공물류 허브를, 대구·경북은 통합신공항과 후적지 개발을, 여러 지역은 철도 지하화와 광역철도, 트램, 산업단지 조성을 내세웠다. 지역에서 이런 공약이 힘을 얻는 이유는 분명하다. 청년이 떠나고 상권이 비고 대학이 줄어드는 현실 앞에서, 주민들은 '큰 판'의 변화를 원한다.
그러나 대형 SOC 공약은 늘 같은 벽을 만난다. 돈이다. 철도 지하화는 상부 개발이익으로 사업비를 마련하겠다는 구상이 많고, 신공항은 이전 부지와 배후단지 개발을 함께 묶어 설명된다. 부동산경기와 민자 유치가 흔들리면 공약은 장기 표류로 바뀐다. 선거 때마다 반복된 장밋빛 조감도가 이번에도 통하려면, 당선인은 착공식 사진보다 먼저 재원표를 내놓아야 한다. 어느 예산으로, 어느 기관이, 어느 위험을 감수할지 공개하지 않는 SOC는 지방 창생이 아니라 다음 선거로 미뤄지는 약속어음에 가깝다.
AI 수도가 너무 많은 나라, 데이터센터 공약의 빈칸
이번 지방선거의 새로운 풍경은 AI였다.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후보들은 AI 수도, AI 허브, 피지컬 AI, AI 데이터센터, 반도체 클러스터를 경쟁적으로 말했다.
그런데 AI 공약의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빈칸이었다. 녹색전환연구소·참여연대·환경정의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공개 공약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광역·기초단체장 후보 624명 중 77명, 12.3%가 데이터센터 유치 공약을 냈다. 반면 재생에너지 공급 대책을 함께 제시한 후보는 4명에 그쳤다.
데이터센터는 전기와 물을 많이 쓴다. 지역 전력망이 버틸 수 있는지, 냉각수는 어디서 확보할지, 주민에게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고 동의를 받을지, 실제 고용은 얼마나 생길지 따져야 한다. '데이터센터가 오면 청년 일자리가 생긴다'는 말은 반만 맞다. 서버가 들어온다고 지역 청년의 일자리가 자동으로 생기지는 않는다. 지방대학의 교육과정, 지역 중소기업의 AI 활용, 공공조달, 직업전환 훈련이 함께 움직여야 비로소 지역경제의 일자리로 이어진다.
올해 1월 22일부터 인공지능기본법과 디지털포용법이 시행됐다. 법은 이미 지방정부에 숙제를 던졌다. AI를 산업 유치 구호로만 쓸 것이 아니라, 주민의 권리와 안전, 접근성을 함께 설계하라는 뜻이다. 복지 신청에서 배제되는 고령층을 누가 찾아갈지, 재난 예측 데이터가 위험 신호를 냈을 때 누가 공사를 멈출지, 데이터센터 입지 결정 과정에서 주민 의견을 어디에 기록할지 정하는 일이 지방정부의 몫으로 넘어왔다.
선거 막판을 흔든 안전, 사고는 이미 투표용지에 들어와 있었다
이번 선거에서 안전은 뒤늦게 끼어든 의제가 아니었다. 투표일을 이틀 앞둔 6월 1일, 대전 유성구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전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해 직원 5명이 숨지고 2명이 다쳤다. 5월 26일에는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서소문 고가차도 철거 현장에서 구조물이 무너져 3명이 숨지고 3명이 다쳤다. 이 고가차도는 안전등급 D 판정을 받아 철거 중이었고, 사고 당시에는 안전점검이 진행되고 있었다.
안전을 확인하러 간 사람들이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은 선거 막판의 모든 구호를 무겁게 만들었다. 안전은 사고 뒤의 사과문이 아니라 사고 전의 공개, 멈춤, 재검증이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사회가 되지 않으려면, 지방정부의 안전행정은 선거용 문구가 아니라 조직과 예산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GTX-A 삼성역 복합환승센터 철근 누락도 같은 질문을 남겼다. 보도에 따르면 전체 기둥 218개 가운데 80개에서 철근 누락이 확인됐고, 이 중 50개는 설계 기준에 미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누락규모는 약 178톤에 달했다. 더 큰 문제는 철근 누락 같은 중대한 구조 부실이 발견된 단계에서 발주처나 관계기관에 즉시 보고해야 한다는 명확한 규정이 사실상 공백이라는 지적이다. 이쯤 되면 안전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다.
공약의 시간은 끝났고, 검증의 시간이 왔다
6·3 지방선거의 심층해부는 개표방송의 색깔표에서 끝나면 안 된다. 내일 아침 시민은 다시 지하철을 타고, 전세 대출 이자를 계산하고, 부모 돌봄을 걱정하고, 비 예보를 확인하고, AI가 바꿀 일터를 불안하게 바라본다. 이 평범한 하루를 지키지 못하는 지방정부라면 어떤 거창한 공약도 오래가지 못한다. 지방정부의 첫 일은 주민을 살아 있게 하고, 일할 수 있게 하며, 떠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만드는 일이다.
선거운동 기간 후보들은 저마다 더 나은 도시, 더 강한 지역, 더 안전한 내일을 약속했다. 이제 그 말은 행정문서가 되어야 한다. AI 데이터센터는 전력·용수·주민동의표를 붙여야 하고, 신공항과 철도지하화는 재원표를 붙여야 하며, 안전 공약은 위험 공개와 작업중지 권한을 붙여야 한다. 그래야 공약이 구호에서 제도로 건너간다.
투표함은 닫혔다. 그러나 공약의 속살은 이제 열려야 한다. 오늘 밤 당선 예측 화면에는 승자와 패자가 갈리겠지만, 시민의 삶은 화면 밖에서 계속된다. 6·3 지방선거가 정당의 승패로만 기록될지, 지역 주민의 일상과 안전을 바꾼 선거로 남을지는 오늘 밤 이후 4년의 행정이 결정한다. 민심은 표로 말했고, 이제 지방정부가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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